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9일 서울 광진구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열린 리버틴즈(The Libertines)의 내한 공연
지난 4월 9일 서울 광진구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열린 리버틴즈(The Libertines)의 내한 공연본인 촬영

음악 역사에서 록의 구원자로 기대받은 밴드들은 종종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영국의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을 이끈 리버틴즈(The Libertines) 역시 그랬다.

리버틴즈는 브릿팝의 정겨운 멜로디와 직선적인 펑크, 청춘의 혼란, '영국성'으로 점철된 가사, 랩 음악 못지 않은 운율 감각 등을 모두 갖춘 밴드였다. 그들은 "영국인이 야구 모자를 쓰는 것만큼 걱정스러운 광경도 없죠"('Time For Heroes')라는 가사 한줄로 세계화 시대에 대한 두려움, 영국에 대한 사랑을 모두 노래했다. NME를 비롯한 영국의 매체들은 이들을 가장 '영국적인 록스타'로 추켜세웠다. 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도, 고(故)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리버틴즈의 광팬을 자처했다.

동시대의 밴드 중 리버틴즈처럼 할 수 있는 밴드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성기를 2년만에 끝낸 것은 슬프게도 리버틴즈 자신들이었다. 프론트맨 피트 도허티의 마약 중독, 멤버 간의 극심한 불화 등이 늘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후 해체와 재결합은 반복되었다.

질풍노도의 밴드, 안정된 공연을 선사하다

 록밴드 리버틴즈(The Libertines), 왼쪽에서부터 피트 도허티, 칼 바랏, 존 하살, 게리 파웰
록밴드 리버틴즈(The Libertines), 왼쪽에서부터 피트 도허티, 칼 바랏, 존 하살, 게리 파웰유얼라이브, 엠피엠지

그리고 지난 4월 9일, 서울 광진구 예스24 라이브홀에서 리버틴즈의 첫 내한 공연이 열렸다. 데뷔 23년 만의 일이다. 그것도 원년 멤버 네 명 전원이 참석한 공연이다. 티켓은 빠르게 팔려나갔고, 만석에 가까울만큼 공연장이 관객들로 꽉 찼다. 혼란을 거듭했던 락스타는 너무나 모범적인 공연을 선사했다. 물론 영국식 유머(?)도 빼 놓지 않았다.

"이 공연장에서 100마일 정도 걸어가면 작은 섬이 있는데,
거기가 잉글랜드야. 우리는 거기서 왔지" - 피트 도허티

리버틴즈 공연의 성패는 밴드의 두 프론트맨인 칼 바랏과 피트 도허티의 '케미'에 달려 있다. 두 사람이 화음을 맞추는 모습은 칼 바랏은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 했다. 단순한 기타 코드를 역동적으로 연주하는 것은 물론 피아노와 색소폰을 오가며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의 면모 역시 보였다. 피트 도허티는 스키니진을 유행시켰던 전성기와 비교하면 겉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도허티는 안정적인 목소리와 씩씩한 태도로 공연을 끌고 나갔다. 오랜 마약 중독을 이겨낸 그의 모습이 더 반가웠다. 두 사람의 상반된 목소리가 쌓는 화음 역시 이 공연의 재밋거리였다.

전성기가 지난 밴드의 무기력함과 게으름 따위가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쌓인 지혜, 품격, 여유가 돋보였다. 네 명의 원년 멤버는 'Can't Stand Me Now', 'Boys In The Band', 'Up The Bracket', 'What Katie Did', 'Death On The Stairs' 등 청춘 시절에 내놓은 명곡들을 손색 없게 연주하고 불렀다. 중년이 된 리버틴즈는 여전히 그들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2000년대 영국의 어느 날을 간직하고 있었다. 멤버 전원의 합이 유독 빛난 'Merry Old England', 모든 관객을 뛰게 한 'Run Run Run' 등, 지난해 발표한 신곡 역시 밴드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공연장의 모두가 '리버틴즈'였다

티켓 구매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집단은 20대 여성이었다. 관객 대부분이 리버틴즈의 전성기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만, 이들에게는 세월을 초월하는 힘이 있었다. 젊은 관객들은 중년의 밴드가 만들어내는 모든 순간에 열광했다. 마치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관객 부럽지 않게, 밴드의 모든 명곡을 '떼창'한 것은 기본이었다. 밴드의 시그니쳐가 된, 한 마이크 앞에 두 프론트맨이 마주 보고 노래하는 모습이 펼쳐질 때마다 거대한 환호성이 터졌다. 충성도 높은 관객 역시 공연을 완성한 주체였다.

불후의 명곡 'Time For Heroes', 그리고 영국 록을 대표하는 청춘의 송가 'Don't Look Back Into The Sun'은 모두를 하나로 만든 엔딩곡이었다. 모든 관객이 기다렸다는 듯이 곡의 도입부를, 기타 리프를 따라 부르며 날뛰었다. 리버틴즈를 보며 꿈을 키운 국내 인디 밴드 '꼬리물기', 'PCR'의 김기민이 깜짝 게스트로 등장해 합주한 것 역시 낭만을 더 했다. 이날 공연에는 리버틴즈의 음악으로 구성된 창작 뮤지컬 '보이즈 인 더 밴드'를 기획하고, 칼 바랏의 2019년 내한 공연을 기획한 배경희 전 더뮤지컬 편집장 역시 자리했다. 리버틴즈는 공연 말미 그녀를 팬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광란의 공연을 마치고 '리버틴즈'를 연호하는 관객들에게 드러머 개리 파웰은 특유의 영국 억양으로 "you are libertines(당신들이 리버틴즈다)"라는 말을 던지고 무대를 떠났다. 아티스트와 관객의 구분이 완전히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밴드가 한국을 찾기까지 23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이들을 지 않은 날 다시 한국에서 볼 수 있겠다는 기대 역시 생겼다.

리버틴즈는 무책임한 언론의 호들갑처럼 록의 구원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들의 전성기는 너무 짧았고, 악틱 몽키즈(Arctic Monkeys) 등의 밴드들이 대신 스포트라이트를 채 갔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리버틴즈의 음악을 자신의 음악으로 받아들인 청춘들이 공연장에 자리한다. 그리고 리버틴즈드는 멋진 공연으로 그들의 하루를 구원한다. "지나간 태양은 돌아보지 말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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