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돌라> 스틸
㈜태양미디어그룹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유럽과 서아시아의 경계, 카프카스 산맥 언저리에 자리한 나라 조지아의 고즈넉한 산골 마을은 가파른 협곡과 계곡 사이에 있다. 마을 사람들을 바깥세상과 연결하는 통로는 낡은 곤돌라 2대다. 서로 교차하며 지나는 곤돌라를 통해 주민들은 생업은 물론, 등하교, 경조사를 모두 치러야 한다. 곤돌라 승무원은 그런 마을 주민들과 매일 마주하며 소식을 듣고 전하는 존재다.
젊은 여성 '이바'는 고향 마을로 돌아와 곤돌라 승무원으로 취직한다. 그에게 업무를 알려주는 '사수' 겸 동료는 '니노'다. 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공중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가 된다. 권태로움 자체라 할 반복되는 곤돌라 승무원 업무이지만, 둘의 일상은 결코 지루하거나 늘어질 틈이 없다. 괴팍하거나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도 하지만, 순박하고 선량한 시골 주민들의 다양한 일상이 곤돌라를 통해 연결되고, 이바와 니노는 둘만이 공유하는 시간을 통해 조금씩 그들의 근무에 생기를 더한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으로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운행 중 찰나에 마주치는 공중에서의 몇 초를 어떻게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할지 궁리하고, 30분 간격으로 곤돌라 정거장에 비치한 체스판에 한 수를 둬가며 점점 서로에 관한 관심과 애착은 깊어만 간다. 둘만이 공유하는 관계의 심화는 물론, 어느새 매일 똑같은 것처럼 보였던 곤돌라 운행은 작은 축제의 순간으로 변해간다.
'조지아'라는 나라를 아시나요?
아마 조지아란 국명보다는 미국을 구성하는 한 주의 이름이 대다수 한국인 관객에겐 더 익숙할 것이다. 2008년 이전에는 국내에 소개될 때에도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남한 면적의 2/3 정도에 인구는 부산과 도긴개긴인 변방의 소국이기에 그렇다. 과거 소련을 구성하던 15개 연방공화국 중 하나였던 이 나라는 과거엔 '그루지아'로 불렸다. 국명 표기가 변한 건 근래 우크라이나가 그렇게 했듯, 동구권 국가란 낙인을 떼고 서구화를 지향하는 결단 때문이다. 친서방 행보를 막고자 한 러시아의 충돌로 벌어진 남오세티야 전쟁 전후로 조지아란 국호로 자신들을 표기해 주기를 세계에 요청한 결과다(하지만 이후 정권 교체로 친 러시아 경향이 심화 일로했다).
세계지도를 펴고 조지아를 찾으면 일단 이 나라를 어느 대륙으로 분류해야 할지 망설여지게 마련이다. 유럽과 아시아 경계에 걸쳐 있어서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카프카스 산맥 골짜기에 자리한 소국이 과연 유럽의 동쪽 끝인지 아시아의 서쪽 끝인지 참 애매하다. 그나마 오래된 정교회 전통 등을 통해 유럽의 변경 취급을 받지만, 아직 유럽연합 가입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조지아는 서구 사회에선 낯선 땅, 이국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뭔가 1세계와는 다른 동양적인 분위기, 하지만 온전하게 3세계라고 치부하기엔 종교나 문화면에서 친숙한 지점이 적지 않다. 21세기 초반 비극적 전쟁으로 세계에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소련 시절부터 유명한 휴양지이자 관광지로 각광 받던 동네라 국내에서도 소수 여행자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기도 하다.
<곤돌라>는 그런 조지아의 목가적 매력을 전면에 내세운 작업이다. 독일 감독 바이트 헬머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작업 다수를 유라시아 경계지역을 배경으로 선보여 왔다. 감독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2008년 <압수르디스탄>부터 여러 편의 영화를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스탄 등을 배경으로 선보여 왔다.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감독의 작업은 상상력을 가미한 일종의 '우화'이자, 서양이 잃어버린 소박한 미덕을 일깨우는 '고귀한 야만' 정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색채를 띤다. 그래서 진지한 작가주의, 3세계의 진지한 현실을 고찰하는 경향과는 뚜렷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관광객'의 시야에 그치는 얕음과도 거리가 멀다. 속세에 닳고 닳은 서구 사회가 놓치고 있는 인정과 여유를 표현해 치유와 성찰을 (적정선에서) 제공하는 '우화'적 성격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런 감독의 방향에 조지아는 안성맞춤 무대가 되어준다.
곤돌라로만 외부 세계와 소통이 가능하다시피 한 계곡 마을은 드문드문 흩어진 자급자족 농가들이 쭉 이어진다. 그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을 삶의 터전을 두 주인공이 운행하는 곤돌라는 널찍이 조망하며 승무원의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 카프카스 '자연인'들의 풍경을 선사한다.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하고, 밧줄로 묶은 사적 배송을 승무원은 몰래 눈감아준다. 때로는 농부들의 과수원을 지날 때 뜰채로 과일을 서리하기도 한다. 곤돌라 요금을 낼 잔돈이 없으면 팔고 남은 달걀을 대신 건네도 마지못해 받아주곤 한다.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이미 잊힌 정서가 영화 내내 펼쳐진다.
마술적 사실주의로 극대화한 잃어버린 낙원의 풍경
▲<곤돌라>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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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라>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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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을 사람들은 1세계 부유한 나라의 시선으로 놓고 보면 가난하고 낙후된 삶을 살아간다. 동전 몇 푼에 불과한 곤돌라 요금도 어떻게든 안 내려 버티고, 기어코 승무원이 요금을 징수하면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주인공들의 거처도 우리가 누리는 풍요한 물질문명과 가전제품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초라함 자체다. 낡은 티가 물씬 풍기는 곤돌라가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1919m 구간을 삐걱 소리를 내며 힘겹게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의심 가득한 이들은 저러다 분명히 안전사고 나고 만다며 노파심 가득해질 법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지아의 빈곤함을 굳이 전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덜컥 타인을 의심부터 하고, 규정에 얽매여 꼼짝할 수 없는 관료제 아래에선 불가능한 일들을 (적당히 초현실적으로) 표현해 우리가 놓친 상상력을 일깨우는 데 초점을 잡았다. 그런 확고한 주제의식 아래 화면에 펼쳐지는 판타지에 가까운 장면들은 감독의 목표와 찰떡궁합으로 어우러진다.
이바는 동료 니노에게 친근함을 느낀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은 셈이다. 하지만 직장 상사의 추근거림에 지치고 고립된 시골살이에 마음 붙일 곳 없던 니노는 너른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에 한창이다. 두 사람이 운행하는 곤돌라가 칠석날 빼면 항상 엇갈려야 하는 견우와 직녀처럼 찰나로만 스치듯 두 사람이 원래 계획한 미래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가까워지기 시작하던 둘의 첫 고비는 바로 그런 차이를 확인하는 순간 발생한다.
곤돌라는 이바와 니노의 교감이 벌어지는 '오작교'이지만, 무한히 반복될 것만 같은 일상의 무대이기도 하다. (과거 시내버스 요금통을 연상케 하는) 요금함을 매일 근무 후 수거하며 자기 마음대로 그중 일부를 급여로 던져주는 상사의 횡포와 추파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자본주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풍경이다. 목가적인 시골 마을에 스며든 관료주의와 기업 논리의 미니어처 재연 격이다. 뜬금포로 곤돌라에 태워달라고 호소하지만, 상사에게 늘 무례한 대접을 받는 휠체어 노인의 존재도 풍자의 형태로 곤돌라의 존재 의의와 경영 노리 사이에서 질문을 던진다.
그런 질곡을 두 주인공은 서로에 관한 호감과 더불어 일종의 '반란'으로 전복해 나간다. 거창하게 풀이하자면, '생산수단'을 '노동자'가 전유하려는 도전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뜬금없다면 화면에서 직접 확인하시라. 배를 잡고 웃으며 통쾌함에 졸도할 시간이 도래한다.
무성영화와 여성서사, 아름다운 풍경과 합류하다
그저 '오리엔탈리즘'의 변형으로 <곤돌라>를 단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심각한 시사적 함의를 굳이 전제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가 갖는 미덕은 결코 가볍게 볼 차원이 아니다. 우리가 과거엔 이란 영화, 근래엔 소수의 주목을 받는 부탄 영화 등에서 받는 감화와 비슷한 어떤 감성이 본 작품 전체에 듬뿍 농축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조지아 산간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그에 동화된 주민들의 정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점점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곤돌라가 오가는 광경을 원거리에서 풍경 사진처럼 담아낸 장면들은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있는 그대로의 매력을 선사한다. 주인공을 포함한 주민들이 손수 D.I.Y로 생필품을 수급하는 장면마다 운치가 넘친다. 장작을 패고 목재를 톱으로 썰고 과일을 수확하고 벌통을 관리하는 일상, 정성을 들여 갓 딴 과일을 손으로 짜 생과일주스를 만들고 호감 가는 이에게 점심 도시락을 몰래 만들어주는 매번 찰나가 눈에 감긴다,
이 모든 요소가 마치 무성영화의 부활처럼 구현되는 건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이다. 총천연색 조지아 풍광과 함께 그저 표정과 소리만으로 모든 이야기가 전개된다. 관객은 그저 영화 속 사람들의 눈빛과 상황만으로 모든 걸 추론하며 따라가야만 한다. 대체 언제 대사가 나올까 초조하게 기다려봐야 소용이 없다. 성질 급한 누군가는 안절부절 당황스러울 테다.
그래서 '폰딧불이' 노릇을 할 틈이 없다. 한 번 놓치면 곤돌라에서 추락하듯 낙오될 게 뻔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영화적 시도 덕분에 반가운 체험 기회가 얻어걸린 셈이다. 여기에 '사랑'의 힘이 변화를 추동한다는 믿음이 더해져 화룡점정을 이룬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제안은 동네 소년과 소녀의 만남과 또 다른 곤돌라의 존재로 정교하게 연결된다. 처음엔 무심코 스칠 순간이지만, 나중엔 어떤 의도인지 새삼 탄복하게 된다. 체스 장면 역시 뜬금없어 뵈지만 고도의 심리 묘사와 이어진다. 그냥 아기자기하게 보기 좋은 장치로 채워진 작업이라 여겨 가볍게 보면 뒤통수 잡고 후회할 법한 안배다.
유럽 영화에서 엿보이는 진보적 의제와 소박한 삶을 향한 예찬의 조합은 치유물 장르로만 그치지 않고, 일종의 문명 비판 작업을 수행해 왔다. 유럽 내에서 심화하는 국가 간 빈부격차와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우회해 언급하는 해당 부류의 작업은 국내 영화제에서도 어렵지 않게 꾸준히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근래 조지아 보수세력이 일삼는 LGBT 공격에 관한 유쾌한 경종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다분한 소품이다. 처음엔 낯설고 아름다운 풍광에 시선을 빼앗기고, 중반엔 마술적 사실주의의 쾌감에 빠지다 후반엔 무겁지 않게 구현한 대안적 미래에 설레고 말 테다.
▲<곤돌라> 포스터㈜태양미디어그룹
[작품정보]
곤돌라
Gondola
2023|조지아, 독일|드라마
2025.04.23. 개봉|82분|12세 관람가
감독 바이트 헬머
출연 니니 소셀리아, 마틸드 이르만, 주카 파푸아쥬빌리, 나이라 치치나제, 바차간 파포비안
수입 ㈜태양미디어그룹
배급 ㈜플레이그램
공동배급 ㈜태양미디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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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마을 잇는 낡은 곤돌라, 이 안에서 별일이 다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