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냥 멋있으니까. 세상을 통달한 듯 조언을 건네고 위로의 술 한 잔쯤 거리낌 없이 사주는 그런 사람이 어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어른의 정의가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으로 송두리째 바뀌었다.
"김장하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그것을 유일한 잣대로 저는 살아왔습니다."
최근 화제인 6년 전 청문회,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발언 영상이다. 이 영상으로 <어른 김장화>라는 다큐가 다시 화제가 됐다. 18일 퇴임하는 문형배 권한대행은 오랜 기간 판사 생활을 하면서 소박한 삶을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역시 수많은 '김장하 장학생'중 한 명이었다. 언젠가 그가 김정하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갔을 때 돌아온 한마디는 "이 사회에 갚아라" 였다.
<어른 김장하>는 평생 차 한 대 가진 적 없고 찍힌 사진마다 늘 끄트머리 자리에 섰던, 그러면서도 사회 약자에게 조용하지만 커다란 힘을 보탠 김장하 선생은 다큐 영화다. 그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 보호시설을 지원하고 '형평운동기념사업회'도 만들어 차별에 맞서기도 했다. 총 105분의 러닝타임은 김장하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다만 105분 만에 어른이 무엇인지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무주상보시'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
▲다큐 제목과 김장하 선생의 뒷모습이 담겨있다.
넷플릭스
김장하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60년간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했다. 19살에 개원했던 한약방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많은 이들의 건강과 가난을 책임진 그는 동네 주민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다큐 초반 김주완 기자가 동네 이웃과 나눈 짧은 대화가 인상 깊다.
"참 좋은 사람이구만" - 이웃
"왜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까?" - 김주완 기자
"남한테 늘 살게끔 해줘서" - 이웃
늘 삶의 원동력이 되어준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한약방에선 질 좋은 재료를 저렴한 값에 판매했지만 그 수입조차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무턱대고 찾아가 돈을 빌려도 생색 한 번 없이 현금을 내어주는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무주상보시' 그 자체였다.
"그냥 찾아봬서 등록금 얼마 나왔어요 하면 바로 현금을 세어주셨어요" - 충남대 의과대학 교수
'청렴결백의 힘'
▲김장하 선생 한약방 입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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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방 원장으로 수많은 학생의 앞길을 밝히고도 그는 100억 원을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했다. 8년간 이사장 자리를 지킨 후 그는 1991년 명신고를 국가에 헌납했다.
설립 당시 나이 40세. 젊은 나이에 이사장이 된 그는 굳건했다. 교사 채용 청탁이 많았음에도 권력, 돈, 명예 따위에 굽히지 않고 끝까지 채용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교육부에서 감사가 내려오기도 했다. 세무조사까지 당하며 온갖 수모를 겪었지만 그는 떳떳해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이 험한 세상 살면서 힘이 되었던 것은 비교적 깨끗하게 살아왔다는 것. 그게 큰 힘이 되었어요."
일각의 시선에서는 '그냥 돈이 많은 사람'으로 봤지만 오로지 학생들을 위해 노력했다. 명신고드학교의에서 일했던 교사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저는 사실 뜻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설립 전부터 학교가 본궤도에 오르면 국가에 헌납 하겠다고 말한 김장하 선생은 그 약속을 지켰다. 자신의 약국 건물을 제외하고 100억이 넘는 전 재산을 넘긴 것이다. 그것도 헌납 전에 모든 시설을 완비한 채로.
김장하 선생은 일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2019년, 공연을 위장해 그의 깜짝 생일파티가 열렸는데 짧은 소감에서도 그는 한결같았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해왔습니다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남은 세월은 정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존재 자체가 길라잡이'
▲남성당 한양박 폐업 모습폐업 소식을 듣고 찾아온 김장하 장학생들
넷플릭스
60년간 운영한 한약방 폐업을 앞두고 '김장하 장학생'이 어르신을 찾아갔다. 17살의 어린 학생이었던 그들은 서울대 자연과학대 교수, 사이타마대학 경제학부 교수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그 당시 34살이었던 김장하는 17살 어린 학생들에겐 한없이 큰 존재였다. 그럼에도 어떠한 조언 하나 건네지 않고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지원하며 묵묵히 그들의 삶을 지지했다.
꼭 좋은 방향을 제시하지 않아도, 삶의 지침을 알려주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배우게 되는 그런 사람이 김장하 선생이었다.
한편 한약방 폐업 소식에 명신고 7기 졸업생 김종명씨는 혹여나 어르신을 다신 보지 못할까봐 서울에서 한 걸음에 달려왔다.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지만 뜻밖의 위로가 된 김장하 선생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제가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 김종명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 김장하
악착같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최고의 위로가 아닐까? 빛나야 된다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평범함이 가장 큰 무기라는 용기를 줬다. 화면 너머까지 전해지는 영향력이 그는 얼마나 큰 존재였을지 가늠이 안 된다.
"돈이라는 게 똥하고 똑같아서 모아 놓으면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 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
다큐는 김장하 선생님의 명언으로 끝났다. 두세 번 곱씹으며 봤던 다큐는 처음이었다. 돌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영면할 때까지 나는 어른이 못 되겠구나 느꼈다.
내가 생각한 어른의 정의는 능력에 기인했다.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보이는 지위, 술 한 잔쯤 가볍게 사줄 수 있는 재력. 그러나 송두리째 바뀐 나의 정의는 '닮고 싶지만 닮을 수 없는 존재' 그게 어른인 것 같다. 평생을 닮기 위해 애쓰겠다는 다짐 하에 메모장을 켜 한 문장을 남겼다.
'어른이 되고 싶거든 김장하처럼'
▲김장하 선생이 제작진에게 인사를 하고있다.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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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배 키운 어른 '김장하' 만나고 이런 메모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