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크닉> 스틸컷
영화 <피크닉> 스틸컷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우리 마흔 살, 앞으로도 더 행복하게 살자."

제승(류제승 분)과 하루카(강유미 분)는 배우다. 아직 유명하지 못해서 전업으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지는 못하다. 흔들리지 않는 현실을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자신이 바라는 업의 명칭을 붙들어야 한다. 하지만 꿈이 존재하는 막연한 장면의 환희보다는 당장 두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의 메마른 자리가 훨씬 더 가깝고 선명하다. 매일 평가받아야 하는 자리는 무대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무대가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증명하기 위한 평가라면, 현실에서는 스스로가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 있지 않음을 지속적으로 시험받는다.

소성섭 감독의 영화 <피크닉>은 잔혹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는다. 개인의 슬픔이나 상처를 들춰내는 식으로 감정을 도려내는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두 남녀의 하루를 뒤따르고자 한다. 연인인 하루카의 생일이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 하루는 끊임없이 얼룩진다. 가장 행복한 하루로 기억에 남을 수 있게 만들고 싶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미뤄두고 싶었던 현실이 서로 모의라도 한 듯이 차례대로 차고 들어온다. 꿈꾸는 장면이 현실의 문제와 별개의 것이 아니듯, 특별해 보이는 하루 또한 다른 날들로부터 차별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두 사람의 하루는 서로를 잠식해 가기 시작한다.

02.
시작은 생일상을 차려주겠다며 갑작스러운 연락을 해 온 제승의 어머니(육명자 분)다. 아직 결혼까지는 약속하지 않은 두 사람에게 불편할 수 있는 상황. 여기까지는 아직 서로를 다독일 여유가 있다. 생일인 하루카 역시 자신의 불편함보다는 제승이 느낄 미안함을 먼저 돌본다. 문제가 이것 하나라면 그렇게 지나갈 수 있는 날이었다. 수많은 날들 가운데 조금 불편한 하루.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 그동안 미뤄왔던 결혼과 출산, 효도와 같은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한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과업은 아니지만, 으레 기대되어지는 서른과 마흔 언저리의 일들이다.

모든 것은 경제적인 문제로 귀결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다음 날을 살아내기 위해 딴딴한 톱니바퀴처럼 짜인 삶에 갑자기 발생하는 사건은 금세 불편한 감정이 된다. 제승으로서는 가뜩이나 여자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나름의 무리를 한 직후다. 준비되지 못한 현실은 그렇게 건드려진다. 여유가 없는 경제 사정이 마음을 빈곤하게 만들고, 빈곤한 마음은 미안함 대신 자존심을 일으킨다. 제대로 세워내지 못한 자존심은 다시 자책이 되어 돌아온다.

평소라면 비록 가질 수 없는 장면일지라도, 서로의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웃으며 넘길 수 있었을 테다. 제승은 그런 처지를 미안해했고, 하루카 역시 더 많은 것을 바라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웅크리고 있던 두려움 또한 때를 틈타 새어 나온다. 마흔이 될 때까지 이루지 못한 꿈을 앞으로 이룰 수 있겠냐는 자조다. 부족한 삶 속에서 그나마 지탱해 왔던 유일한 하나마저 의심되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유약한 모습을 지켜보는 하루카의 마음도 편할 리 없다. 어쩌면 남자 친구의 어머니가 걸어온 전화와 초대보다 훨씬 더.

 영화 <피크닉> 스틸컷
영화 <피크닉>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3.
"진짜 왜 그래 오늘? 그 정도였어? 나 그런 사람이랑 만나고 있는 거야?"

다른 모든 상황을 제하고 제승이라는 인물만 바라보자면, 이 하루는 꿈 하나만을 바라보며 외면해 왔던, 혹은 미뤄왔던 삶의 모든 지점으로부터 그 무게를 되돌려 받는 시간이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반복되는, 옴짝달싹하지 않는 것만 같은 일상 위에서 스스로 다독여왔던 날들이 현실로 치환되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원죄처럼 짓눌러 오는 모든 상황에 그만 주눅이 든다. 그렇게 움츠러든 태도는 고맙고 미안해야 할 마음마저 날카롭고 뾰족하게 깎아 모두를 아프게 만든다.

한편, 하루카는 그런 제승이 답답하기만 하다. 같은 꿈을 꾸며 함께 나아가는 일이 행복했을 뿐인데, 오늘따라 영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다. 그의 불안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것들로 매일을 채워가면 되는데, 명품 가방이니, 비싼 오마카세니, 해외여행 같은 처지에 맞지도 않는 말들을 늘어놓는다.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탓하는 게 아니다. 그런 말들을 표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작 결혼 생각을 물어오는 어머니의 말이나, 자녀 계획을 묻는 의사의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런 그의 태도가 하루카에게는 잡히지 않는 꿈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마다 습관처럼 일본어로 된 주문을 외운다. '잃어버린 것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네. 키요미즈야. 오토와의 폭포는 다해도 잃어버린 것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네..' 처음으로 혼자가 되어 한강을 바라보던 그녀는 또 한 번 읊조린다. 이번에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제승을 떠나는 하루카의 등 뒤로 어딜 가느냐며 답답함을 호소하던 제승의 말이 마침 한강 다리를 지나는 지하철 소리에 묻히고 만다.

04.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쌓아 올린 감독의 마음까지 냉혹하지는 못하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마지막 프레임 안으로 두 사람을 다시 밀어 넣는다. 하필이면 한 사람의 올해 생일에, 약속했던 피크닉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렸지만, 하루의 끝자락만은 어떻게든 잘 꿰매어 붙이고자 한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현실의 무게를 대신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또 한 번 서로를 믿고 함께 꿈꾸며 나아갈 힘을 내어주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야기 밖에서 이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지나고 있는 날들을 떠올릴 누군가에게도.

소성섭 감독은 이 영화를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연출했다고 말한다. 극 중 두 사람이 그렇듯, 지워보려 해도 언제나 따라다니는 현실의 여러 고민이 괴로워서다. 작품의 밑바탕은 한발 더 나아간다.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와 설문지를 모두 종합해 즉흥극의 형태로 모든 이야기를 완성해 낸다. 제승과 하루카의 하루를 따르는 시간이 마치 현실 속의 한 장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실제로 어머니 역을 맡은 육명자 배우는 생활 연기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 <피크닉>은 프레임 속에 있지만, 스크린의 가장 볼록한 곳에 존재한다. 관객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덧붙이는 글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유통 배급 환경 개선을 위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는 2025년 3월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4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90편(장편 22편, 단편 68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세 번째 큐레이션인 '엇갈리는 우리'는 4월 1일부터 4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피크닉 류제승 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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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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