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서얼 혹은 서자의 비애를 가장 뼈저리게 겪은 군주는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이다. 첩의 자녀에 대한 차별은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본격화된 것은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 이후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가장 뼈저리게 체험한 조선시대 임금은 우리 역사 전체에서 이 문제를 가장 많이 겪은 군주가 된다.

1552년생인 선조는 1567년에 임금이 됐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5월 23일(음4.13)까지도 세자를 책봉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그는 정실부인에게서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는 전쟁 발발 보름 뒤인 6월 8일, 후궁의 아들 중에서 가장 유능한 광해군을 후계자로 세웠다.

세자가 된 17세의 광해군은 아버지를 대신해 미니 정부인 분조(分朝)를 이끌며 전쟁 중의 국정을 무난히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아버지가 54세 때인 1606년에 태어난 적장자 영창대군은 그를 한층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적들은 어린 영창대군을 앞세워 광해군을 흔들었고, 이로 인해 그는 31세나 차이 나는 아들 같은 동생과 경쟁해야 했다.

일곱 서얼의 기대감

 MBN 퓨전사극 <허식당>
MBN 퓨전사극 <허식당>MBN

그런 설움을 겪다가 1608년에 즉위한 광해군에게 조선의 서얼들은 기대감을 품었다. MBN 플러스 퓨전사극 <허식당>에 등장하는 일곱 서얼도 그중 일부였다.

지난달 31일 방영된 제3회 초반부는 서얼들이 정자에서 술자리를 갖는 한밤중의 장면을 비춰준다.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온 허균(시우민 분)은 맥 빠진 모습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서얼들에게 "이보게들, 더 이상 술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그만두게"라고 충고한다.

정자에 올라서자마자 다짜고짜 충고부터 하는 허균을 향해 서얼들은 "교산, 아무것도 못 하는 비루한 서자들 인생에 이 술마저 거두어가면 긴 세월을 어찌 견디라는 겐가?"라고 반발한다. 그러자 허균은 자리에 앉으며 "오늘 전하께오서 자네들이 올린 상소에 호의를 보내셨네"라며 "서자들의 관직을 허하여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실 모양이야"라고 말한다. 갑작스러운 낭보에 서얼들은 그게 정말이냐며 활력을 보인다.

이 장면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보이는 광해군 때의 일곱 서얼, 박응서·박치의·박치인·서양갑·심우영·이경준·허홍인은 사실 상류층 자제였다. 음력으로 광해군 5년 4월 25일 자(양력 1613.6.13.) <광해군일기>는 이들이 "모두 다 명문가의 혈족"이라며 박응서는 전 정승 박순의 아들이고, 서양갑은 전 목사 서익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의 상류층 서얼은 지금의 재벌집 서얼보다 위상이 높았다. 지금처럼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분리시키지 않고 정경 일치를 추구한 시대였기에, 박응서 등의 위상은 재벌가문 자제와 고위 공직자 자제를 합친 것에 상응했다. 그처럼 주목받는 위치에 있어 이들의 결혼이나 과거 응시 혹은 승진 등에 대한 차별은 조선시대 내내 주목을 끌었다.

기득권층의 이해관계

 MBN 퓨전사극 <허식당>
MBN 퓨전사극 <허식당>MBN

다만, 이 차별에는 기득권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양반 지주 가문의 적자들은 서얼을 제쳐놓은 상태에서 결혼·과거시험·관직 등을 놓고 경쟁했다. 서얼 형제들까지 가세하면 그들은 더욱 험난한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양반 지주 가문의 남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 노비를 첩으로 들였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다. 이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적자끼리 경쟁하는 데 익숙한 기득권층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 문제는 왕조의 정통성과도 관련됐다. 제3대 주상인 태종 이방원은 이복동생인 세자 이방석을 죽이고 이방석의 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를 격하시켰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강씨를 첩으로 폄하하고 이방석을 첩의 아들로 깎아내렸다. 이를 통해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한 이방원과 그의 직계 자손들이 건국 8년 뒤인 1400년부터 왕권을 독점했다.

이 같은 정치적 맥락이 있어 차별을 철폐하라는 서얼의 요구는 양반 지주 가문들뿐 아니라 왕실의 정통성도 위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얼 문제는 두고두고 논란이 되면서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서얼의 비애를 온몸으로 다 받은 광해군이 1608년에 임금이 됐다. 광해군은 서얼들의 희망으로 떠올랐고, 박응서 등은 허통을 촉구하는 상소를 제출했다. 그러나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광해군에게서는 그들을 만족시킬 만한 응답이 나오지 않았다.

광해군은 서얼의 비애를 누구보다 절감했지만, 그의 재위기 초반에는 이 문제를 쉽게 다루기 힘들었다. 갓 태어난 적자와 경쟁하다가 어렵사리 임금이 됐다. 그 경쟁은 임금이 된 뒤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서얼문제 개혁은 정치적 부담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공감대를 얻고 명분을 구축하기에 앞서, 동기부터 의심받을 만한 일이었다.

서얼의 비애

  MBN 플러스 <허식당> 중 한 장면
MBN 플러스 <허식당> 중 한 장면 MBN

믿었던 광해군에게 발등이 찍힌 일곱 서얼은 1613년에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을 무대로 조직을 결성한다. 그런 뒤 소금상인이나 나무꾼 등으로 위장하고 금품 강탈 등을 저지른다. 충북과 경북을 잇는 조령(새재) 고개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는 사건도 벌인다. 그러다가 포도청에 의해 일망타진돼 감옥에 갇히는 '칠서의 옥(獄)' 혹은 '칠서지옥'의 주인공들로 세상에 알려진다.

엉뚱하게도 광해군 정권은 이 사건을 공안사건으로 비화시켰다. 정권 실력자 이이첨은 일반 형사사건인 이 문제를 역모사건으로 조작해 '서얼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사건을 키웠다.

광해군의 여당이자 북인당의 분파인 대북당은 이 사건을 지렛대 삼아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다수 세력인 서인당을 대거 숙청했다. 영창대군은 서민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보냈다. 계축년인 1613년에 발생해 대북당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활용된 이 사건은 계축옥사로 불린다. 영창대군은 이듬해에 목숨을 잃었다.

계축옥사의 빌미가 된 칠서의 옥은 서얼 차별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다. 광해군 정권은 이런 사안을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서자 광해군을 강화하는 데 활용했다. 서얼 문제를 이렇게 왜곡시킨 것은 서얼 차별에 대한 광해군 정권의 개혁 의지가 취약했음을 보여준다.

칠서 중 1인인 서양갑의 형이자 그 집안 적자인 서용갑이 의금부로 보이는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내용이 광해군 5년 5월 3일자(1613.6.20.) <광해군일기>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공부 열심히 해서 과거에 응시하라는 이복형 서용갑의 충고에 대해 서양갑은 공부는 해서 뭐하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서양갑은 과거시험 소과에 급제해도 성균관에 입학하기 힘들고 대과에 급제해도 해미현감 밖에 되지 못할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부·목·군·현의 2급인 목사를 지낸 아버지 서익과 달리 자신은 잘해봤자 충청도 서산의 해미현감밖에 못 될 것이라며 공부를 게을리했다.

서용갑의 진술에서 나타나듯이 광해군 시대에도 서얼들의 과거 응시는 가능했다. 다만, 지방 수령이 된다 해도 작은 고을을 전전하기 쉬웠다. 서용갑을 비롯한 칠서들이 희망한 것은 그 이상의 대우였다.

역설적이게도, 서얼문제는 서얼 임금을 몰아낸 인조 정권에 의해 훨씬 더 개선됐다.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 정권은 쿠데타 2년 뒤인 1625년에 서얼 출신이 호조·형조·공조의 정랑(정5품)이나 좌랑(정6품) 등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허통사목을 시행했다. 서얼 차별로 인한 논란과 개혁 조치는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특권층 자제들의 문제라 정치적 주목은 쉽게 받지만 대중적 호응이 따르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못했다.
허식당 서얼 서자 얼자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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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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