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손으로>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반성문을 쓰는 두 사람의 모습이 엇갈리는 마음을 한 공간 안에 담아낸 장면이라면,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안찬의 러브레터를 덕우가 대신 써 주는 장면에는 쫓고 쫓기는 두 마음이 표현되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정적인 상태의 감정적 생동이다. 특히, 지혜를 향한 마음을 불러주는 안찬의 문구 그대로를 편지지 위에 옮겨쓰는 덕우의 마음이 훨씬 더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다른 모든 구절을 똑같이 써 내려가던 그가 '이런 내 마음, 너는 모르겠지?'라는 마지막 문구에 이르러 문장 하나를 숨기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고자 하는 은밀한 행위에 해당한다.
"너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 모르는 게 있으면 따뜻하게 알려주고. 너가 나를 바라볼 때면 내 마음이 반짝이는 것 같아. 너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아무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많이 좋아해. 진심이야. 이런 내 마음 너는 모르겠지?"
그러니까, 안찬이 불러주고 덕우가 옮겨쓰며 지혜가 받게 될 이 러브레터의 내용에는 방향은 다르지만 비슷한 마음일 두 사람의 감정이 함께 묻어있게 되는 것이다. '정말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마음은 누구의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04.
이 작품에서 두 인물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치는 신과 대사만이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을 담아내는 카메라가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로 그 마음을 포착해 표현해내고자 한다. 쇼트를 잘라보면, 덕우와 안찬이 한 프레임 속에 홀로 남는 장면이 각각 몇 차례씩 등장한다. 덕우가 남는 장면은 그래도 여러 번 있다. 처음 안찬이 지혜를 만나는 장면에서 자전거를 타던 지점, 안찬이 반성문을 제출하러 교실을 떠나고 난 뒤에 혼자 남게 되던 순간, 고백 멘트를 연습하는 안찬의 모습 너머에서 앵글 속에 혼자 담길 때. 그리고 마지막 장면 등이다.
하지만 안찬이 프레임 속에 단독으로 남게 되는 장면은 단 세 번 뿐이다. 처음 지혜를 기다리던 순간에, 반성문을 먼저 제출한 덕우가 교실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교실 문 너머로 그의 모습이 보이게 되는 지점. 그리고 덕우가 대필해 준 편지를 확인하는 장면. 이 세 장면의 공통점은 모두가 덕우의 시선 안에서 그려진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던 두 인물의 서로 다른 마음과 입장이 이 차이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안찬을 바라보던 덕우와 그런 그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지혜)을 마음에 두고 있는 안찬이다. 두 사람 모두 어떤 의도를 갖고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듯이, 감각이 잠식되고 난 이후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대상만을 생각하고 쫓게 된다. 카메라의 위치가 꼭 그렇다.
▲영화 <손으로>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축적되는 감정은 언젠가 터지고 만다. 작은 형태를 하고 있던 존재가 번지며 우리의 신체를 잠식했듯이, 다시 응축된 마음은 질긴 세포막을 뚫고 나오는 순간 어떤 행위로 표현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놓이는 덕우의 행동, 안찬의 펜을 입안에 넣고 느끼는 모습이 꼭 그렇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순수한 맥락으로 영화를 따라오던 관객들에게 다소 거칠게 느껴질 법한 작법이지만,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욕구는 더 선명하게 표현되는 방식이다. 이 장면 하나에서 아직 채 여물지 못한 감정을 어찌할 줄 모르는 인물과 프레임의 두께만큼 쌓여온 응축된 감정의 힘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영화 <손으로>에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순수하고 조심스럽다가도 어느샌가 거세게 휘몰아치며 타인에게로 이끌리는 감정에 대한 관찰. 상대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까지 싹을 틔우고, 혼자서 꺾어내고자 해도 더 크게 번지는 이 감정만큼 억세고 질긴 존재가 또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덕우의 마지막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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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