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벡델테스트(The Bechdel Test)란 것이 있다. 문학과 영화, 만화 등 창작물의 성평등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구체적 방법은 작품이 크게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기준은 이렇다.

1. 이름을 가진 여성캐릭터가 둘 이상 등장하는가.
2. 여성캐릭터 간 대화가 이뤄지는가.
3. 남자와 관련 없는 주제로 대화가 이뤄지는가.

위 세 요건을 충족하는지를 따져 작품이 여성을 배제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단(혹은 그렇단) 사실을 확인하는 게 벡델테스트다. 단순히 요건의 충족여부를 넘어 항목별로 질과 양을 분석하면 작품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는지를 보다 상세히 알수 있다.

여성 차별 판독기, 장애 대입하면?

 <워킹 데드> 스틸컷
<워킹 데드> 스틸컷AMC

벡델테스트는 한국에서도 작품이 여럿 출간된 미국의 유명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창안한 것으로,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그 효과를 공인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올바름, 소위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가 작품을 해석하는 실제적 기준으로 적용되는 아카데미 시상식 등을 개최하는 할리우드에선 무척이나 익숙한 개념이다. 신작이 벡델테스트를 통과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사이트가 운용되고, 기자며 평론가들까지 수시로 벡델테스트 충족 여부를 거론한다.

결과는 어떠한가. 40여 년 전 벡델테스트가 처음 고안됐을 당시와는 비할 수 없는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다. 아카데미시상식에선 남성 주역은 없어도 여성 주역이 없는 영화는 흔치 않다. 2020년 개정된 규칙에 따라 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 후보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여성과 성소수자, 인종적 다양성에 대한 조건을 강제한 덕분이다. 지난 '씨네만세'에서 적었듯, 할리우드작품들은 소수자 중 특정 항목을 다른 항목에 비해 우선해 적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득을 보는 쪽과 해를 입는 쪽이 극명하게 나뉜다. 여성과 성소수자, 그리고 흑인은 득을 보는 쪽, 장애와 아시안은 그렇지 못한 쪽일 가능성이 높다.

벡델테스트 이야기를 하는 건 그 현실을 손쉽게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소수자, 특히 여성서사며 성소수자의 존재를 강조하는 작품과 대면해 내 기준에서의 벡델테스트를 해보길 즐긴다. 이를테면 위 요건의 '여성' 대신 '장애', 또 '아시안'을 대입한 뒤 적용해 보는 것이다. 소수자성을 한껏 강조한 그와 같은 작품이 이러한 테스트를 얼마나 통과할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편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미국 인구조사국(United States Census Bureau)에 따르면 미국에서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은 5000만 명을 넘어선다. 인구의 20%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 한국 전체 인구보다 많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장애인 인구수는 15% 내외라고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열 명에 한둘 정도는 장애인이 있다는 뜻이다. 지체장애부터 청각장애, 시각장애, 뇌병변장애, 지적장애, 신체절단, 신체불구 장애 등 다양한 형태의 장애로 일상을 어려워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살아간다.

다양성 존중하는 콘텐츠, 장애는 어떻게 다룰까?

 <워킹 데드> 스틸컷
<워킹 데드> 스틸컷AMC

그렇다면 대중매체 속 장애는 어떤 모습일까. 영화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장애를 작품 가운데 마주한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다 장애를 극복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수의 작품을 제외한다면, 장애인이 장애와 관련 없는 소재로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작품은 거의 떠올리기 어렵다. 벡델테스트를 약간 변주해 적용해 보자면, 1. 이름을 가진 둘 이상(혹은 단 한 명이라도)의 장애인이 등장하고 1. 그들에게 대사가 있으며 1. 장애가 소재로 활용되지 않는지를 따져볼 수 있겠다. 나는 이따금 영화를 볼 때 이러한 기준을 적용한다.

21세기 할리우드 콘텐츠 산업 가운데 손꼽을 만한 성공작이 <워킹 데드>다. 역대 가장 성공한 미드를 꼽을 때 빠지는 법이 없고, 미국 베이직 케이블채널 드라마 가운데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이니 당연한 평가다. <브레이킹 배드>와 함께 AMC를 미국 드라마 명가로 밀어올린 이 작품은 무려 11개의 시리즈가 12년 동안 이어졌다.

<워킹 데드>의 성공엔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겠다. 문명이 무너지고 좀비가 세상을 휩쓴 무질서, 즉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이 그 하나일 테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작품이 전 미국을 휩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좀비물은 어디까지나 장르, 그중에서도 공포와 액션, 고어를 즐기는 소수 마니아층에게 호소하는 장르였던 탓이다. <워킹 데드> 제작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심했고, 그 결과로써 좀비물의 공식이라 해도 좋았던 마초이즘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선택한다.

장애인이 이름을 얻기까지 10년

 <워킹 데드> 스틸컷
<워킹 데드> 스틸컷AMC

수많은 여성캐릭터를 지도력과 결단력은 물론, 전투력 등에서까지 남성보다 우월하게 등장시키는 건 기본이다. 백인뿐 아니라 흑인과 라틴계, 아시안 등 비교적 다양한 인종을 배치했고, 그들 간의 교류 또한 적극적으로 그렸다. 시리즈 전체를 아울러 같은 인종보다는 인종을 건너 이뤄지는 연애와 결혼이 많다는 점을 그저 우연으로만 볼 수는 없다. 게이와 레즈비언 등 성소수자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할리우드 전체에서, 특히 투자와 제작, 비평 등에 있어서 소수자를 존중하는 작품을 우대하는 흐름을 이 작품도 제대로 탄 것이다. 하물며 마초적 남성을 벗어나 그 밖의 시청자에게 호소하려는 요구까지 있었으니, <워킹 데드>의 결단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마니아층을 넘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널리 사랑받았다. 전국적 인기, AMC는 물론 베이직 케이블 채널 드라마 역사를 시리즈는 완전히 새로 써냈다.

그러나 그대로 좋을까. 나는 이 드라마를 두고 장애와 아시안의 관점에서 백델테스트를 돌려본다. 여성과 성소수자, 흑인에 있어선 압도적으로 조건을 충족하는 이 드라마가 장애와 아시안에 대해선 전혀 그렇지 않단 걸 확인한다. 이를테면 이렇다. <워킹 데드> 세계관 가운데서 좀비 탓이 아닌 장애인이 처음 제대로 등장하는 건 시즌9 에피소드 5에 이르러서다. 마그나, 유미코, 루크 등으로 이뤄진 다섯 명의 새로운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 청각장애인인 코니(로런 리들로프 분)인 것이다. 이 드라마가 무려 9년 만에 처음으로 장애인에게 이름을 준 역사적 순간이다.

그녀가 처음 등장한 에피소드 5만 보더라도 이름을 가진 인물만 수십, 조연까지 수백 명이 등장하지만 장애인은 오로지 그녀 1명뿐이다. 인구통계상 장애인 비중이 현대국가 중 가장 적은 한국 기준으로도 터무니없고, 미국에선 더욱 말이 안 되는 수치다. 장애가 험난한 세상 속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탓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고려는 되었어야 한다. <워킹 데드>의 안이함은 그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작품 가운데 수시로 언급되는 과거 회상, 잃은 이에 대한 언급에서까지 장애인 등은 철저히 배제돼 있는 것이다.

코니가 등장한 후에도 벡델테스트의 다른 기준은 얼마 성립되지 않는다. 장애인이 오로지 그녀뿐이며, 그녀의 행동 중 상당수는 장애와 관련된 것으로 그려지는 탓이다. 장애인을 장애를 넘어선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 삶을 그려내려는 노력을 이 드라마는 10번째 시즌에 이르러서야 약간이나마 시도하기 시작한다.

아시안 소외도 심각해... 비판하고 개선해야

 <워킹 데드> 포스터
<워킹 데드> 포스터AMC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미국 극동부에서 아시안이 결코 타 인종에 비해 적지 않다는 점은 이미 지난 씨네만세에서 짧게나마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한국계 글렌(스티븐 연 분)이 하차한 뒤로 이를 사실상 챙기지 않는다. 인도계로 보이는 시디끄(아비 내쉬 분)가 시즌8에서 등장하기까지 동아시아는커녕 범아시안조차도 전무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관련기사: '백설공주' 참담한 성적표, 이 통계를 보시라 https://omn.kr/2cscb )

<워킹 데드>가 끝까지 여성과 성소수자, 흑인에 대한 고려, 즉 통계적 사실을 넘어서는 긍정적 노출을 지속한단 점은 어떤 각도에선 긍정적일 수 있겠다. 개연성을 상당부분 상실하면서까지도 이를 지켜내는 시도가 용감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흔히 발견되는 선택적 소수자 강조가 고민 없이 답습된단 점은 지적해 마땅하다. 벡델테스트를 적용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며 아시안을 소외시킨 결정은 이들이 미국 내에서 차지하는 통계적 비중과 철저히 괴리된다. 이러한 문제가 오로지 <워킹 데드>에 한정되지 않았단 건 문제의 유효함을 말한다. 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 후보로 오른 작품들 가운데 장애인에 대한 벡델테스트를 통과하는 작품이 몇이 되는가. 답은 0이다.

여성과 성소수자, 흑인 등에 대하여 약간의 소외, 또 부정적 묘사만 있다면 쏟아지는 비평들이 유달리 장애며 아시안에 대해서는 잠잠한 현실을 지적해야 한다. 아카데미 작품상 선정기준과 같이 장애와 아시안이 설 자리를 다른 소수자에 대한 채움으로써 대체할 수 있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같은 물음은 할리우드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다. 한국은 우리 안의 소수자를 돌보고 있는가. 소수자들 간에 불합리하고 편향적인 기준으로 우열이며 노출의 정도를 나누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 내 각기 다른 인종이 영화에 어느 정도로 등장하는지, 그를 조명하는 빈도며 시각은 어떠한지, 장애를 다루는 방식은 또 어떠한지를 한국은 거의 묻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이 이 시대의 유효한 비평의 자리가 아닌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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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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