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존경을 받았다. 동북방 여진족을 제압해 국경을 안정시키고 과학·음악 등의 문물제도를 발달시켜 호평을 받았다.

지난달 25일 방영된 MBN플러스 퓨전사극 <허식당> 제2회는 조선시대에서 대한민국으로 온 허균(시우민 분)이 만원권 속의 세종대왕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장면을 보여준다. 허균은 만원권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선대왕 마마를 몰라뵙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며 엎드려 절한다.

선비들이라면 임금의 초상화를 보고 당연히 예를 표했다. 그 임금이 누구든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세종은 좋은 인상을 남겼다. 다소의 과장을 걷어내면, 위 장면은 어느 선비에게서나 나올 수 있었다.

사대부들이 세종을 좋아한 이유

 MBN플러스 <허식당> 관련 이미지.
MBN플러스 <허식당> 관련 이미지.MBN플러스

그런데 국경 안정이나 과학·음악 발달 등에 더해, 사대부들이 세종을 좋아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음력으로 효종 4년 7월 2일자(양력 1653.8.24) <효종실록>에 따르면, 정1품 영중추부사 이경여는 "세종시대에는 궁인이 100명을 넘지 않았고 말도 수십에 지나지 않았으며 의복과 기물도 가급적 검소히 하고자 애썼으므로 열성조가 대대로 가법으로 삼아 준수했습니다"라고 상소문에서 말했다. 세종이 궁녀를 포함한 인적·물적 자원을 많이 두지 않은 점이 대대로 모범이 됐다고 평가한 것이다.

궁녀와 내시는 임금의 수족처럼 활용됐다. 이들을 많이 두는 왕은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군주였다. 양반 기득권층은 그런 임금을 좋아하지 않았다. 왕이 너무 세지면 기득권층의 이익이 협소해진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궁녀나 내시를 적게 뽑고 말·의복·기물 같은 가용 자원을 적게 쓰는 군주를 선호했다. 이경여가 2백년 전 인물인 세종을 호평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세종시대에는 황희 정승의 활약에서도 나타나듯이 재상의 위상이 높았다. 이 또한 양반 사대부들이 좋아하는 바였다.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대표자인 삼정승과 판서들이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틀어쥐기를 희망했다.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나 아들인 세조 수양대군과 달리, 세종은 양반 사대부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군주였다. 그래서 선비들은 그를 더욱더 좋아했다.

한글은 조선시대 내내 사용됐지만, 이 문자가 대중적 주목을 받은 것은 양반 질서가 타격을 받은 1894년 동학혁명 이후였다. 평민 대중이 양반층의 권위를 들었다 놓았다 한 그 사건 이후로 대중의 문자인 한글이 양반의 문자인 한자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기에 한글 대중화를 개척한 인물이 1876년 생인 주시경이다. 주시경이 활약하기 전만 해도 한자는 지배적인 문자였고, 이 문자를 쓰는 사람들은 세종의 창제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도 세종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존경하는 이유는 오늘날의 우리와 달랐다.

허균이 자기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홍길동은 소설 속에서는 의적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실존 인물 홍길동은 실록인 <연산군일기>에서 강도로 표현됐다. 왕조시대 사람들은 재물을 빼앗는 것뿐 아니라 나라를 빼앗는 것도 도적질에 포함시켰다. 국가는 일차적으로 왕실 소유물로 인식됐으므로 국가 전복을 꾀하는 것도 그 시대에는 도적질이었다.

<경국대전> 형전과 더불어 형법전 기능을 한 <대명률직해> 형률은 모반대역죄에 관해 "무릇 사직을 위태롭게 하여 나라가 망하게끔 모의하거나 종묘나 산릉 또는 궁궐 등을 헐어 없앰으로써 나라를 망하게 하기로 모의한 경우에는 이런 모의에 같이 가담한 사람들을 주모자와 수종자로 나누지 않고 모두 거열처사시킨다"고 규정했다. <대명률직해> 형률은 이 조문을 재물 강도죄와 똑같이 도적 편에서 다뤘다.

<연산군일기>에서 홍길동을 강도로 표현한 것은 그가 종묘사직을 위협한 반체제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연산군 6년 12월 29일자(1501.1.18) <연산군일기>는 관복 차림을 하고 첨지 직을 자칭하는 홍길동이 밤이 아닌 대낮에 무장 병력을 이끌고 관청을 기습했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실제의 홍길동은 단순 강도는 물론이고 의적의 단계도 뛰어넘었다.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반군 사령관에 가까웠다. 작품 속에서 의적으로 순화시키는 했지만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허균이 성리학적 명분론과 충효이념에 얽매이는 일반 선비들과 달랐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허균은 소설 속 홍길동의 활동 무대를 하필이면 세종시대로 설정했다. 한양에서 인쇄된 경판본 <홍길동전>의 첫 대목은 이렇다.

"조선조 세종 때에 한 재상이 있었는데 성은 홍씨요 이름은 아무개였다. 대대 명문거족의 후예로서 젊은 나이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명성이 조정에서 으뜸이었으며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워 그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다. 일찍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하나는 이름이 인형으로 본부인 유씨가 낳았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길동으로 시비 춘섬이 낳았다."

전주에서 인쇄된 완판본은 위의 첫 대목이 "조선국 세종대왕 즉위 15년에 홍화문 밖에 한 재상이 있었는데, 성은 홍이요 이름은 문이었다"로 시작한다. 이 작품 속의 세종시대는 그리 좋은 시절이아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경"인 시대였다. 그래서 주인공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였다.

'홍길동전' 배경이 세종시대인 이유

  MBN 플러스 <허식당> 중 한 장면
MBN 플러스 <허식당> 중 한 장면 MBN

선비들이 볼 때 세종시대는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고 문물제도를 발달시키고 사대부와 재상의 권위가 존중되고 궁녀도 적게 충원된 시대였다. 오늘날의 우리처럼은 아니지만 선비들도 괜찮게 생각하던 그 시대를 허균은 작품 속의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 세종 재위기를 이상적인 시대로 인식했거나 이 시기에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면, 이런 설정을 내놓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홍길동전>과 내용이 유사한 한문본 <노혁전>도 있지만, <홍길동전>은 한문이 아닌 한글 소설로 전해져왔다. 허균이 실제 저자가 아닐 수 있다는 문제제기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기존 통설이 유지되고 있다.

그처럼 허균은 세종이 창제한 한글로 쓰인 작품의 저자이지만, 그 한글 소설의 배경을 하필이면 세종시대로 설정하고 이 시대를 "심장이 터질 지경"인 시대로 묘사했다. 그는 홍길동을 의적으로 묘사하면서 당대의 주류 사회와 대립시켰다. 내심으로 세종을 존경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식당> 제2회의 장면처럼 실제의 허균 역시 만원권을 봤다면 선비의 도리 때문에라도 예를 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허균이라면 만원권을 보면서 작품 속의 홍길동이 세종시대에 고난을 겪었다는 점도 함께 떠올렸으리라고 볼 수 있다.
허식당 허균 세종대왕 세종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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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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