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 데드> 스틸컷
AMC
수많은 여성캐릭터를 지도력과 결단력은 물론, 전투력 등에서까지 남성보다 우월하게 등장시키는 건 기본이다. 백인뿐 아니라 흑인과 라틴계, 아시안 등 비교적 다양한 인종을 배치했고, 그들 간의 교류 또한 적극적으로 그렸다. 시리즈 전체를 아울러 같은 인종보다는 인종을 건너 이뤄지는 연애와 결혼이 많다는 점을 그저 우연으로만 볼 수는 없다. 게이와 레즈비언 등 성소수자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할리우드 전체에서, 특히 투자와 제작, 비평 등에 있어서 소수자를 존중하는 작품을 우대하는 흐름을 이 작품도 제대로 탄 것이다. 하물며 마초적 남성을 벗어나 그 밖의 시청자에게 호소하려는 요구까지 있었으니, <워킹 데드>의 결단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마니아층을 넘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널리 사랑받았다. 전국적 인기, AMC는 물론 베이직 케이블 채널 드라마 역사를 시리즈는 완전히 새로 써냈다.
그러나 그대로 좋을까. 나는 이 드라마를 두고 장애와 아시안의 관점에서 백델테스트를 돌려본다. 여성과 성소수자, 흑인에 있어선 압도적으로 조건을 충족하는 이 드라마가 장애와 아시안에 대해선 전혀 그렇지 않단 걸 확인한다. 이를테면 이렇다. <워킹 데드> 세계관 가운데서 좀비 탓이 아닌 장애인이 처음 제대로 등장하는 건 시즌9 에피소드 5에 이르러서다. 마그나, 유미코, 루크 등으로 이뤄진 다섯 명의 새로운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 청각장애인인 코니(로런 리들로프 분)인 것이다. 이 드라마가 무려 9년 만에 처음으로 장애인에게 이름을 준 역사적 순간이다.
그녀가 처음 등장한 에피소드 5만 보더라도 이름을 가진 인물만 수십, 조연까지 수백 명이 등장하지만 장애인은 오로지 그녀 1명뿐이다. 인구통계상 장애인 비중이 현대국가 중 가장 적은 한국 기준으로도 터무니없고, 미국에선 더욱 말이 안 되는 수치다. 장애가 험난한 세상 속 생존에 적합하지 않은 탓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적어도 고려는 되었어야 한다. <워킹 데드>의 안이함은 그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작품 가운데 수시로 언급되는 과거 회상, 잃은 이에 대한 언급에서까지 장애인 등은 철저히 배제돼 있는 것이다.
코니가 등장한 후에도 벡델테스트의 다른 기준은 얼마 성립되지 않는다. 장애인이 오로지 그녀뿐이며, 그녀의 행동 중 상당수는 장애와 관련된 것으로 그려지는 탓이다. 장애인을 장애를 넘어선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 삶을 그려내려는 노력을 이 드라마는 10번째 시즌에 이르러서야 약간이나마 시도하기 시작한다.
아시안 소외도 심각해... 비판하고 개선해야
▲<워킹 데드> 포스터
AMC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미국 극동부에서 아시안이 결코 타 인종에 비해 적지 않다는 점은 이미 지난 씨네만세에서 짧게나마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한국계 글렌(스티븐 연 분)이 하차한 뒤로 이를 사실상 챙기지 않는다. 인도계로 보이는 시디끄(아비 내쉬 분)가 시즌8에서 등장하기까지 동아시아는커녕 범아시안조차도 전무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관련기사: '백설공주' 참담한 성적표, 이 통계를 보시라
https://omn.kr/2cscb )
<워킹 데드>가 끝까지 여성과 성소수자, 흑인에 대한 고려, 즉 통계적 사실을 넘어서는 긍정적 노출을 지속한단 점은 어떤 각도에선 긍정적일 수 있겠다. 개연성을 상당부분 상실하면서까지도 이를 지켜내는 시도가 용감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흔히 발견되는 선택적 소수자 강조가 고민 없이 답습된단 점은 지적해 마땅하다. 벡델테스트를 적용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며 아시안을 소외시킨 결정은 이들이 미국 내에서 차지하는 통계적 비중과 철저히 괴리된다. 이러한 문제가 오로지 <워킹 데드>에 한정되지 않았단 건 문제의 유효함을 말한다. 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 후보로 오른 작품들 가운데 장애인에 대한 벡델테스트를 통과하는 작품이 몇이 되는가. 답은 0이다.
여성과 성소수자, 흑인 등에 대하여 약간의 소외, 또 부정적 묘사만 있다면 쏟아지는 비평들이 유달리 장애며 아시안에 대해서는 잠잠한 현실을 지적해야 한다. 아카데미 작품상 선정기준과 같이 장애와 아시안이 설 자리를 다른 소수자에 대한 채움으로써 대체할 수 있는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같은 물음은 할리우드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다. 한국은 우리 안의 소수자를 돌보고 있는가. 소수자들 간에 불합리하고 편향적인 기준으로 우열이며 노출의 정도를 나누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 내 각기 다른 인종이 영화에 어느 정도로 등장하는지, 그를 조명하는 빈도며 시각은 어떠한지, 장애를 다루는 방식은 또 어떠한지를 한국은 거의 묻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이 이 시대의 유효한 비평의 자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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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