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빈, 설경구 주연의 드라마 <하이퍼나이프>가 디즈니+를 통해 공개되었다. 홍보물에서부터 '예측 불가 메디컬 스릴러'라는 신개념적 장르를 위시하는 본작은 어떻게 숱한 의학 드라마와 자신을 차별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답은 <하이퍼나이프>의 '타 장르 문법의 차용' 그리고 '선택과 집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드라마 <하이퍼나이프> 포스터
디즈니+
껍데기는 의학 드라마지만…
<하이퍼나이프>의 인물 관계도는 단순하다. 다양한 의사들과 환자들이 등장하는 의학 드라마의 특성을 타파하고, 전직 신경외과 레지던트 '세옥(박은빈 분)'과 현존 최고의 신경외과 교수 '덕희(설경구 분)'의 관계만이 기둥 역할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작중 세옥은 타인의 수술에 난입하고 폭력적인 경향성을 보이는 등 돌발 행동으로 인해 의사 면허를 박탈당한다. 그럼에도 불법 수술을 담당하는 '섀도우 닥터'로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레지던트 시절의 은사 덕희가 그런 세옥을 찾아다니면서 그녀의 인생이 다시 한 변 격동의 시기에 놓이게 된다.
덕희는 세옥을 끊임없이 비난하고 질책하면서도, 제자로서 세옥을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뇌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세옥이 집도해 준다는 조건으로 그를 복직시켜 주겠다고 장담하는 등, 자신의 수제자가 방황을 멈추고 위대한 의사의 길을 걷기를 원하는 모습을 지속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세옥은 이러한 덕희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 것처럼 행동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더더욱 심한 반항을 이어간다.
성애적 감정은 배제되었지만 뒤틀린 사랑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세옥과 덕희의 관계는 흔한 의학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하이퍼나이프>가 이 사제에 이야기의 자원을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작의 '장르적 가면'을 벗겨야 한다. 대게 '의학 드라마'라고 함은 직업으로서의 의사의 고뇌에 집중하는 모습을 그리는 작품을 뜻한다. 의사만큼이나 환자도 적극적인 주체로 등장하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떠한 결심을 해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퍼나이프>에서 의사라는 직업 자체는 일종의 설정에 불과하다. 세옥과 덕희의 관심사는 환자가 아닌 서로에게 쏠려 있다. 일종의 심리전과 같은 이 구도는 마치 권력자와 그 후계자가 지니는 역학 관계를 연상시킨다.
▲드라마 <하이퍼나이프> 스틸컷
디즈니+
<하이퍼나이프>의 덕희를 왕으로, 세옥을 그의 뒤를 잇게 될 왕세자로 치환시켜 보면 어디선가 보아 왔던 익숙한 관계성이 드러난다. 권력자는 자신이 모질게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낙담과 수치심을 비롯한 감정에 맞서는 법을 알려 주고 싶어 하고, 후계자는 그런 권력자의 의중을 알면서도 당장의 사랑과 인정, 그리고 진실을 바라게 된다.
작중 의사 면허를 잃게 된 세옥이 병원 건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덕희의 재고를 간청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사극 속 '석고대죄하는 세자'의 구도를 빼다 박았다. 본작은 이러한 익숙한 구도에 곤룡포를 입히는 대신 수술복을 입히기를 택했고, 덕분에 <하이퍼나이프>는 두 미친 천재 의사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이라는 신선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드라마 <하이퍼나이프> 스틸컷디즈니+
리미티드 시리즈의 힘
<하이퍼나이프>가 지니는 또다른 힘은 '선택과 집중'에 있다. OTT 오리지널 콘텐츠로서 대중 앞에 나서기를 선택한 본작은, 전통적인 텔레비전 드라마가 아닌 '리미티드 시리즈'의 형식을 띤다. 총 8화에 달하는 짧고 담백한 분량으로 이야기를 질질 끌지 않도록 한 것이다. '시즌 갱신'을 염두에 두고 만든 클리프행어(cliffhanger: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도록 스토리를 제대로 끝맺지 않는 작법)식 엔딩을 내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드라마처럼 10부작이 넘는 구조를 택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하이퍼나이프>는 담백한 완결성을 지닌 작품이 된다.
이야기의 지나친 확장을 막기 위해, <하이퍼나이프> 속 조연 인물들의 서사 역시 절단에 가까운 방식으로 빠르게 주어진다. 주연이 아닌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를 내세우기도 하는 전통적인 드라마의 구조에서 벗어나, 몇 개의 회상 신을 통해 조연의 인물성을 살리면서도 그들이 중심 이야기를 잡아먹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러한 리미티드 시리즈의 특성은 '집에서 길게 보는 영화'라는 평이 생겨날 정도로 시청자의 집중력을 끌어내는 데 한몫한다. '숏폼 콘텐츠'의 열풍으로 인해 더 빠르고 짜릿한 이야기를 원하는 시청자들을 감안하여 응축적인 서사를 풀어내는 것이다. 청소년의 극우·인셀화 세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 역시 이러한 방식을 택했는데, 전체 에피소드 수가 4개의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짧고 휘몰아치는 몰입도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판단할 수 있어 보인다.
이처럼 <하이퍼나이프>는 익숙한 구도의 애증 이야기에 신선한 장르적 색채를 덧입혀 신선한 이야기를 구축해 냈고, 리미티드 시리즈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짧은 시간 안에 '몰아보기'가 가능한 몰입도 있는 서사를 풀어냈다. 또한, 지상파가 아닌 OTT 오리지널 작품으로 노선을 확정해 과감하고 폭력적인 연출을 풀어낼 수 있는 청소년 관람 불가 시청 등급을 받아낸 것도 <하이퍼나이프>가 내건 승부수로 볼 수 있겠다. 한국 드라마의 흔한 '로맨스화 현상' 없이도 장르적 흡인력을 지닌 짧고도 강력한 작품을 원한다면, 디즈니+에서 <하이퍼나이프>를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펄프픽션 신봉자.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믿고 글을 씁니다.
두 미친 천재 의사의 밀당, 껍데기만 의학 드라마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