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메이드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이 3년 만에 시즌 2로 돌아왔다. '일할 때의 나와 평상시의 내가 다른 인격으로 분리된다'라는 간단하고도 혁신적인 소재를 위시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본작은 어떻게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연의 마법을 확장할 수 있었을까.
그 원인은 한층 더 풍부해진 여성 캐릭터의 등장에 있다. <세브란스: 단절>의 세 여성 캐릭터를 통해 이 '워라벨 드라마'가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 스틸컷
애플tv+
계급에 무관하게 속박되는 여성
가장 먼저 살펴볼 캐릭터는 바로 '헬리(브릿 로워 분)'다. <세브란스: 단절>에는 자신의 인격을 회사 안에서 일하는 '이니'와 회사 밖에서 살아가는 '아우티'로 분리한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헬리 역시 그중 하나다. 서로의 삶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이니와 아우티의 특성상, 헬리는 그동안 자신이 평범하지만 돈이 궁했던 직장인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시즌1의 마무리에서 드러난 바에 의하면, 헬리의 아우티는 바로 인격 단절 시술을 내세우는 회사 '루먼'의 후계자인 '헬레나 이건' 이었다.
시즌 2에서 드러나는 헬리/헬레나의 여정은 '자율성의 회복'으로 요약할 수 있다. 헬리는 오로지 회사 안에서 착취되도록 태어난 이니들의 삶의 실태를 고발하고자 하며, 자신의 '원래 인격'인 헬레나를 증오한다. 한편 거대 기업의 후계자인 헬레나는 자신이 더 이상 '단절'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밝혔으면서도 아버지의 강압에 이기지 못한다. 그와 더불어, 나중에는 '헬리가 있어야 팀의 능률이 오른다'라는 기업의 핑계 아래 강제적으로 단절되기까지 한다.
같은 몸에 사는 두 명의 여성은 주체성을 되찾는 과정에서 서로를 질투한다. 헬리는 기업 후계자로서 누릴 걸 다 누리고 사는 헬레나의 위치를 애증하고, 헬레나는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고 마음껏 저항할 수 있는 헬리의 삶을 시기한다. 작중에서는 이 갈등이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분리된 인격' 간의 싸움으로 드러나지만, 이것이 서로 다른 계급적 위치에 있는 여성이 내몰리는 상황에 대한 은유임은 확실해 보인다. 작중 대기업 '루먼'에 치환되는 위치에 있는 가부장제는 여성이 서로를 적대시하도록 종용하며 그사이에 자신의 이득을 챙긴다. <세브란스: 단절>은 헬리/헬레나를 통해 이 씁쓸한 광경을 처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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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업적을 도둑맞는 여성
한편, 시즌1의 악역으로 등장했던 '코벨(패트리시아 아퀘트 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코벨은 직전 시즌에서 가차 없는 명령과 폭력적인 통제를 이어가는 등, 거악 그 자체인 회사와 동일시되었다. 하지만 시즌2의 코벨은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후, 자신이 그동안 이용당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회사는 코벨의 애사심을 핑계 삼아 그가 디자인한 기술을 전부 무단 독점하고 있던 것이다. 누가 발명했던 것인지 모호하게 처리되었던 '단절' 기술 자체도 코벨이 발명했다는 힌트가 작중 곳곳에서 등장한다.
이러한 새 이야기를 통해, 코벨이 시즌1에서 보인 행보도 재맥락화된다. 단절 시술을 받은 이들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다름이 아닌 코벨 자신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기술을 발명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관리자의 역할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던 코벨은 시즌2에서 본격적으로 기업에 반발하기 시작하는데, 작중 회사의 창립자인 '키어'의 사진을 모아둔 재단을 분노한 코벨이 부수어 버리는 장면은 여러모로 몰몬교·사이언톨로지교 등 여성 착취를 이어갔던 종교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피해자의 분노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그의 저항은 윤리적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반발에서 시작된 만큼, 기업에 맞서는 다른 인물들과는 또 상이한 모습을 보여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매김한다.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 스틸컷애플tv+
끔찍한 미래를 암시하는 캐릭터도
<세브란스: 단절>의 시즌1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이 '단절' 기술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드러냈음에도 단절 기술이 현실에서 상용화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성을 의식하기라도 했는지, <세브란스: 단절>의 시즌2는 '단절' 기술이 그려낼 수 있는 끔찍한 미래를 암시하는 데 전보다도 더 힘을 쏟는다.
이러한 암시는 또다른 여성 캐릭터인 '젬마(디첸 라크맨 분)'를 통해 섬뜩하게 드러나는데, 시즌1에서 회사의 상담사였다는 것만 알려졌던 이 인물이 사실 남자 주인공 '마크'의 죽은 줄 알았던 아내임이 드러난다. 회사의 지하에 갇혀 단절 기술과 관련된 갖은 실험을 당하고 있던 것이다. 작중 젬마는 20개에 달하는 인격으로 분리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방에 따라 인격이 바뀌는 시스템 아래서 자신도 모르는 여러 삶을 이어간다. 한 방에서는 모르는 남성과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한편, 다른 방에서는 일부러 주어지는 신체적 고통만을 느끼기도 한다.
작중 젬마는 <세브란스: 단절>의 다른 여성 캐릭터에 비하면 비교적 '전통적인' 역할이다. 거대 악에 납치되어 주인공 일행이 가져올 구원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식상함을 가져오기보다는, 단절 기술이 지니는 무시무시함을 효과적으로 선보이는 기능을 수행한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몸의 자율성을 타자(기업)에게 넘겼을 때, 그 타자가 자신이 약속한 일(기업 업무)만 시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젬마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시청자가 단절 기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말의 희망마저 포기하게 만든다.
이처럼, <세브란스: 단절>의 시즌2는 전보다 한결 풍부해진 여성 캐릭터의 열연을 통해 기존의 주제를 보강하고 극적인 재미까지 끌어낸다.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헬레나'의 삶을 사는 대신 '헬리'의 삶을 살기로 택하고 기업 건물에 남는 것을 택한 헬리의 이야기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가망이 없어 보이면서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코벨의 저항은 회사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끝내 탈출에 성공한 젬마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본작은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끝맺으면서도 이러한 의문을 남기며, 제작이 확정된 시즌3에 대한 기대감을 고취시킨다. 기발한 SF적 상상력을 여성 캐릭터들의 열연으로 극대화하는 드라마를 감상하고 싶다면, 애플tv+를 통해 <세브란스: 단절>의 시즌2를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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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 신봉자.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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