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버세이션>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이와 같은 영화적 형식은 이후 이어지는 15개 신 전부에서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필재(곽민규 분)와 대명(곽진무 분), 승진(박종환 분)이 등장하는 남자들의 대화 장면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각 신의 특성에 맞게 영화는 자신의 규칙을 훨씬 더 엄격하게 지켜가는 것만 같다. 은영과 명숙이 대화를 나누는 카페 신에서는 카메라 좌측에 불안정하게 걸려있는 다른 테이블 손님의 존재와 목소리를 조금도 지울 생각이 없다. 승진과 필재가 유모차를 밀며 공원을 걷는 신에서도 두 사람은 마치 그래서는 안되는 것처럼 고정된 카메라의 패닝(Panning, 카메라가 고정된 상태에서 수평 방향으로 이동하며 촬영하는 것) 영역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 동선이 우거진 수풀로 인해 두 사람의 모습을 삼키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이 바라보는 대화는 단순한 Dialogue(책이나 영화 속에서 주고받는 대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간과 상황, 배경 모두를 포함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전체를 포함하는 조금 더 포괄적인 함의를 갖는다. 이 글의 처음에서 영화 속 인물 사이의 대화가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등의 여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고 말했던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어떤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대상이 아닌,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를 대화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설정 아래에서는 물리적 한계와 시점의 거리로 인해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있을 뿐, 관객 또한 대화 속에 포함되는 하나의 플레이어처럼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04.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서 신과 신 사이의 연결성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일단 시간적인 순서조차 정확하게 명시되지 않는 모습이다. 몇몇 근거를 바탕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공간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물이 머물게 되는 공간 역시 대화를 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요소일 뿐, 신 사이에서 서로 어떤 의미를 주고받을 수 있거나 공간의 이동성으로 인해 발생되는 목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첫 번째 신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은영이 세 번째 신에서 택시를 탄 상태로 내일 파리로 떠나는 존재가 됐다가, 다시 다섯 번째 신에서 친구들과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플롯을 어떻게 의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나마 서로 완전히 다른 곳에 놓여 있을 것만 같던 여성과 남성 그룹을 동시간대에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승진과 은영을 이름 모를 카페에서 처음 마주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각각의 그룹이 존재하던 시간선의 선후 관계나 신 사이의 거리는 이번에도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이후 몇 개의 신을 함께 지나는 동안 극 중 유일하게 남녀 사이의 서사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대화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일에 김덕중 감독이 정확히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는 지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여러 신을 통해 그동안 펼쳐왔던 다양한 대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수를 꺼내고자 했던 것처럼도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단순한 '느낌'만은 분명 아니다.
▲영화 <컨버세이션>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각각의 신이 서로 맞물리며 나아가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움직임은 이 작품 속에도 존재한다. 여성 집단의 대화, 남성 집단의 대화, 남녀의 대화, 그리고 개인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형태,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신의 모습이 달라지는 과정이다.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대화는 후반부로 향할수록 조금 더 개인적인 것으로, 수용되지 않는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가는 듯 보인다. 그리고 필재를 만나고 돌아가는 승진이 기차 안에서 그에게 편지를 쓰는 신에서는 그 대화라는 것이 누군가와 주고받는 형태가 아닌, 독백이자 방백으로까지 모습이 바뀌게 된다.
그런 형태의 변화에 따라 대화의 성격도 함께 달라진다. (여기에서의 대화는 미시적인 의미의 대화가 될 수 있겠다.) 영화의 두 번째 신에서 아파트 복도 계단으로 나온 다혜는 명숙에게 이런 자리에 나와서 제대로 말도 다 하지 못한다며 자책 아닌 자책을 한다. 첫 번째 신에서 세 명이 모두 함께 있을 때 별로 불편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상대가 잘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필재와 승진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승진이 처음 보는 필재의 이름을 비웃으며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모습을 취하지만 필재는 사회적 관계를 고려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대화를 이어간다. 하지만 후반부로 향할수록 인물들의 말은 조금씩 더 직접적이고 감정적이 된다.
06.
"추하고 안 예쁘고 이상해도 괜찮다고. 그거 감수하고 만나는 거 아냐. 진짜 웃긴 건 뭔지 알아? 아무리 포장하고 감추려고 해도 다 들킨다는 거."
등산을 간 승진과 은영이 서로 말다툼을 하는 영화의 마지막 두 개의 신에 그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굳이 이해할 수도 없는 추하고 이상한 서로의 속내를 다 알아서 뭐 하냐는 승진의 핀잔에 대한 은영의 대답이다. 나는 이 영화가 대화의 다양한 형태와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라는 것 자체의 의미를 우리가 내뱉는 말에만 국한하지 않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성과 말이 발화하는 장소, 이를 침범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하는 모든 물리적 상황조차 포함하고자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대화라는 것이 문장과 말에만 의미가 놓인다면, 굳이 여기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로 소리를 입 밖으로 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14개의 신을 지나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던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승진의 끊이지 않는 장난에 화가 난 은영이 나서는 걸음을 뒤따르면서다. 어쩌면 그 움직임이 감정의 종류를 떠나 가장 순수하고 단일한 대화로 여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은영의 말대로, 포장하고 감추려고 하지 않았던, 그를 통해 상대의 대화마저 진실한 표현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속내다.
영화가 끝나고 이렇게까지 극 중 인물의 관계가, 심지어 두 남녀의 미래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지 않은 작품이 또 있었을까. 머릿속에 맴도는 건 오로지 하나. 대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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