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플레이
라이브네이션코리아
4개월 동안 어디에도 말 못 할 스트레스와 불안을 품고 살았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들어도 마음 한편에는 늘 응어리가 있었다. 12월 3일 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입에서 비상계엄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쭉 그랬다.
장난이 아니었다. 확신에 찬 대통령의 눈빛과 목소리에 공포를 느꼈다. 얼마 후 무장한 군인이 국회의사당에 들이닥치는 모습을 TV 중계로 지켜보았다. 국회에서 일하는 친구는 군 헬기와 계엄군이 국회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국회에서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포고령의 내용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 집회와 시위 등을 금지한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48시간 내에 복귀하지 않는 전공의는 처단한다" 등... 이 중 그 무엇도 2024년 대한민국과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여야 대표, 국회의장, 법조인 등이 모두 체포 대상에 올랐다는 것은 이후에 알게 되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도 머리를 스쳐 갔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이 'Martial Law(계엄령)'가 두려워서 내한 공연을 취소하면 어떡하지? "공연은 포고령에서 금지하는 집회에 해당이 되나?" "이런 나라에서 내가 만드는 말과 글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그리고 모욕감에 분노했다. 수많은 시민이 죽고 다친 후에야 쟁취한 87 체제. 그 이후 우리에게 공유되는 믿음이 있다. 그것은 어떤 대통령도 헌법 위에 설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하룻밤에 산산조각 났다.
물론 믿음의 조각을 다시 맞춘 것도 사람의 몫이었다. 시민들은 용맹하게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갔다. 국회는 덕분에 빠르게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었다. 현장에 투입된 군인들은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이날의 공포를 다시 느끼게 될까 두려웠다. 대통령의 구속이 취소된 날, 서부지법 습격 사태가 벌어진 날, 그리고 부정 선거론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 두려움은 더 커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수화된 자신을 발견한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중요하다 믿으면서도 제도권에서의 해결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나조차도 몇 차례씩 광장에 나갔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시민들 속에서 공포심을 누그러뜨리고 싶어서였다. 민중가요 대신 '다시 만난 세계', '삐딱하게', '위플래쉬' 등 케이팝 음악, 그리고 응원봉이 광장을 채웠다. 언뜻 보기엔 페스티벌과 다름없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포와 무력감을 실체가 있는 에너지로 바꾸어내고 있었다.
공포의 시대를 끝내며 듣는 "인생 만세"
▲콜드플레이의 정규 앨범워너뮤직코리아
세간의 걱정이 무색하게, 헌법재판소는 보수와 진보의 논리가 아니라 법리에 충실했다. 국회에 관용과 자제를 주문하며 경종을 울리는 한편, 대통령을 향해 "그럼에도 국회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됐다"고 단호하게 질책했다.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며 시민들에게 경의를 보낼 때는 감탄했다. 그리고 "피청구인은 나라를 위해 봉사해 온 군인들이 일반 시민들과 대치하도록 만들었다"라는 대목에서는 예비역 병장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 한구석이 시큰했다.
헌법재판소의 명쾌한 선고문은 지난 4개월간 이어져 온 공포를 20여 분 만에 치유해 주었다. 공포의 시간이 끝났지만 후유증은 오래 갈 것이다. 계엄을 지지하는 사람과 계엄을 반대하는 사람의 세계관은 극명하게 달라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정도다. 어느 때보다 사회에 불신이 만연해졌다. 성장통은 크겠으나, 그럼에도 다음 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12월 3일 밤 이후, 관심도 없던 헌법 조항들을 공부하게 되었다. 문형배, 정형식, 이미선, 김복형, 김형두, 정계선, 정정미... 아직 멤버 이름 전원을 다 외운 4세대 보이 그룹도 없는데 헌법재판관들의 이름을 먼저 외우게 되었다. 이제는 다른 일에 더 관심을 쏟을 여유가 생겼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파면이 확정된 직후, 어떤 노래를 들을까 고민했다. 재미없고 뻔한 선택지겠지만,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를 다시 들었다. 콜드플레이가 2008년 발표한 정규 4집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의 대표곡이다. 스페인어로 '인생 만세'를 뜻하는 이 곡은 21세기 가장 성공한 밴드의 곡이다.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올랐고, 2009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노래상'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떼창'을 상징하는 곡 중 첫 번째로 손꼽힌다.
이 곡은 혁명으로 인해 몰락한 왕의 시점에서 쓰여진 곡이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10세가 1830년 7월 혁명으로 인해 실각한 것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이 콜드플레이의 설명이다. "나의 성은 소금과 모래 기둥 위에 서 있었다", "열쇠를 쥐고 있었으나 이제는 방에 갇혀 있다"는 등, '권불십년'을 체감한 쓸쓸함이 잘 그려진 가사가 압권이다. 이 노래를 상징하는 힘차고 밝은 스트링 사운드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들릴 정도다.
공전의 히트곡이지만 'Viva La Vida'를 자주 꺼내 듣지는 않는다. 많이 들어도 너무 많이 들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입장곡으로 울려 퍼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러나 4월 4일에는 달랐다. 한없이 익숙한 이 노래가 유독 달게 느껴졌다. 이 노래에서 쉬지 않고 북을 치는 드러머 윌 챔피언은 "힘든 상황과 공포가 있어도 삶을 껴안고 나아가라는 것"이 이 곡의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왕의 입장에서 보아도, 시민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럴듯한 이야기다.
한편 콜드플레이는 이번 달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여섯 차례의 내한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2017년 내한 공연 당시에는 대한민국에 대통령이 없었다. 물론 올해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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