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78번째 식목일이다. 식목일만큼 한국의 기적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날이 없다. 왜 아닐까. 나무 하나 없었던 한국이라 했다. 전국 방방곡곡이 민둥산으로, 수령이 제법 있는 나무는 국가 소유로 민간인이 드나들 수 없는 숲이나 민가를 찾기 어려운 깊은 산골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했다. 연료라 할 것이 땔나무뿐이고 팔만한 것도 베어온 나무뿐이던 가난한 시절, 이승만 정권은 건국과 함께 식목일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하여 전국적인 조림사업에 돌입한다.
추위에 강하고 토질을 덜 타며 빠르게 자라는 데다 버섯 등을 키우기에도 좋은 소나무는 한국의 조림사업에서 단연 수혜를 입었다. 고려 때부터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라 불리며 대중적 호감까지 있으니 소나무를 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큰 수요에 맞게 묘목사업도 소나무 위주로 짜여 지난 70여 년 동안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전국 숲이 푸르게 뒤덮였고, 한국의 울창한 삼림은 세계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자랑이 되었다.
그러나 올해 식목일만큼은 기쁘고 자랑스럽게 맞이할 수가 없다. 경북 의성군에서 발생해 안동, 청송, 영양, 영덕 등 5개 시·군을 태운 산불이 발화 6일, 149시간 만에 극적으로 진화됐다. 서울시 면적 75%에 달하는 삼림이 영향권에 들었다. 이번 화재로 사망자만 30명, 중경상자는 45명이 파악됐다. 불길에 휩싸인 민가와 기업체는 물론, 동식물 또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불교유적인 고운사와 운람사, 만세루가 전소되는 등 문화유적 피해 또한 상당했다. 보물 2건 포함 국가유산 27건이 소실됐다. 한국 정부수립 이래 최악의 화재참사로 기록될 만하다.
총체적 부실, 예고된 참사였다고
▲온리 더 브레이브스틸컷
코리아스크린
이번 대규모 산불을 예고된 참사라 보는 시각이 많다. 산림청 산불발생현황에 따르면 2020년대 산불발생 건수와 면적이 과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한 상태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5년간 불탄 면적만 해도 6721ha(헥타르)로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40여 년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이번 피해면적을 포함하면 근 5년간 산불피해가 건국 이후 2019년까지 발생한 피해면적을 훌쩍 넘어선다.
기후위기로 인해 대규모 산불이 발생할 위협이 크다는 보고는 세계 각지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대표적 피해지역인 러시아와 호주, 미국 등지에선 한 해가 멀다하고 국토 상당 부분이 불타는 대규모 산불피해가 이어진다. 한국의 상황이 결코 이례적이며 일회적 사건이 아닌 이유다. 역대급 산불이 아닌, 향후 거듭될 대규모 참사의 시발점일 가능성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뿐인가. 식목일, 지난 세월 그토록 열심히 심은 소나무가 대형 산불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숱하게 지적된다.
위기에 대응하는 공공체계의 총체적 허점이 드러났단 시각도 적지 않다. 산림소방의 기본은 번지는 불길을 막는 것이다. 도시에서와 달리 소화기나 소화액, 물을 구하기 어려운 삼림에서의 진화작업 특성상 불길이 번져나갈 수 있는 땅의 풀이나 잔가지, 낙엽 등을 미리 태워 진화선(방어선)을 구축하는 작업이 핵심이 된다. 가능하면 주불에 대응하고, 불가능할 경우 진화선을 확보해 화재의 확장을 막고 잔불을 확실히 잡는 것이 산불대응의 기본이다.
문제는 이 모두가 숙련된 인력이 집중 투입돼야 한다는 점이다. 산에서 무거운 장비를 들고 기동할 수 있을 만큼 체력이 받쳐줘야 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산불과 기상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숙련된 인력이어야 한다. 산불대응이 소방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다. 시베리아 들판을 무대로 활약하는 러시아 산림소방관, 미국 산악지대를 누비는 핫샷 등은 각국 최정예 공공인력으로 대우를 받는다.
미국이 산불소방관을 대하는 자세
▲온리 더 브레이브스틸컷
코리아스크린
<온리 더 브레이브>는 산불에 대응하는 소방관, 그중에서도 미국 '그래닛마운틴 핫샷'팀의 이야기다. 2013년 6월 애리조나 야넬힐 산불(Yarnell Hill Fire)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2019년 강원도 고성·강릉·인제에서 발생한 산불과 비슷한 면적을 태운 대규모 화재로, 이에 대응하던 20명의 핫샷팀 가운데 견시자 한 명을 제외한 19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한 명의 생존자를 제외한 전원사망의 비극, 미국 산불진화 역사 가운데서도 손꼽힐 만큼 아픈 이야기를 할리우드가 집어 든 걸 두고 적잖은 이들이 의외의 선택이라며 놀랐다.
애리조나주 프레스콧 소방서엔 에릭 마쉬(조쉬 브롤린 분)가 이끄는 산불대응팀이 있다. 산불 진화가 저들의 삶 그 자체인 이들, 그 가족들이 입을 모아 제 남편이며 아버지를 산과 나누어 가졌다고 말할 정도다. 이들에겐 숙원이 하나 있는데, 미국 최정예 산불대응팀만이 받는 영예인 핫샷이 되는 것이다. 벌써 수년째 테스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매일 고단한 훈련을 이겨내며 핫샷이 되고 말겠다는 꿈을 향해 내달린다.
브랜든 맥도너(마일즈 텔러 분)는 프레스콧의 하류인생이다. 미국 작은 마을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꿈도 업도 없는 청년이다. 주사로 꼽는 중한 마약만 안 했다 뿐이지 대마초부터 연초로 접할 수 있는 마약은 이것저것 해본 모양, 첫 등장부터가 집에서 뿅 간 채 등장할 정도니 영화가 그를 어떻게 보여주고자 하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벅찬 감동, 예고된 비극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예고된 결말을 향해 진격한다. 브랜든은 어찌저찌하여 프레스콧 산불대응팀에 합류하고 지옥훈련을 거치며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며 그를 따돌리는 주변의 핍박을 물리치고 에릭의 신뢰에 응답하는 모습이 빤하지만 분명한 감동으로 이어진다. 발전하는 건 브랜든만이 아니다. 프레스콧 산불대응팀도 운 좋게 테스트 기회를 잡아 명실상부 핫샷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주가 아닌 시 최초의 핫샷이랬던가. 그래닛마운틴 핫샷의 탄생이다.
무튼 영화는 개인과 조직 모두의 성장기를 그리는 데 박차를 가한다. 그 상승세가 너무나 가팔라서 영화가 끝나기 전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를 정도다. 그리고 남은 건 추락이다. 예고된 비극, 야넬힐 산불이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번지는 산불을 막기 위해 진화선을 설치하고 맞불을 피운 그래닛마운틴 핫샷이다. 그러나 물과 난연제를 실어나르는 에어탱커가 이들이 일으킨 맞불을 끄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들은 잠시 후방으로 물러섰다가 불길이 다가오는 방향의 건물 하나를 더 살려보려고 공격적인 작전을 감행한다. 영화는 이들의 예상과 달리 불길이 너무 빨리 번지는 상황으로부터 전멸의 비극까지를 단숨에 그려낸다.
아까운 죽음이 더는 거듭되지 않기를
▲온리 더 브레이브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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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현실 속에선 이들이 사망한 정확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민간 재산보호를 최우선하다 소방당국의 철수결정이 다소 늦었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주불에 맞서는 핫샷, 또 모든 산불대응팀에게 완전히 안전한 장소는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온리 더 브레이브>의 선택이 드러난다. 미국 핫샷, 나아가 소방관들의 대단한 성취 대신에 가장 참혹했던 실패를 가져와서는 그 속에서 빛나는 정신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결코 안전할 수 없는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업의 숭고함에 대한 것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씁쓸함을 금할 길 없다. 산불대응팀은 커녕 한국 소방관 전반이 받는 처우가 어떠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마다 장비며 훈련, 처우가 천차만별, 산불에 직접 대응하는 인력조차 자원부족을 핑계로 역할 상당부분을 비상설인 예비대원들에게 맡기고 있는 현실이다. 그나마 남성이면 일반 공무원까지 죄다 긁어모아 투입하지만 체력도,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아 산악환경에서 진화선을 구축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단 이야기가 들려온다.
<온리 더 브레이브>가 그리는 소방인력에 대한 존중, 기꺼이 이들에게 비용을 투입하고 처우를 개선하며 사회적 존중을 보이는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 우리에겐 얼마나 있는지를 돌아본다.
▲온리 더 브레이브포스터코리아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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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슬픈 식목일... 미국은 소방관을 이렇게 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