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끝, 새로운 시작> 스틸컷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03.
시시각각 변하며 상황을 옥죄어 오는 사건의 연속에서 영화의 중심에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가장 중요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들 중 하나가 자의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생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처음에서 태어났던 갓난아이 '젭'.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의 돌봄이 필요하고, 그 역할은 자연스럽게 엄마인 여성이 짊어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여성은 어떻게든 생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를 안전하게 키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미션과도 같다.
"당신과 젭을 지킬 자신이 없어. 당신을 실망 시킬거야."
남편이 보여주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 사실은 더 자명해진다. 충격적인 사고를 눈앞에서 경험하기는 했지만, 그는 보호소에 자리가 없어 양육자 가운데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규칙을 앞세워 아내와 아들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온다. 이어져 왔던 바로 직전의 장면에서도 역시, 그는 지금 자신이 지금 지켜내야 하는 것보다 상실한 것에 더 기울어져 있다. 냉정하고 가혹한 요구일지는 모르겠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엄마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그 순간에도, 앞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에게도 분명 포기하고 싶고 어려운 순간들이 있지만, 품속에 안긴 아들 '젭'이 계속해서 나아가게 만든다.
04.
그런 인물이 비단 여자만은 아니다. 쉘터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며 코뮌으로 함께 떠나게 되는 또 다른 여성(캐서린 워터스턴 분) 또한 이 세상 속에서 딸을 지켜내고자 하는 인물이다. 코뮌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남성(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또한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가족과 그들이 남아있을 도시로 다시 향하고자 하는 굳은 심지를 보여준다. 서로 다른 모양으로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지금의 작은 희망을, 어쩌면 다음 세대의 가능성을 놓지 않기 위해 버티고 돌보고자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곳곳에 작은 여유와 행복을 배치해 둔다. 아직 쉘터에 머무를 때 두 여자가 보냈던 기쁨의 순간과 코뮌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만난 낯선 남성과 함께 보낸 격려와 응원의 시간, 그리고 잠깐이지만 코뮌에서 느낀 안온함까지 모두가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성의 가장 큰 가치는 유대와 연대와 같은 이타성에 존재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인간이기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홀로 스스로를 돌보는 일보다 함께 고통을 나누며 나아가는 길 위에서 잃어버린 가치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 이타성이라는 것이 다소 제한적이고 파편적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생명마저 위협받는 시절에 타인을 돕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어떤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열어낼 수 있는 힘이다.
▲영화 <끝, 새로운 시작> 스틸컷㈜스튜디오 디에이치엘
05.
"다들 아픔을 잊고 싶어 했거든요. 난 지난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요."
어렵게 도착한 코뮌을 다시 떠나기 전에, 여자가 홀로 바다에 뛰어들어 그동안 토해내지 못한 묵은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이 놓인다. 여기에서 카메라 앵글은 수면 레벨과 거의 동일한 위치에서 물에 잠길 듯한 느낌으로 그의 모습을 담아낸다. 내게는 이 장면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앵글과 거의 유사하게 읽히며 하나의 이야기를 여닫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대홍수로 시작된 길고 긴 고난의 시간이 여기 바다 안에서 갈무리되는. 자연의 위력에 떠밀렸다가 다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이야기로 말이다. 물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마지막 이야기가 더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 <끝, 새로운 시작>의 끝에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잃기 쉬운 메시지 하나가 존재한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주저앉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하고, 또 내일이 무너질 것처럼 힘겹더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다음을 도모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사람이니까 누구나 흔들릴 수 있다. 희망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스크린 바깥의 세상에서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가닿을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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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