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스틸
디오시네마
세 주인공은 우리가 외신 보도에서 일본의 꿈을 잃은 무기력한 청춘들로 흔히 통칭하는 '사토리 세대'들의 전형이다. 한국의 'N포 세대'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만 관찰하면 확연히 다른 존재들이다. 외국인들이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줄 알았는데 막상 두 곳 다 들러보니 무척 다르더라 하는 것처럼 외형상 닮은꼴이라도 퍽 다른 모양새다.
한국의 동 세대는 억눌리고 좌절한 세대다. 취업은 절벽이고 노력해서 벌어봐야 집 한 채 장만할 희망도 찾기 힘들다. 사회생활을 참고 해보려니 사방에는 '꼰대'가 넘쳐난다. 그것을 참고 견뎌봤자 성실하게 일해서 돈 버는 건 바보짓처럼 인식된다. '영끌'해서 주식이나 코인, 부동산으로 일확천금 인생역전했다는 사례가 출처불명의 온라인 여기저기 넘쳐난다. 그렇게 일그러진 욕망에 몸부림치는 세대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의 사토리 세대는 어원 자체가 '달관'이란 뜻이다. '초식동물'처럼 이들은 최소한의 욕망만 충족하면 집도 자가용도 결혼에도 그리 관심이 없는 존재다. 정규직이 돼 회사인간으로 몸이 부서지며 일할 생각도 없다.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 세대가 그렇게 살았지만, 경제위기 시대에 초라하게 몰락하거나 이젠 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들은 철저하게 안전을 택했다. 소비를 줄이고 위험한 선택을 회피하고 적당한 쾌락에 만족한다. '달관'의 원래 의미와는 사뭇 다르지만, 외견상 이들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아르바이트해가며 셋집에 기거하고, 돈 안 드는 취미 한두 가지 즐긴다. 연애는 해도 동거로 그치지 굳이 전후 과정 복잡한 결혼은 반갑지 않다.
당연히 성장지상주의 사회에선 난리가 난다. 욕망에 불타 소비하고 투자해야 경제가 성장하고 신성장동력이 조성되는데, 이들 세대는 정확히 그 반대로 직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걸 강제하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국가의 일원으로 결혼해 자식도 낳고 번듯한 직장도 갖고 집도 사라고 하면 그것 다 하면 책임져 줄 거냐 반문한다. 타인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세금 낼 것 다 내고 시민으로서 최소한 의무를 수행하는 이들의 자발적 선택이니 말이다. 냉가슴만 앓을 수밖에. 이런 사토리 세대는 한중일 동북아 3국에서 동시에 확산하는 중이다.
영화 속 나와 시즈오는 그렇게 만나서 생활비 절감을 위해 2층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다. 나는 서점에서 적당히 일할 뿐이고, 시즈오는 실업 상태다. 시즈오는 일자리를 찾아 구직센터를 오가는 등 백수 상태로 머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등바등 불안해하진 않는다. 사치코 역시 조용히 일하는 것 같지만, 훌쩍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인다.
'술 먹고 노는 게 무슨 잘못이냐'는 그녀의 일갈은 자신들이 속한 세대의 가치관을 선포하는 선언문과 다름없다. 근면과 성실을 덕목으로 삼는 기성세대가 보면 혀를 끌끌 찰 테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처음엔 한심해 보이던 그들이 점점 선량한 시민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남 안 괴롭히고 참견하지 않고 즐겁게 살지 않는가.
그해 여름, 청춘의 사진첩 같은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스틸
디오시네마
그와 반비례하듯 영화 속 기성세대의 허실이 조금씩 엿보이기 시작한다. 낳아줬다는 것만으로 당장 본인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자식에게 경제적 원조를 종용하거나, 지위와 능력을 미끼로 관계를 유혹하는 상급자의 초상은 처음엔 대책 없이 그날만 사는 것 같던 청년세대의 밉지 않은 선량함과 대비되며 그렇게 '라떼는 말이야'를 부르짖는 기성세대의 민낯을 슬그머니 폭로한다. 물론 그런 격렬한 세대간 갈등은 본 작품의 본령은 아니다.
대신에 감독은 원작 소설이 그려냈던 것처럼, 억눌린 조건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불사르지 않고 묵묵히, 하지만 젊음의 특권인 분출하는 에너지로 생동하는 청춘 군상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달리 크게 특별한 사건도 주인공들의 운명을 확 헤집어놓을 반전도 딱히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점점 그들의 운명이 다른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음을, 마치 때로는 가족처럼, 때로는 소꿉친구처럼 위화감 일도 없이 어울리던 세 남녀의 관계가 영속될 수 없음을 깨닫고 만다. 인물들의 독백처럼 하코타테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북륙의 겨울은 길고도 춥다.
소설가 사토 야스시의 원작에선 1970년대 도쿄 배경이던 것이 영화에선 2010년대 하코타테로 옮겨졌다. 공중전화기가 아이폰으로 변한 셈이다. 하지만 그런 세세한 배경 변화는 원작의 정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본 작품 외에도 <오버 더 펜스>, <카이탄시 풍경> 등 일본의 여러 명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을 남긴 원작자는 하코타테 출신으로 이른 죽음을 맞았기에,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헌정의 성격도 갖는다. 작가가 원작을 집필하던 당시가 갓 서른에 들어설 때, 미야케 쇼 감독이 연출을 맡았을 때도 동년배, 주요 배우들의 나이대도 약간 아래라는 점 역시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형태로 '재현'에 집중하려 한 방법론의 일환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중 가장 평이하고 전형적인 이야기다. 특정한 집단으로 묶이지 않는 개성 강한 개인들을 영화의 중심으로 세우던 감독의 작업 중에는 가장 보편적인 세대-집단을 주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으로 가장 감정을 이입해가며 편하게 볼 수 있는 작업, 거기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 해석할 여지도 높은 작업이란 뜻이다. 보고 있노라면 그저 세 주인공의 곁에서 힐끔 엿보다 으쓱 제 할 일 하는 옆자리 손님이 된 기분이다. 그런 감각으로 보다 보면 어느 틈에 공감과 연민으로 빠져드는 마성의 영화가 개봉 5년 만에 극장으로 돌아왔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포스터디오시네마
[작품정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きみの鳥はうたえる
And Your Bird Can Sing
2018|일본|청춘 스케치
2025.04.16. (재)개봉|106분|15세 관람가
감독 미야케 쇼
주연 에모토 타스쿠 & 이시바시 시즈카 & 소메타니 쇼타
원작 사토 야스시 - 소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수입/배급 디오시네마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남우주연상(에모토 타스쿠)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남우주연상(에모토 타스쿠)
일본 영화비평가대상 여우주연상(이시바시 시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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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영끌 코인? 주식 열풍? 그런 거 손도 안 대는 청춘들이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