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은 도서관의 날이다.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2023년 무려 법정기념일로 지정까지 됐다. 도서관의 날부터 일주일은 도서관 주간으로 지정돼 중앙정부·지방자치단체 주관으로 온갖 행사까지 열린다.

도서관의 날은 도서관들이 모여 빈 날을 골라 아무렇게나 지정한 날이 아니다. 도서관은 공동체의 지향과 치열하게 부딪치는 가치의 투쟁 위에 세워져 운용되는 공간인 탓이다. 결코 적지 않은 국가예산의 쓰임을 두고도 중앙정부와 지자체엔 도서관의 존재방식이며 물리적 조건을 두고 수많은 소요가 오간다.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래 관련 예산이 지속해서 줄다 2023년 예산이 아예 삭감돼 사업중단이 예고됐던 '작은도서관'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겨레> 보도로 이 문제가 알려진 뒤 서울시는 관련 예산을 증액해 편성했다.

도서관법은 도서관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국민의 정보기본권 신장과 사회의 문화발전에 기여해 지식문화 선진국을 창조하는 데 중요한 기반시설'이라고 말이다. 법은 도서관의 가치가 사회전반에 확산될 수 있도록 국가·지방자치단체가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규정함은 물론, 이를 위해 '도서관의 공공성과 공익성을 보장하는 것을 기본이념으로 한다'고 확인한다. 다시 말해 도서관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나아가 신장시키며, 사회의 문화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해낸다. 자본이나 문화적 여력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이 최소한의 지식에 쉽게 접근해 교양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 도서관을 살리는 것이 곧 공동체를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인 이유다.

'도서관의 날' 이야기하는 도서관 나오는 영화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워터홀 컴퍼니

도서관의 날은 다른 많은 법정기념일이 그러하듯 도서관이 지탱하는 가치를 되새기도록 하는 중요한 날이다.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이 날을 열심히 되새김으로써 그것이 수호하는 가치를 강화하는 날이다. 굳이 이날 도서관과 얽힌 이야기를 해보려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듣기만 해도 지루하다 여길 수 있겠다. 도서관의 날이라니, 성인 평균 연간 독서량이 4권 아래로 떨어지고, 인구 절반 이상이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이 나라에서 도서관보다 따분한 이야기가 있는가 싶을 수도 있겠다. 도서관이 등장하는 영화래봐야 이 같은 생각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를 오래 고심했다. 그리고 겨우 고른 작품이 이것이다.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의 이 영화는 한국에서 영화 깨나 보는 이들은 죄다 알고 있는 명작이다. 아니,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해도 '오겡키데스카, 와타시와 겡키데스(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요)'란 대사쯤은 들어보았을 테다. 눈 쌓인 벌판 위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은 예쁜 여배우가 두 손을 모아 외치는 이 대사와 장면은 영화 그 자체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유명할 수 있겠다. 오죽 유명하면 넥센타이어를 비롯해 문화와 상관없는 여러 한국 기업들이 이 장면을 변주한 광고를 쏟아냈을까.

그런데 이 영화, 도서관과 관련이 깊다. 도서관이 등장하는 장면을 명확히 떠올리지 못하는 독자일지라도 어딘지 <러브레터>와 도서관이 어울린다고 여기리라 믿는다. 이와이 슌지 특유의 세기말적 감성과 도서관이 어딘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어떤 곳인가. 전자책이 득세한 이 시대에도 도서관은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디지털 영역을 꾸준히 넓혀가는 도서관들이 그를 원치 않는대도 다수 이용자들에게 도서관은 수많은 장서를 쌓아둔 물리적 공간으로 인식돼 있다. 열람실에 박혀 제 공부를 하는 이용자들만큼이나 물성을 가진 책을 빌리고 또 반납하며 앉아 그를 읽는 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도서를 대출하고 반납하는 일은 도서관의 가장 주된 기능이다. <러브레터>가 도서관을 활용하는 방식이 꼭 이 대목과 관련이 있다. 그것도 이와이 슌지답게 수기로 작성하는 도서대출카드를 주요하게 활용한다. 수기 도서대출카드를 기억하는 이가 아직은 꽤 많이 남았으리라. 마치 물성 있는 옛 영화티켓을 소중히 간직한 이들이 그러하듯이, 도서대출카드가 표상하는 감성을 도서관이 빠르게 잃어가고 있단 걸 아쉬워하는 이도 적지는 않을 테다. 이 영화는 그 감성을 물씬 느끼도록 한다.

이름 같은 아이를 짝사랑한 소년

영화는 동명이인의 첫사랑을 소재로 한다. 찬란한 고등학교 시절, 남학생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 분)가 여학생 후지이 이츠키(사카이 미키 분)에게 남모른 연정을 품었던 이야기다. 한편으로 이제는 장성해 숙녀가 된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분)가 저기 먼 곳 어딘가에서 죽어버린 후지이 이츠키의 풋사랑을 깨닫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아가 여학생 후지이 이츠키와 꼭 닮아 있는 여자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분)가 제 옛 연인인 후지이 이츠키의 사연과 대면하고 그를 떠나보내는 이야기다. 그밖에도 크고 작은 여러 이야기가 두 후지이 이츠키의 삶, 멈추고 흘러가는 두 줄기의 곡절들과 맞물린다.

이 시절 첫사랑이란 게 그렇다(고 전해 들었다). 풋내기 소년소녀들의 마음일랑 진솔함과는 별개로 서투르게 마련이어서 표현되기보단 갈무리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첫사랑과 풋사랑은 쉬이 짝사랑이 되기 마련이고, 짝사랑이란 사랑이 아니라고 폄훼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란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나서는 흘러나가게 마련이다. 재채기를 숨길 수 없듯 솟아나는 사랑 또한 마음 깊이 묻어두기는 어렵다. 어딘가로 새어나가 숨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표출되지 못한 사랑은 공기가 잔뜩 든 풍선에 거듭 불어넣는 바람과 같이 인간을 펑 터지게 한다. 고장 나는 것이다. 상사병에 들고 마는 일이다.

<러브레터> 속 사랑하는 후지이 이츠키는 자주 도서관에 간다. 그도, 그녀도 학교 도서부원이다. 도서부원이 도서관을 찾는 건 너무 당연해서 살필 필요 없어보이는 일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도서관을 가는 이유는 오로지 여자 후지이 이츠키 때문이다. 아니, 저 자신을 위해서일지 모르겠다. 사랑을 처음 품은 앳된 마음이 터져버리지 않도록 들어차는 사랑을 흘러내리도록 하기 위해서니. 무튼 그 모두가 후지이 이츠키 탓이며 후지이 이츠키를 위해서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워터홀 컴퍼니

그는 도서부원일 뿐 아니라 우수 이용자이기도 하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가장 많이 빌리는 학생인 것이다. 어찌나 많이 빌리는지 그가 빌린 책을 다 읽을 것이라 믿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다. 그 스스로도 그걸 알겠으나 그는 매일 여러권의 책을 빌리고 반복하길 반복한다. 도서대출카드(그렇다, 놀랍게도 이십 수 년 전엔 모두가 이러한 전근대적 유물을 이용해 책을 빌렸다)엔 자연스레 그의 이름이 적힌다. 책 가장 뒷장에 붙여 있게 마련인 도서대출카드는 책을 빌린 이들의 정보가 적히게 마련인데, 유독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빌리는 책엔 그의 이름만이 써 있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그 말고는 대체로 읽지 않을 법한 책을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빌리는 것이다.

이쯤되면 눈치 빠른 이들은 이유를 알 수 있겠다. 책 뒷장 도서대출카드에 적힌 후지이 이츠키는 책을 빌린 남자의 이름이 아니다. 그가 남몰래 사모했던 여자아이 후지이 이츠키다. 그가 소리쳐 부를 수 없는 그 이름을 도서대출카드에 마음껏 적는 것이다. 후지이 이츠키는 그래서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되고, 다시 '사랑해'가 된다. 얼마나 말랑말랑한 이야긴가.

이 책 가운데 각별히 인상적인 책 한 권이 등장한단 점은 눈여겨봄직하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괴작 <잃어버린 시절(간)을 찾아서>다. 펭귄클래식코리아와 민음사 기준으로 열두 권에 달하는 이 소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작품이다. 지금 한창 일곱 번째 권을 읽고 있는 나는 이제서야 후지이 이츠키가 이 책 일곱 번째 권에 '사랑해'라 적은 이유를 이해한다. 이 이야기는 열두 권 여정을 모두 마친 뒤 '김성호의 독서만세'에서 따로 풀어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도서관이란 공간, 그 공간이 간직했던 감성, 그 공간을 채웠던 책과 그 뒷장 도서대출카드의 물성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놓아버렸다. 아날로그의 감성, 어차피 내려올 위험한 산을 오르고, 그러다 죽은 애인의 이름을 저기 추운 들판으로 나아가 입 밖에 꺼내어 부르는 마음 또한 현대인들은 조금씩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감성 없는 삶이란 얄팍하다. <러브레터>와 이 영화가 전하는 감성, 또 영화 속 도서관의 분위기가 전해주는 온기가 필요한 이유다. 올해 초 무려 9번째 다시 재개봉한 영화는 지난달까지 무려 11만 명을 훌쩍 넘는 관객을 모으며 흥행했다(관련기사: 너무 일찍 떠난 그녀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https://omn.kr/2bbc9).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워터홀 컴퍼니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러브레터 워터홀컴퍼니 이와이슌지 나카야마미호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