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스틸
판씨네마㈜
<마리아>는 세기의 오페라 가수이자 전설적 소프라노였던 마리아 칼라스의 생애 마지막을 담은 작업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마리아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아침, 영화 속 주요 배경인 파리의 36번가에 있던 자신의 아파트에서 급성 심근경색, 즉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영화는 그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일주일의 상상력을 가미해 재구성한다.
감독 파블로 라라인은 이미 20세기 현대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여성들의 전기영화 연작을 선보인 바 있다. 2017년 <재키>, 2021년 <스펜서>다. <마리아>는 그 대미를 장식하는 세 번째 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감독 특유의 건조하게까지 느껴질 법한 사실적 관찰은 여전하되, 접근방식에는 앞선 2편과 제법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전기물이라 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이 사람은 언제 어디서 태어나 이렇게 성장하고 성공과 좌절을 반복하며 결정적 전환점을 맞이한 다음, 후일담 형태로 이렇게 되었거나 혹은 언제 죽었다는' 연대기적 나열과는 다르다.
<재키>는 남편의 암살이라는 비극을 눈앞에서 맞이한 재클린 케네디가 겪는 며칠간, <스펜서>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영국 왕실의 중심이 된 다이애나 스펜서가 남편 찰스와 돌이킬 수 없는 갈등 끝에 이혼을 결심하던 며칠간에 오직 집중한다. <마리아> 역시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1주일이란 지극히 제한된 시간에 오롯이 머문다. 그 점에선 세 편이 공통점을 갖지만, 앞선 두 영화가 실제 현실 주인공들이 겪은 가장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 영상화하는 데 반해, <마리아>는 이미 쇠락한 과거의 명성에 포박당한 만년을 보내던 때에 주목한다. 사실 결말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지지도, 확인되지 않은 점만 무성한데 말이다. 당연히 관객의 주목도가 낮아질 법하지만, 대신에 감독은 숱한 소문과 가십을 추려내고 분류하며 재구성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영화는 마리아 칼라스의 무대이자 삶 자체라 할 오페라 구조를 의도적으로 가져왔다. <1막> "라 디바" - <2막> "중요한 진실" - <3막> "커튼콜" - <끝막> "부상하다"로 이어지는 구성은 각각 주인공이 현재 처한 상태, 그의 파란만장한 과거사, 재기를 위한 노력과 난관, 그만의 마지막 생의 무대를 관객에게 차례로 소개한다. 매번 단막 구분은 실제 영화 촬영 현장처럼 스크립트로 치는 점도 작은 재미 요소다.
구성 형식에만 그치지 않고 영화의 전반적인 정조 역시 오페라의 장대한 비극성을 닮았다. 마리아 칼라스는 서양의 장구한 오페라 역사에서 고전파에 속하는 벨칸토 오페라를 평생 지향하며 선호했다. 상대적으로 현대화된 베리스모 오페라의 사실주의보다 벨칸토가 추구하는 가수의 기교와 화음에 집중하는 형태가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특히 비극성이 강조되고 가수의 역할이 강조되지만, 그만큼 목을 혹사하기로 악명 높았던 바그너의 작품 등 독일 오페라에 조예가 깊고 자주 공연했다. 이는 당대 오페라의 메카로 꼽히던 이탈리아에서 초창기 활동을 펼치던 가수로선 드문 사례다.
디바의 발목 잡은 파란만장 인생사
▲<마리아> 스틸
판씨네마㈜
그런 음악적 성향과 함께 청소년 시절부터 경험한 불우한 가정사 탓에 마리아 칼라스는 타협하지 않는 완벽주의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한동안 자신의 음반은 일부러 듣지 않는다며 이유를 묻는 카페 주인에게 '너무 완벽하기 때문'이라 답하는 대목이 그렇다. 진정한 가수란 즉응성이 있어야 하고 공연 때마다 차이가 확인되어야 하는데 전성기의 자신은 너무나 기계처럼 완벽해서 듣기 괴롭다는 것이다. 그저 오만한 자존심으로 치부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던 마리아 칼라스가 젊은 날의 혹사로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판정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 다시 자신의 음반을 크게 듣는 장면은 주변 이웃에겐 층간소음 민폐에 불과할 테지만, 집사와 가정부 등 오랜 세월 그를 보필해 온 측근들에겐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공백기에 마리아 칼라스는 생의 마지막 공연, 자신만을 위한 '백조의 노래'를 애절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절창'이라 해도 좋겠다.
젊은 날의 성공에 가려졌지만, 마리아 칼라스는 참 험난한 삶을 살았다.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이혼하고 엄마 손에 이끌려 그리스로 돌아갔더니 2차 대전이 터져 나치독일에 점령당한 탓에 생활고에 시달렸다. 언니와 함께 자매는 독일군을 상대로 노래하고 춤추며, 때로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해 입에 간신히 풀칠한 것으로 암시된다. 엄마는 자식들을 연결하는 '포주' 노릇이었고, 그가 성공한 후에는 자신을 부양하라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탓에 친가와는 거의 의절하다시피 했다.
그런 성장사 때문인지 마리아 칼라스는 유독 아버지뻘 나이 든 남자에게 끌렸던 듯하다. 첫 남편이자 초창기 후원자는 정확히 친부와 나이가 같았다. (28살 연상) 그리고 그가 가장 열렬히 오랜 시간 사랑했던 오나시스 역시 그랬다. 대개 갑부의 돈을 보고 매달린 상류사회 스캔들로 취급당했지만, 정작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이 부자였던 데다 경제적으로 원조를 받지도 않았다. 오직 사랑을 갈구하며 오나시스의 바람기를 견디고 말년에 투병 생활에도 곁을 지켰다고 한다. 전성기가 지난 후 재기를 모색하며 준비하던 몇 차례 기회를 포기한 것도 오나시스의 신상과 시기가 맞아떨어진다.
기구한 인생 여정을 돌아보며 마리아 칼라스는 지난날의 자신과 차례로 대결하는 듯 보인다. 전성기의 도저히 이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완벽한 가수인 자신, 사랑을 위해 경력을 포기했던 가련한 여인으로서의 자신과 말이다. 알 권리를 운운하며 파파라치들이 따라붙고, 약물이 아니면 잠도 잘 못 자는 상태에서 이제 오랜 침잠을 깨고 자신을 위한 뭔가를 해보고자 하는 인생 최후의 마리아 칼라스가 저절로 공감되기 위한 기반이 하나둘 축적되어 간다.
마리아 칼라스의 역대급 공연
▲<마리아> 스틸
판씨네마㈜
그렇게 영화는 대담한 가정으로 세기의 전설을 해부한다. 물론 가정은 밝혀진 사실의 범주 안에서 세심하게 '선'을 넘지 않는 가운데 교차하는 안배를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관객에겐 마리아 칼라스를 맡은 안젤리나 졸리의 이미지·실제 고인의 목소리가 합체한 과거회상 속 역사적 공연 장면들이 눈에 확 들어올 테다.
여러 공연이 재현되지만, 크게 부각하는 건 우선 그가 1949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전설적인 명연으로 꼽히는 바로 그 공연이다. 바그너와 벨리니의 두 오페라에서 서로 다른 역할과 음역대를 거의 동시에 소화하는 게 가능하다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경이로움을 안겼던 현장이자 마리아 칼라스를 디바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역사적 순간이었다. 반면에 공연이 크게 드러나진 않지만, 과거의 팬이 그를 알아보고 악의 없이 언급하던 컨디션 난조로 취소한 몇 개의 공연도 깨알처럼 언급된다. 그리고 그의 공식 마지막 투어인, (한국에도 내한했던) 일본 공연 장면도 표현주의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은 아무도 들이지 않은 채 피아니스트와만 연습하던 파리 샹젤리제 극장 장면일 것이다. 실제 마리아 칼라스는 베토벤이 20대에 작곡한 유일한 이탈리아어 아리아 '아 페르피도'를 준비했다. 번역하면 '거짓말쟁이', 연인에게 배신감을 느낀 이의 감성 가득한 버전이다. 오나시스의 얼굴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는 연인이 음악 활동하길 바라지 않아 마리아는 전성기에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렇게 전설로 남았으나 가수로서의 본능은 봉인당한 셈이다. 생의 마지막에 이젠 죽고 없는 상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영화는 꽤 불친절하다. 플래시백으로 마리아 칼라스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등장하지만 친절한 해설과는 거리가 멀다. 국내 개봉했던 2017년 다큐멘터리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를 병행 관람하면 어느 정도 보완될 테지만, 그의 생애를 잘 모른다면 주인공의 감정을 온전히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일정한 성취에 도달한다.
북미에선 넷플릭스 스트리밍 서비스로 직행했지만, 한국에선 극장 개봉으로 우선 소개된다. 오랜만에 북미 관객이 배 아플 순간이다. 마리아 칼라스의 전기영화를 방구석에서 뒹굴며 보는 건 좀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기왕 볼 거면 극장에서 봐야 걸맞은 영화다.
<작품정보>
마리아
MARIA
2024|독일, 미국|드라마
2025.04.16. 개봉|123분|15세 관람가
감독 파블로 라라인
주연 안젤리나 졸리,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 알바 로르와처
수입/배급 판씨네마㈜
▲<마리아> 포스터판씨네마㈜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애정 갈구한 세계적 디바, 오페라 비극 닮은 그녀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