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씨네만세'가 1000회를 맞았다. <오마이뉴스>에 처음 기고한 지 12년만이다. 중이병 한창이던 어린 시절, 글에 삶을 걸겠다고 결심했을 적에는 돈을 받고 글을 파는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값을 받고 글을 팔았을 때에는 고정 연재처가 생기기만 고대했다. 두어 개 잡지에 연재물을 싣게 된 뒤로는 온라인 매체에도 글을 싣기를 갈망했다. 그러다 이 매체에서 이름 건 시리즈를 내기 시작한 뒤로는 가장 많은 연재물을 써보겠다 마음먹었다. 그렇게 1000회째를 써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 중에 이보다 많은 글을 내어놓은 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목표는 그저 달성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목표를 실현한 뒤 그 너머의 이상을 갈망하는 존재다. 인간이 천국에 도달한다면 그 순간 천국은 천국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나는 가장 긴 시리즈 너머의 목표를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꿈꾸기로 한다. 모두가 죽어버렸다고, 더는 읽는 이도 없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평론의 가치를 끝끝내 지켜내는 글을 써나가려 한다.

1000회째를 맞아 어떤 영화를 이야기할지 고민하였다. 이제는 제법 독자가 생기고 영화계 안팎에서 반응이 오는 이 연재물의 자릿수가 바뀌는 날을 그저 아무렇게나 지나치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다.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곧장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다.

엘제아르 부피에, 그를 기억하는 이유

 <나무를 심은 사람> 스틸컷
<나무를 심은 사람> 스틸컷프레데릭 백

엘제아르 부피에, 나는 그 이름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선명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 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처음 보았었다. 이제는 이름도 흐릿한 교사가 그 영화를 반 아이들에게 보도록 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 지금껏 십수 번은 보았을 애니메이션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더없이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다. 장 지오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그를 감명 깊게 읽은 전설적 애니메이터 프레데릭 백이 5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했다. 30분 분량의 중단편 애니는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른다.

때는 1913년, 주인공은 젊은 여행자다. 황폐한 산 중턱, 사는 이 없이 버려진 마을을 주인공이 헤맨다. 물을 찾지 못해 고생하던 그가 저 멀리 검은 형체를 발견한다. 가까이 가보니 50쯤 먹은 나이든 사내다. 그는 과묵한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다. 엘제아르가 건넨 물로 목을 축이고 그 집에까지 따라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주인공이다. 그는 이 집에 하루를 더 머물며 엘제아르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 사연을 듣는다.

산 아랫마을에서 평범한 농부였던 엘제아르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잃고 재산을 정리하여 지금 살고 있는 산간 마을로 옮겨왔다고 했다. 이곳에서 양치기 개 한 마리와 양들 서른 마리 정도를 기르며 3년을 살았다. 엘제아르는 양을 치는 것보다도 다른 일에 열심인 듯 보인다. 매일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선 상태가 좋은 도토리 백 개를 추려 열 개씩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다음날 산 위로 올라가선 도토리를 땅에 심는다. 매일 100개씩, 3년을 그렇게 심었다 했다. 3년 동안 그렇게 심은 것이 모두 10만 개가 되었고, 그중 삼분의 일쯤은 싹을 틔워 참나무가 될 거라 했다. 엘제아르는 참나무뿐 아니라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도 심었거나 심을 계획이 있다 하였다.

제 것이 아닌 땅에 나무를 심는 노인

이 산이 당신의 것이냐 묻는 주인공에게 엘제아르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런 건 엘제아르의 관심이 아니다. 엘제아르는 매일을 똑같이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는다. 산이 비고 물이 없는 것이 나무가 없어서라며 나무를 심고 또 심다 보면 언젠가는 수십만 그루가 자라는 숲이 되라고 말한다.

엘제아르와 만난 뒤 제가 사는 곳으로 돌아온 주인공이다. 이듬해 발발한 전쟁은 1919년이 되어서야 끝을 본다. 그 5년 동안 주인공은 참전하여 엘제아르며 숲 같은 것을 돌아볼 여력 따위가 없었다. 그리고 종전이 된 뒤에야 엘제아르를 만났던 곳을 찾는다. 산간마을까지는 여전히 황폐해 전과 같은 풍경이지만, 그 너머의 땅은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수많은 나무가 가지를 뻗고 일찌감치 심은 것은 주인공이며 엘제아르의 키보다 더 커져 있기까지 하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엘제아르 부피에, 한 사람의 노인이 일으킨 믿기지 않는 변화를 그를 오래 지켜봐 온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한다. 마치 대자연의 섭리이며 기적처럼 오해되는 변화가 사실은 엘제아르의 노력으로 이뤄졌단 게 새삼스럽다. 하나하나 상태 좋은 도토리를 고르는 것부터, 산에 올라 씨앗을 하나씩 심고 또 심는 반복적인 노동, 수확에 대한 기대 없이 씨앗을 심는 마음가짐에 이르기까지 경이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일상적 수고로움을 이 애니가 포착해 그려낸다.

홀로 숲을 만든 노인이 바란 것

 <나무를 심은 사람> 스틸컷
<나무를 심은 사람> 스틸컷프레데릭 백

어느 순간 폐허였던 산간지대가 나무 울창하고 물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 된다. 사냥꾼과 산림관리인, 전문가들과 장관, 국회의원들까지 찾아오지만 이 산이 변한 이유를 진정으로 아는 것은 엘제아르와 주인공뿐이다. 시간이 흘러 2차대전이 끝나고까지 살아남은 이 숲의 비밀을 주인공은 오직 한 명, 제 친구에게만 비밀스레 털어놓는다.

친구는 숲이 계속 지켜지는 데 남몰래 도움을 줄 뿐, 다른 무엇도 하지 않는다. 필요한 건 노인이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 커다란 변화 가운데서 끊임없는 어느 인간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그들밖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수고 위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마음을 이루고 생명을 이루며 문화를 이룬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 자체가 엘제아르 부피에의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파스텔로 그린 원화만 2만여 장, 이를 어시스트 1명을 두고 대부분 홀로 작업했다고 전한다. 반투명 종이를 화학약품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성물질에 반복 노출된 작가 프레데릭 백은 마침내 한쪽 눈을 실명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안시페스티발 그랑프리와 오스카의 주인이 되었다. 애니로 쌓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그러나 그에겐 그것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은 듯하다. 백은 계속하여 저만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씨네만세' 1000회에 이 영화를 말하는 이유

 <나무를 심은 사람> 스틸컷
<나무를 심은 사람> 스틸컷프레데릭 백

수많은 사람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유명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스타일의 이미지를 생성하길 즐긴다. 주변의 작가들 가운데 적잖은 이들이, 각별히 내가 존중하는 탁월한 이들이,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서 역겹다고 말하는 모습을 듣는다. 소리 내어 말한 적 없어도, 나 또한 무엇을 향하는지 모를 혐오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낀다. 수고로움과 창작에의 고통 끝에 겨우 피워냈을 무엇이 존중 없이 빚어지고 버려지는 무엇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견디기가 어려운 탓일 테다. 오늘은 애니메이션이, 내일은 글이, 또 그다음은 다른 무엇이 같은 처지가 될 게 분명하다. 그때가 되면 인간의 창작이란 무가치해지는 것일까.

<나무를 심은 인간>은 그럼에도 의미가 있으리라 다잡게 한다. 폐허가 된 땅에서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노인은 제가 하는 일이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한 적 없었다. 그는 제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았고, 그것을 저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매일 일어나 그 일을 해내었다.

세상엔 수확에 대한 기대 없이 씨를 뿌리는 농부가 있다. 승리에 대한 기대 없이 전장에 나서는 군인 또한 있다. 호응에 대한 기대 없이 곡을 쓰는 악사도 있다. 인간의 역량이 갈수록 하찮은 무엇쯤으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나는 예술, 그리고 작가가 견지해야 할 자세가 어쩌면 이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써낸 씨네만세 1000편의 평이 비옥하게 한 토양이 있다. 다음 써낼 1000편의 평은 그보다도 나을 것이라 믿는다. 내가 거듭 쓰는 이유는 오로지 이뿐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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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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