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스틸컷영화 <승부> 스틸컷
영화 <승부> 스틸컷
조훈현의 집이 붕괴될 때
응씨배에서 중국의 섭위평 9단을 상대로 거둔 극적인 우승을 대표로 하여 조훈현(이병헌)은 각종 세계대회, 국내대회를 석권했다. 집을 가장 잘 짓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두 주인공이 생활이 그려지는 배경으로 역할이기도 하지만 영화상에서 '집'이 있는 사람은 조훈현밖에 없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관리가 잘 된 안정적인 단독주택이 조훈현의 집이다. 반면 이창호(유아인)는 집이 없다. 조훈현의 내제자가 되어 그의 집에 머물기 전, 고향인 전주에서 등장하는 장소도 집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시계방이다.
그러나 이창호의 성장은 조훈현의 집을 변화시킨다. 최고위전을 시작으로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에게 타이틀을 하나하나 뺏긴다. '유리한 바둑이 이기기 어렵다'라는 본인의 말처럼, 집주인이라는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은 대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눈치를 보게 만든다. 집이 안락한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고 굳건했던 집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답이 없는 바둑에서 정답을 강요한 탓이다.
조훈현은 이창호와의 첫 만남에서 사활을 던져준다. 문제를 풀면 한 번 더 승부를 겨뤄주겠다는 조건이다. 하지만 이창호가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뿐, 옆에서 말했듯 그 사활은 답이 없는 문제였다. 제자로 받아들인 이창호의 기풍도 이해할 수 없어서 조훈현은 자신의 방식을 밀어붙인다. '바둑의 신과 붙어도 지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시절이니 공격하고 몰아붙이는 그의 스타일이 정답이라고 자신도 믿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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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의 집이 붕괴되는 것과 반대로 이창호는 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창호는 스승의 매서운 질책에도 돌부처처럼 꿋꿋하게 자기만의 바둑 스타일을 정립해 간다. 90% 확률로 10집 차이의 대승을 거두는 것보다 100% 확률로 반집 승을 따내는 길.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절대 지지 않는 바둑이 이창호가 지은 집이다. 방황 끝에 찾아낸 이 길로 이창호는 스승을 꺾고 결국 독립해서 조훈현의 집을 떠난다.
<승부>가 재미있는 지점은 이창호가 집을 짓고 떠나는 게 아니라 조훈현이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에 있다. 폭삭 주저앉은 폐허에서 시선을 떼고 도망치고 싶은 자신을 붙잡는다. 대국 한 번에 4갑씩 피우던 담배도 끊는다. '신산'이라 불리던 이창호의 계산을 막기 위해 '제비'처럼 가볍고 빠른 행마에서 벗어나 '전신'처럼 여기저기서 전투를 벌이는 기풍으로 변화한다. 도전자의 자세로 끊임없이 제자에게 덤벼든 끝에 결국 이창호의 세계대회 전관왕을 막는다. 16번째 대결만의 승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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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칸의 바둑은 지더라도
누가 뭐라고 해도 현재 최고의 바둑기사는 알파고다. 입신의 경지라는 프로 9단이 호선을 두지 못하고 석 점은 깔고 둬야 대등하게 맞붙는 실력이 된다. 당연히 알파고는 프로 선수들에게도 선생님이다. 대국장에 몰래 스마트폰을 반입해서 알파고를 실행하는 치팅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모두 알파고처럼 두기를 원하지만, 알파고의 정신까지 닮으려는 기사는 없다. 알파고의 한 수에 열광하는 바둑 팬도 없다.
알파고의 승부에는 이유가 없다. 모든 프로기사가 이해하지 못한 수를 두고 나서도 그 이유에 대해 일언반구 설명이 없다. 이세돌 9단이 가장 힘들어한 것도 패배의 충격이 아닌 설명의 부재였다고 한다. 이것이 인공지능의 발전 방향이라면 심히 우려스럽다. 인간 사회는 게임이 아니다. 인간은 확률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가장 효율적인 결과물이 무엇인가 만큼 중요한 것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바둑은 가로 19, 세로 19. 361칸 안에서 승부를 본다. 도리 없이 365일 이어지는 삶과 비슷하다. 같은 바둑이 단 한 번도 진행되지 않듯 매일 똑같은 하루도 없다. 자기만의 집을 짓는 일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일이라면 아직은 알파고보다 인간이 낫다. 바둑에서 질 수 있어도 하루를 살아내는 이야기는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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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이창호의 집 짓기, 아직은 알파고보다 인간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