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마추어> 스틸컷
영화 <아마추어> 스틸컷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 속 라미 말렉의 모습을 쉽게 잊을 수 있었던 관객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한 배우는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닌, 영화 전체와도 같은 존재감으로 스크린 내부를 활보했다. 이후에도 < 007 노 타임 투 다이 >(2021), <오펜하이머>(2023) 등의 작품에 출연해 왔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흡족하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타이틀 롤이 아니었던 탓도 있겠지만, 역시 짙은 여운을 남긴 하나의 작품으로 인한 그림자가 길고도 짙게 오랫동안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미 말렉 배우가 오랜만에 주연을 맡은 <아마추어>는 첩보 스릴러 영화다. 현장 경험이 전무한 암호 해독가 찰리(라미 말렉 분)가 아내 세라(레이첼 브로스나한 분)를 살해한 테러 집단에 복수하는 내용.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던 사람이 어떻게 비범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배우 본인이 거의 처음으로 도전하는 액션 스릴러라는 점, 그리고 기존의 첩보물이 갖고 있던 클리셰에 가까운 설정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흥미를 끈다.

영화는 1981년 출간된 로버트 리텔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시에도 <격정의 프라하>(1981)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된 바 있었는데 핵심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냉전 시대가 배경이던 시점을 현대로 옮기고,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여러 기술 장치를 극 중에서 이용하게 되면서 적극적인 각색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복수극을 펼친다는 점만큼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

02.
시작은 작은 격납고 속에서 경비행기의 수리를 위해 필요한 장비를 점검하는 찰리의 모습이다. 조지 부시 정보 센터의 데이터 해독 분석부에서 미 외교 정책과 관련한 CIA의 암호를 해독하는 그에게 비행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하늘을 나는 일은 보안을 이유로 온갖 시스템에 얽매인 삶, 심지어 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 5층 깊숙한 곳에 파묻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그의 인생과 완전히 다른 삶이다. 아내 사라의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망가진 탓에 정비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일 선물이다.

한편, 찰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로부터 1급 기밀 자료를 전달받는다. 그동안 자살 폭탄 테러로 알려져 있던 국제적인 사건이 정치적 의도에 의해 자행된 공격이었음이 드러나 있는 비밀 문건이다. 자신이 몸담은 정보부 내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는 사실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이 사건에 무어(홀트 맥칼라니 분) 본부장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사라가 출장지에서 폭탄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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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내 기분은 중요하지 않아요. 세라는 소중한 사람이에요."

이 영화가 기존의 다른 첩보물과 차별점을 갖고자 하는 부분은 인물이다. 뛰어난 체격 조건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액션은 물론, 수많은 복잡한 장치를 능숙하게 다루던 기존의 스파이와 다른 캐릭터. 극 중 캐릭터는 IQ 170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두뇌로 평생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던 암호 해독가로 현장 경험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아내의 복수를 다짐하며 범죄자들을 직접 처단하겠다고 마음먹지만 CIA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총 한 번 제대로 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간단한 가정집 문을 따는 일조차 동영상을 보며 배워야 하는 정도. 그 대신 그에게는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고도의 해킹 능력과 프로그래밍 실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은 현장에 직접 투입되는 대신 백업 요원으로서 주인공을 돕는 경우가 많다. 이번 작품에서 그가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된 데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일련의 사건 뒤에 믿을 수 있어야 할 정보부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친다. 앞서 이야기했던, 자신의 권력 위에서 의도된 공격조차 테러로 둔갑시킬 수 있는 본부장이다. 실제로 아내가 죽임을 당한 영국 테러는 조작된 테러로 인한 반동과 분노로 일어났다. 사건을 들춰내 아내의 복수를 이루려는 찰리와 이를 막고 은폐하려는 집단 사이의 다툼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개인은 혼자서라도 나서려 한다.

문제는 액션 스릴러 장르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로부터 육체적인 강점을 빼앗고 나니 장르적 강점이 되어야 할 액션의 지점이 상대적으로 빈약해진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는 법이다. 제임스 하위스 감독은 이를 주변 인물의 갈등 구조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이제 막 정보부 국장 자리에 취임한 신임인 오브라이언(줄리안 니콜슨 분) 국장이 무어 본부장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결 구도다. 두 인물은 공통의 목표인 찰리를 함께 뒤쫓으며 긴장감을 형성한다. 찰리가 테러범을 처단하는 과정에서의 장면 또한 나름의 역할을 해낸다. 직접적인 격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지점을 최대한 볼륨감 있게 다룸으로써 시각적인 자극을 이끌어내고 있다.

04.
"넌 할 만큼 했어. 세라가 뭘 원하겠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던 머리만 좋은, 총도 하나 제대로 쏘지 못하는 인물의 복수극. 누군가를 한 번도 죽여본 일이 없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영화 곳곳에 드러난다. 처음 찾아갔던 그레첸 프랭크(바바라 프로브스트 분)를 마주했을 때도 직접 죽이지 못하고 망설이다 일을 그르칠 뻔하고, 아내의 살인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호르스트 실러(마이크 스털버그 분)는 자신을 죽여보라며 총까지 직접 쥐여주지만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이 부분에 대해 영화는 실러의 입을 빌려 테러 직후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했어야 하는 그들과 복수의 마지막까지 이르기 위해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누군가를 죽여온 찰리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눈앞에서 직접 죽이는 일은 매번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에 가까운데, 이미 너무 큰 존재를 잃어버린 직후라 그 또한 그러지 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진심은 아니다. 영화는 자신의 말을 완전히 전복시키며 직접적인 폭력과 살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복수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마지막에서 분명히 보여준다. 찰리가 방아쇠를 직접 당기지 못하는 것이 두려움이나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성숙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말이다. 이는 본부장 무어의 횡포에 맞서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오브라이언 국장의 모습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완성해 낸다.

"우리가 하는 일이 가끔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지더라도, 목적과 수단마저 어둠에는 물들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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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찰리 헬러를 연기한 라미 말렉은 이 인물이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표현되는 데에는 그의 예민하면서도 일면 불안해 보이기까지 한 선명한 표정이 큰 역할을 해낸다. 어쩌면 이 작품으로 인해 라미 말렉은 자신의 거대한 작품 <보헤미안 랩소디>로부터 조금 떨어져 나올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이 지워지거나 옅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역할, 더 넓은 세상으로 이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영화 아마추어 라미말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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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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