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판타지에 J.R.R. 톨킨이, 하이틴 판타지에 조앤 K. 롤링이 있다면 무협엔 김용이 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로 이어지는 '사조삼부곡', 소위 <영웅문> 시리즈는 그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많은 이가 김용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는 <녹정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홍콩 최고훈장인 대자형훈장은 물론 영국 대영제국훈장과 프랑스 레지옹도뇌르까지 받는 등 세계 최고수준의 예술가인 김용이다. 그는 일생 동안 10여 편에 이르는 걸작을 남겼다. 무협이라는 장르를 그저 소비되는 장르물에서 중국문학의 한 갈래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홍콩과 중국 문화계를 상징하는 거장으로 오랫동안 널리 추앙받았다.
올해 김용의 작품 한 편이 다시금 영상화돼 관객들과 만난다. 바로 <소오강호>다. 홍콩영화 가운데 역대 최고의 작품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동방불패>의 원작이 이 소설이며, 홍콩무협영화의 전성시대를 활짝 연 동명영화 <소오강호>에도 모티프를 제공했다.
▲소오강호포스터
성도흥업
홍콩 최고 감독 5명이 모여 만든 무협영화
소설 <소오강호>는 정파와 사파로 나뉜 무림 가운데서 명문정파 화산파의 수제자 영호충이 겪는 사랑과 모험을 그린 장대한 서사시다. 작가 스스로 후기에 내놓은 장편들이 수작이라 말하였던 바, <소오강호>를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가 많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장우기, 홍금보 등이 출연한 2025년 작 <소오강호: 동방불패(가칭)>가 한국에서 개봉을 타진하는 가운데, 앞서 나왔던 고전명작 <소오강호> 또한 새삼 주목받고 있다.
홍콩영화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전성기에 와 있던 1990년이다. 호금전과 서극, 정소동이라는 당대 홍콩 영화계 기수들은 김용의 <소오강호>를 영상화하기로 결정한다. 홍콩, 넓게는 중화문화권이 가진 가장 훌륭한 콘텐츠를 절정에 달해 있는 영화산업 가운데 품어내어 세계 가운데 소개하겠다는 야심이 이 프로젝트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하나가 모두 명감독인 호금전, 정소동, 허안화, 서극, 김양화까지의 다섯 연출자가 <소오강호>를 공동연출하게 된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개의 힘을 하나로 모아 이룰 수 없는 일도 달성해내는 만화영화적 순간이 홍콩영화 안에서 발현된 순간이랄까.
무튼 영화는 소설을 적극 변형하여 한 편의 영화로 새로이 각색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황실 서고가 도둑에게 털려 규화보전이란 무공비급이 사라진다. 환관조직으로 서고를 관장하던 동창의 수장 고금복(유순 분)은 이 사실을 대립관계인 서창이 알기 전에 마무리 짓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은밀히 부하 구양전(장학우 분)에게 지시하여 금의위에서 사직한 임진남이라는 이를 범인으로 특정하고 추적하기 시작한다.
▲소오강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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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꼬인 상황에 휘말린 젊은 협객
임진남은 과거 화산파 장문인 악불군(유조명 분)과 인연이 있는 사이다. 그는 일찌감치 악불군에게 도움을 청한 모양으로, 수제자 영호충(허관걸 분)과 장문인의 딸 악령산(엽동 분)이 편지와 상자를 들고 그를 찾아온다. 임진남의 수하들과 이곳에 숨어든 화산파의 제자들, 또 이들을 포위한 환관무리가 일대 격전을 벌이는 것으로 영화 <소오강호>는 그 시작을 알린다.
영화는 절정의 무공을 담고 있는 비급을 두고 환관들과 그들이 곤란할 때마다 부리는 고수 좌냉선(원화 분), 비급을 훔친 임진남, 화산파 장문인 악불군 등이 벌이는 이전투구의 풍경을 그려낸다. 상황을 알지 못하던 영호충과 화산파 제자들, 또 영호충과 우연히 마주한 일원신교란 집단 사람들까지 개입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간다.
일류 정파의 장문인도, 금의위에서 오래 일한 무사도, 황실을 위해 일하는 환관과 그들이 고용한 무림의 고수까지도 저마다의 야욕을 위해 칼을 뽑아 휘두르는 대난장의 사태가 영화 내내 긴박함을 자아낸다. 서로에겐 모두 저마다의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주변의 다른 무엇도 방해가 될 뿐이다. 서로의 길에 방해가 되는 수많은 이들,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세상의 쟁투를 그리는 것이 어쩌면 이 작품의 목적인가 싶어질 정도다.
▲소오강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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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 중 손꼽는 명곡 '창해일성소'
갈수록 꼬이기만 하는 상황 가운데서 빛나는 건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소오강호지곡(笑傲江湖之曲)'이란 노래 한 곡이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라 겨우겨우 도망치던 영호충과 사매 악령산은 우연히 강가에서 오래 선단을 이끌어온 순풍당주 유정풍(오마 분)의 은퇴식을 지켜본다.
유정풍은 일생의 친구인 곡양(임정영 분)과 함께 천하를 주유할 계획이었는데, 불행히도 싸움에 휘말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때 이들이 영호충에게 건넨 것이 악보 한 장과 거문고 한 대다. 그 악보엔 이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적혀 있는데, 이 영화의 주제곡이자 향후 홍콩 무협영화 전체의 주제곡이라 할 만한 곡이다.
실제 곡명은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다. 직역하면 '푸른 파도에 한바탕 웃는다' 쯤이 될 텐데, 영화 속에선 '강호를 비웃는 곡'이란 뜻의 '소오강호지곡(笑傲江湖之曲)'이 이름으로 붙었다. 김용과 함께 홍콩이 낳은 4명의 재능, 즉 홍콩4대재자(香港四大才子)로 불리운 황점이 작곡한 희대의 명곡이다.
▲소오강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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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비웃고 삶을 즐긴다
저마다에게 값어치 있는 일대 비급을 두고 따로 원한도 없는 이를 베겠다고, 심지어는 제 제자며 친구까지 해치겠다 칼을 들어올리는 이들의 이야기가 강호를 비웃는 한 편 곡조 안에 절묘하게 담겼다.
험한 파도에 웃음을 싣고 물결 따라 덧없이 살아온 삶
한 잔 술에 웃음을 담아, 모든 은원 깨끗이 잊고 살리라
산천초목도 따라 웃는구나
뜬구름 같은 부귀영화 부질 없어라
소슬바람에 미소 지으며 근심일랑 잊고 살리라
우리네 인생은 아름다운 것
욕심 없이 어우러져 웃고 살리라
이익보다 더한 것은 없다며 아귀다툼하는 일이 어디 명나라 적 황실과 강호에만 있는 일일까. 김용이, 호금전과 정소동이 전하려 했던 <소오강호>의 메시지는 2025년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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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홍콩 최고의 감독 5명이 만든 무협영화, 2025년 다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