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리도 없이> 스틸컷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소리도 없이>는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계란을 파는 태인과 창복의 특별할 것 없는 하루 일상으로 시작된다. 들을 수는 있으나 말을 못 하는 태인과 아버지뻘 되는 창복은 그날의 계란 장사를 마치고 그림 같은 시골 풍경을 달려 어느 폐가에 도착한다. 그리고 함께 경쾌한 음악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다. 일바지를 입고 비닐 캡을 머리에 쓰고 고무장갑을 끼는 일련의 동작들은 물 밖에서 하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혹은 한 편의 짧은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뭔가 즐겁고 유쾌한 일이 시작되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라도 하는 듯, 카메라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부드럽게 이동하면서 '지금 여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혹은 인물들 바로 뒤에 있다가 천천히 빠져나오거나 혹은 멀리서 지켜보다가 서서히 다가가는 등 펼쳐지는 살벌한 장면과는 대비되는 우아하고 세련된 카메라의 움직임이 벌써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결'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직전의 프레임에서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또는 인과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장면 혹은 장치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면서 확장되는 프레임. 쌓아지고 모아지는 '지금 여기'의 정보들이 마침내 하나의 설정을 완성한다.
어쩌면 앞으로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을 판단할 때도 부디 지금 카메라가 하듯 유연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다각적·다차원적·입체적으로 봐달라는 신호가 아닐까? 그러고보니 영화가 자주 쓰고 있는 딥포커스도 이 영화의 인물들과 상황을 좀더 깊이 있게 들여다봐 달라는 감독으로부터의 메시지 같다. 이분법적 혹은 피상적, 흑백 논리적 사고는 내려놓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타고 다니는 트럭은, 사통팔달 시골 동네 사거리를 쉼없이 이쪽저쪽으로 시종일관 횡단하고 종단한다.
카메라가 보여준 태인과 창복이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는 일은 놀랍게도 '큰' 범죄다. 조폭들이 살인을 저지를 준비를 해주고 살인을 저지른 이후, 그 뒤처리를 해주는 일이다. 방금 시장에서 계란을 팔다 온, 지금 문 열고 나가 시장에 가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그런 친근한 이미지의 두 사람이 이제 막 하려고 준비를 끝낸 일은, 고문하고 구타하고 살인에 쓸 칼을 비롯한 도구들을 깨끗이 정렬하는 일이다. 피바다 살인 현장을 청소하고 죽은 시체를 비닐에 돌돌 말아 산속에 가서 묻어주는 일이다. 인물들의 이미지와 인물들이 하는 일 사이의 엄청난 격차가 주는 충격으로 머리가 띵할 정도이다.
이런 일을 보통의 '직업'처럼 아무 의심 없이, 아무 회의 없이 밥 먹고 이 딱듯이 그렇게 일상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들 악인들을 '연민'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제껏 하층민이나 서민,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가 주요 인물이 되는 영화에서는 그 인물들과 공감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영국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에서도,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좀도둑 가족>에서도, 그리고 한국 김태균 감독의 <암수 살인>에서도 나는 영화 속 인물들에 공감했고 영화 속 주인공들과 마음에서는 백 번이고 천번이고 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리도 없이>는 중반을 넘어서도 영화 속 주요 인물들에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무엇'이 악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악인지 의미를 규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다음엔 영화 <소리도 없이>의 주요 캐릭터들이 '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일일 것이다. 철학자 야스퍼스에 따르면, 첫째가 '무관심으로 인한 죄'라고 한다. '내가 알고자 했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고자 하지 않은 죄'를 말하는 것이다.
태인과 창복은 조폭들이 저지르고 있는 살인에 대해서 알고자 하지 않는다. 심지어 살인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 바로 옆에서 태연하게 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 어쩌면 감독은 태인과 창복의 살인에 대한 그 '무감함'을 강조하고 대비시키기 위해 극히 일상적 음식인 '라면'을 선택해 장면안에 의도적으로 배치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충격적인 장면이다. 홀로코스트를 고발한 프리모 레비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이 인간인가'할 정도에 육박하는.
이 와중에 창복은 조폭 두목의 차 안에 들어가 꽁초를 훔쳐 피우는 태인에게 '일상적' 잔소리까지 내뱉는다. "남의 것을 탐하면 불구덩이에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냐." 이 둘의 무지와 무감, 무판단과 무사유가 더더욱 이 둘을 악마스럽고 위험한 인물로 보이게 만든다.
"평범한 악의 존재는 인간 본성에 내재된 원초적 악을 구성하는 요소도 아니며 인류의 징벌도 아니다. 오히려 제도화되고 비인격화되고 일상적인 인간의 악행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어쩌면 전체주의의 결정적 특징뿐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주의 사회의 결정적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혹은 실재적인 아이히만일지도 모른다." - 홍경자 논문 <죽음을 부르는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19쪽
'소리도 없이' 어느새 '아이히만'이 되어버린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을 영화 <소리도 없이>에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토종 백숙집 사장 부부도, 소망유치원의 원장과 직원도, 그리고 토종 계란을 팔고 있는 태인과 창복, 그리고 아직 11살밖에 되지 않은 초희한테까지 소리도 없이 아이히만의 마수가 뻗친 건 아닐까. 불안하고 무섭고 두렵다. 이 '포스트휴먼'시대가 가지고 올 우리의 미래가.
"우리 다 죄인이지"
돈 받고 시체 치우는 일을 하면서도 기독교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외는 창복이 죽어가는 조폭 실장에게 유괴한 아이의 인수인계 방안을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죽은 실장의 몸이 '프레임'을 만들어 주고, 그 프레임 안을 창복과 태인이 채우고 있다. 방금 죽은 조폭의 빰을 때리며 이전에 그로부터 받았던 위협과 수모를 앙갚음하는 태인. 이어지는 장면에서 태인은 아무렇지 않게 죽은 이의 피묻은 양복을 벗겨내서 가져간다. 태인과 창복 그리고 조폭 실장이 뭉쳐진 한 덩어리처럼 보여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우리 다 죄인이지"를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렇게 벗겨간 조폭의 슈트를 태인은 딱 두 번 입는다. 첫 번째는 조폭들에게 유괴당한 초희를 구하러 갈 때다. 원래 이 양복이 태인의 눈에 들어왔던 장면을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하다. 태인은 조폭의 살인 준비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그의 옷을 옷걸이에 걸려다 자신의 눈에 들어온 조폭의 외모가 멋지게 보여, 머리에 쓴 촌스런 비닐 캡을 벗어 던지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에 그 슈트를 대어봤던 것이다.
그런데 초희를 '판매'하라고 갖다주고 와서는, 안 된 마음에 다시 초희를 되찾으러 가는, 거의 생애 처음으로 '선한' 의지를 발휘하려는 순간에, 벽에 걸린 조폭의 슈트를 챙겨 입고 가는 것이다. 그것도 곧 다른 애들과 함께 봉고차에 실려 초희가 팔려가 버릴지도 모르는 그 급박한 시간에 말이다. 왜일까?
그렇게 되찾아 온 초희를 이제는 온전히 집으로 돌려보내 줄 생각을 하는 태인. 집을 나설 때 다시 이 슈트를 입는다. 슈트 안에 피 묻은 흰 티셔츠를 그대로 입은 채. 태인은 공책에 적힌 초희의 학교를 찾아가 초희를 인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초희는 그 뜻을 모르고 다른 선택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의 엔딩은 태인이 왠지 지난 '악'과 결별하고 '성찰'하는 성인으로 성장하거나 갱생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둔 터널 끝 약간의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마침내 태인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공감과 연민'이 생기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유'가 일어난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악인이 됐을까? 이 사람을 악인으로 만든 악은 어떤 모습일까? 혹은 무엇일까? 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함부로 타자화하고, 위험한 혹은 악한 존재로 낙인찍는 것은 악 그 자체만큼이나 위험하지 않을까? 끝내 아무런 애정도 생기지 않았던 창복은 태인과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혹시 태인에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원자화된 개인에서 타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공적 인간으로의 갱생'이 일어난 건 아닐까? 약자의 악에 대한 연민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