▲영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수백만 달러를 버는 법> 스틸컷
Netflix
03.
"이제 내가 할머니를 돌봐줄 차례야. 지금부터는 할머니와 시간 보낼래."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인 노인 돌봄 이슈를 소재의 중심에 두고 있다. 해당 이슈에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영화가 지적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영화 초반 무이를 통해 드러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15분 정도 있다가 가는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너무 싫었다'던 말 속에서다. 어르신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시간'이며 그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함께 해야 같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며 그는 자신이 할아버지 곁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유를 설명한다.
실제로 엠의 외할머니는 가족들이 모이는 일요일만 되면 예쁜 옷을 차려입고 집 앞 벤치에 나가 집으로 향하는 골목 어귀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찾아올지도 모를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찾아올'도 아닌 '찾아올지도 모를'. 무이의 말을 들은 엠은 그 길로 짐을 싸서 할머니 집으로 들어간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애초에 할머니를 돌보는 일보다 재산을 물려받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엠은 그동안 자신이 몰랐던 할머니의 모습을 하나둘 발견하게 된다. 관음보살을 모시느라 소고기를 일절 드시지 않는 할머니. 얼마를 기다리든 꼭 같은 집에서만 생선튀김을 사드시는 할머니. 그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04.
가족의 소중함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둔 가족 드라마이기에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는 평이하고 전형적인 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세대가 서로 옥신각신하며 한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사랑과 진심을 느끼며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꼭 같은 형태는 아니더라도 변용되어 종종 활용된 바 있다. 그런데도 유사 소재로 반복되는 까닭은 누군가를 잃는 상황에 대해 모두가 공유하고 있을 어떤 감각과 여러 번 건드려져도 익숙해지거나 바래지지 않는 순간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다만 작품마다 어떤 형태로 그 감정을 조금 더 깊이 건드리는가 하는 차이점이 생길 수 있는데, 이 영화는 중심 관계인 엠과 할머니가 아닌 다른 상황을 통해 볼륨을 키워내는 모습이다.
엠의 엄마인 딸과 할머니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그중 하나다. 주식으로 큰돈을 벌어 부유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가족만 챙기려는 오빠 끼앙과 도박으로 큰 빚을 질 때마다 엄마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고 훔쳐 달아나는 남동생 소이 사이에 낀 둘째 딸. 할머니는 그 딸이 자신의 삶을 닮지 않기를 누구보다 바라지만, 마음을 쓰는 방식도 삶의 형태도 자신을 닮아가는 것 같아 미안하고 죄스럽다. 암에 걸리고 난 뒤에도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자식이 딸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 삶을 돌보지 않으면서까지 자신을 돌보려는 게 안타깝다. 물론 딸은 그런 엄마가 서운하다.
두 사람 사이의 서사는 남아가 선호되는 문화 속에서 대물림 되는 듯한 여성의 삶이 그려진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의 중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가 사후의 유산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남성인 장남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배경과 맞물리며 '누가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중요한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닿을 수 있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애초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 가지지 못 해왔던 것이 유산임을 생각하면, 할머니 곁에서 돌봄을 자처하며 함께 생활한 엠이라고 해서 반드시 유산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님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영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수백만 달러를 버는 법> 스틸컷Netflix
05.
"근데 왜 내가 1순위가 아니야? 내 자리는 어디야?"
할머니가 친오빠를 찾아가 100만 바트를 부탁하는 신도 다른 지점을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오빠에게만 집을 물려줬던 부모님과 그 집을 팔아 큰돈을 챙긴 오빠. 매일 새벽 일어나 죽을 팔아야 했지만 단 한 푼도 요구한 적 없었고, 심지어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도 돌본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오빠는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며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다. 그렇게 돈이 필요하면 자식들에게 가서 요구하라며 매몰차게 굴기까지. 이제 성도 다른 사이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도 내뱉는다.
여기다.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장남이, 아들이 우선이던 문화. 결혼을 하고 나면 남편의 성을 따라야 했기에 여성은 언제나 출가한 사람으로 여겨지던 시대. 하지만 자식으로서의 의무는 주어진 이상으로 해내야 했던 때. 그런 시대의 피해자와도 같은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문화와 시대에 물들어 가해자의 모습을 하게 된다. 영화의 중후반부에서야 드러나기 시작하는 할머니가 지난 시간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직전까지의 장면을 옮겨오는 것이다. 자신에게 더 애정을 쏟고 함께 있어 주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아들이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려고 했던 순간.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높은 순위에 아들을 떠올리고, 두게 되는 마음이다.
그런 모든 서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거나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각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들의 감정을 투영해 내는 점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수백만 달러를 버는 법>의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따뜻한 정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할머니가 주택 권리증을 손자 엠이 아닌 막내 아들 소이에게 주지만, 실망은 할지언정 누구도 비난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06.
"근데 내가 근사한 개인 묘에 묻히면 너희가 찾아오고 싶어질지도 모르잖아."
영화의 시작부터 한이 맺힌 것처럼 이야기해 왔던 할머니의 소원, 비싼 개인 묘에 묻히고 싶다던 말은 자신의 속내를 조금씩 내색하기 시작하는 후반부의 할머니로부터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청명절과 같은 정해진 날에도 제사를 지내러 오지 않고 얼굴을 비추지 않는 가족들이 조금이나마 더 근사한 개인 묘에라도 묻히면 조금 더 자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슬픈 기대다. 스쳐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은 장면이지만, 이것 하나만으로 홀로 남겨지게 되는 이들의 서글픈 마음이 오롯이 전달된다.
영원히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부족한 대로, 또 아쉬운 대로 자신에게 주어지지 못한 것들에 순응하며 삶을 마감하게 된다. 엠의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영화에서는 하나의 신이 더 준비되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제목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수백만 달러를 버는 법'이나 '할머니의 유산으로 수백만 달러를 버는 법'이 아니라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으로 완성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소중한 대상과 영원히 이별하기 전에 가질 수 있는 것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크고 귀할 테니까.
이제 엠에게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여러 모습이 남는다. 사소하지만 함께하지 않았다면 영영 가질 수 없었을 순간의 장면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더 이상 마주할 수 없을 이들에 대한 기억. 영화적으로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이 영화가 그런 마음을 따뜻하게도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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