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스틸컷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스틸컷태양미디어그룹

피트 하밀의 글 '고잉 홈'은 노란손수건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의 원형이 됐다. 교도소에서 4년 복역 후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 빙고가 석방 전 제 아내에게 자기를 반겨 맞아줄 것이냐를 알려 달라고 편지를 띄웠다는 이야기. 용서해줄 거라면 집 앞 참나무에 노란손수건을 묶어두고,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라 했다.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 이들이 숨죽인 가운데 버스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고 그 앞엔 수백 그루 참나무 가지마다 노란손수건이 묶인 광경이 펼쳐졌다고.

이 이야기가 '토니 올랜도 앤 던'의 명곡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웠다. 그렇게 노란손수건은 기다림과 용서, 또 희망의 상징이 됐다. 죄수가 군인이 되고 또 다른 무엇이 되기도 했지만, 어찌됐든 노란손수건은 누군가를 용서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이의 깃발로 활용됐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이 이야기의 일본영화 버전이다.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택한 가운데, 출소한 사내가 젊은 남녀와 동행하며 홋카이도에 사는 아내에게 귀환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손 안에 쥔 스마트폰과 발전한 기술에 반비례해 졸아든 기다림의 자리를 이 영화가 돌아보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사실이 반가웠다.

반 세기 만에 개봉한 전설적 일본 영화

영화는 한국에서 첫 개봉이다. 1978년 처음으로 열린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남우주연상·남녀조연상 등 주요부문을 휩쓸며 주인공이 된 이 상징적 영화는 당시 일본 대중문화 수입제한 정책에 따라 한국에 선보일 기회를 잡지 못했다. 주연을 맡은 다카쿠라 켄은 이후 <철도원> 등을 통해 자타공인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감독은 동경대학교 법과대학 출신 수재로 유명한 야마다 요지다.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상과 각본상을 숱하게 탄 그의 대표작 중 한 편이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다. 109분짜리 장편영화는 앞서 언급했듯 원전격인 미국 이야기를 일본을 배경으로 변주하여 각색했다. 출소한 전과자가 주인공이 되고 아내에게 귀환한다는 주요설정을 기본적인 얼개로 삼고, 본래 버스에 함께 탔던 주변인물을 발정이 난 사내와 그에게 마음을 여는 젊은 여성으로 캐릭터화해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영화는 젊은 청년 하나다 킨야(타케타 테츠야 분)가 친구들의 배웅 속에 큰 포부를 품고 여행을 떠나며 출발한다. 거진 숫총각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간절한 꿈이 하나 있다면 제대로 된 여자와 경험을 갖는 것이다. 전에 사귄 여자에게 뻥하고 차인 그는 가슴에 휑 뚫린 허전함을 달랠 길 없다. 잔뜩 조급해진 그는 당시로선 제법 잘 빠진 붉은 승용차를 뽑아 실연의 아픔도 씻을 겸 야심찬 여행길에 오른다.

오가와 아케미(모모이 카오리 분)도 멀리 여행을 떠나온 길이다. 철도승무원으로 일하는 그녀는 일이며 도시 생활에 지친 모양이다. 쾌락과 휴식, 재출발과 자아를 찾아 여행길에 오르는 건 1970년대 일본 젊은이들만의 일은 아닌 것이다.

무튼 그녀는 승무원답게 호감을 주는 외양에다 홀로 여행 중인 이십대 초반 젊은 여성이다. 실연의 상처를 후딱 채워버리고픈 혈기왕성한 청춘 킨야가 그녀를 가만히 놓아둘 이유가 없다. 투박하지만 사내다운 도전정신으로 그는 마침내 아케미와 동행에 성공한다. 승용차를 가진 젊은 남자, 그것도 20대에겐 만용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의 용기가 쑥쑥 자라나는 게 아니던가. 정열의 붉은 승용차 조수석에 아케미를 태우고 내달리는 킨야의 부푼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 시절을 건너온 이들은 모두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드무비로서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 가진 우선하는 미덕은 킨야, 나아가 아케미의 심리, 그 둘이 빚어내는 드라마를 관객에게 공감되도록 풀어낸다는 점이다. 영화는 오로지 그만으로 전반부를 흥미진진한 여정으로 만들어간다. 1970년대의 정서가 물씬 묻어나는 투박한 남자와 복잡한 여자의 관계가 영 진척되지 못하는 상황이 보는 이에게 요즈음 작품에선 흔히 마주하기 어려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 시절과는 달라진 오늘의 감수성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스틸컷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스틸컷태양미디어그룹

물론 일부 장면에서 감수성 높은 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자아낼 수 있겠다. 어떻게든 아케미를 덮치려 드는 킨야의 모습과 그를 밀어내면서도 끝끝내 동행을 이어가는 아케미의 선택이 요즈음의 감성으론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탓이다. 당대 일본 기준으론 장점만이 언급됐던 이 영화가 오늘 한국에서 재개봉 한 뒤 성적 불쾌감과 여성 캐릭터의 수동적 선택에 대한 비난에 직면한 건 차라리 자연스럽다 해도 좋겠다.

일례로 둘은 사정이 꼬여 한 여관방에 들게 되는데, 아무 짓도 안 하고 따로 자기로 한 킨야가 당초 약속과 달리 아케미를 범하려 든다. 그와 나란히 누워 있던 아케미는 슬금슬금 넘어오는 킨야에게 키스까지는 허락하지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그와 실랑이를 벌인다. 이 장면은 직접적 폭력만 쓰이지 않을 뿐이지 요즈음 한국 법률 기준으로는 거의 범죄와 맞닿는 수준인데, 영화는 이와 같은 장면을 남녀사이에 다반사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인 듯 연출하는 것이다.

방음이 좋지 않은 옆방에서 상황을 그대로 듣던 동행 시마 유사쿠(다카쿠라 켄 분)가 참지 못하고 옆방 문을 열어젖히며 상황을 일단락 시키는데, 이때 그가 킨야의 무리한 요구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그쯤 해 둬'라고 싸잡아 비난하는 대목도 당시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알도록 한다. 말하자면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이 예민하게 다뤄지는 요즈음의 감성과 어찌됐든 결과만 좋다면 만사 오케이라는 당대의 풍토가 얼마만큼 달라졌는지를 알도록 하는 사건들이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이처럼 킨야와 아케미의 엇갈리면서도 어딘지 가능성이 엿보이는 관계를 흥미롭게 드러내는 가운데서 차츰 이들과 동행하는 사내 유사쿠의 사정을 꺼내놓는다. 그가 과거 사람을 죽이고 감옥소에서 살았다가 이제 막 출소하는 상황이란 사연부터, 살인에 이르게 된 사정, 또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아내와의 관계까지를 하나 둘 풀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동행인 킨야와 아케미가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낯선 이 유사쿠를 응원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변한 것이 꼭 나아진 건 아님을

여러모로 영화는 1970년 일본사회와 반세기 흐른 뒤의 한국사회의 격차를 느끼도록 한다. 킨야가 아케미를, 유사쿠가 아내를 대하는 모습에 더해, 이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는 자세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예 비판적 의식을 갖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라 믿는다. 과거의 마초이즘이 깨져나간 자리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그 사고와 결정의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이 자리한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일부 그를 훼손한 장면과 선택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의 발전이라 보아야 옳을 테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는 우리가 잃은 것 또한 돌아보도록 한다. 킨야와 아케미, 그리고 유사쿠까지, 세대와 성별은 물론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까지 완전히 다른 이들이 별다른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지난 시대 우리가 지나온 세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웃도 고향도 공동체도 모두 다 잃어버리고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한국사회의 모습을 무작정 발전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어른의 조언이 오지랖이며 꼰대질로만 평가되고, 도움도 없고 해를 끼치는 일도 없는 세상이 마땅히 자연스럽다 여기는 오늘의 모습이 과연 이 영화 속 풍경보다 아름답다 할 수 있는가.

전과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재기의 기회를 주는 자세 또한 영화 안 여러 대목에서 드러난다. 경찰에게, 동행인 킨야와 아케미에게, 그리고 그 자신과 아내에게까지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죄를 지은 이에게 딱지를 붙이고 저와 다른 이들과 엮이지 않으려 드는 경계 짓고 손가락질 하는 이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 드러내는 다름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도록 이끈다. 자연스럽다고 믿지만 세월이 지나 바라보면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일지도 모르는 많은 면모를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달리 보도록 이끄는 영화란 언제나 귀하다. 이 영화가 그렇다.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포스터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포스터태양미디어그룹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행복의노란손수건 태양미디어그룹 야마다요지 다카쿠라켄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