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세계 여자야구 월드컵 예선 A그룹 조별리그에서 한국-홍콩전 당시, 대표팀 내야수 박소연이 슬라이딩을 하는 모습.
2024 세계 여자야구 월드컵 예선 A그룹 조별리그에서 한국-홍콩전 당시, 대표팀 내야수 박소연이 슬라이딩을 하는 모습.WBSC

여자야구는 '불모지'다. 실업·프로팀이 없는 한국 여자야구뿐만 아니라, 전세계 유일하게 여자 실업팀이 존재하는 일본도 남자 프로야구 인프라에 비하면 '불모지'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여자야구는 '불모지', '열악한 환경'이라는 말을 가능한 자제해야 한다. '불모지'라며 열악한 환경만 조명하는 대신, 지금부터라도 여자야구의 재미나고 독특한 문화, 밈(meme)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실제로 기사의 인기 척도를 반영하는 기사 조회수와 X(구 트위터) 리트윗 횟수를 보면, 여자야구의 열악한 현실을 조명할 때보다 이들만의 재미난 일화, 독특한 문화, 감동적인 승리 순간을 전한 기사가 대중의 관심을 압도적으로 많이 받았다.

여자야구가 국제대회에서 호성적을 내면 인기가 따라올 것이라는 말도 그만해야 한다. 비인기 종목에 따라오는 단골 멘트가 있다. 바로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팬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남자야구는 그간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20 도쿄 올림픽 4위, 최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3회 연속 1라운드 탈락 참사, 2024 프리미어12 5위가 그렇다. 반면, 한국 여자야구는 선전했다. 지난 2023년 홍콩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3위에 올라 세계대회 티켓을 따냈다.

그렇다고 남자야구의 인기가 꺾이고 여자야구의 인기가 올라갔을까? 프로야구는 지난해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첫 1000만 관중을 돌파하며 승승장구했고, 여자야구는 여전히 '불모지' 소리를 듣고 있다. 추가 후원도 거의 없었다.

국제대회 호성적은 반짝 인기에 영향을 주지만 거기까지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기준이 예전과 달라졌다. 스포츠 팬, 특히 '고관여팬'(관심 있는 리그의 지난 시즌 우승팀과 응원 구단의 선수를 모두 알고 있고 유니폼을 보유한 응답자)의 과반수 이상을 구성하는 젊은 여성들은 더 이상 국제대회 성적만으로 해당 종목을 접하지 않는다.

팬들이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제는 '스토리텔링'의 시대다. 젊은 스포츠 팬들은 서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라이벌 구도, 팀 간의 역사, 이적 시장 이야기, 선수 개인 서사, 선수들끼리의 보여주는 환장(?)의 티키타카 등이다.

KBO리그는 1982년부터 시작돼 역사가 깊다. 그리고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발전해 각 팀 팬의 충성도도 높다. '2024 프로스포츠협회 관중 성향 보고서'에 따르면, 10년 이상 프로야구를 응원했다는 사람이 34%로 전체 프로 구기 종목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미 다양하고 깊은 서사가 레거시 미디어를 중심으로 퍼져 있었는데, 근 3~4년 사이에에 유튜브·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전으로 이 서사에 접하기 한층 쉬워졌다. SNS의 발전에 따라 '고관여팬'에서 젊은 여성팬 비중이 늘어나는 이유다.

이에 따라, 한국 남자야구 국가대표팀과 KBO리그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팬이 늘어났다. 남자야구의 인기가 줄지 않고 오히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상승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이는 남자농구와 남자배구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미디어를 움직이는 인기는 단순히 국제대회 성적만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게 결론이다. 국제대회 성적부터 가져오라고 하기 전에, 리그 자체를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 KBO리그가 연이은 국제대회 부진에도 탄탄한 인기를 자랑하며 승승장구하는 이유다. 선수 개개인의 일탈이 끊이지 않음에도 리그가 굳건하게 유지되는 것 역시 브랜드가 확고히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야구 국가대표 내야수 김현희가 2024 세계 여자야구 월드컵 예선전 멕시코전에서 3루 파울 펜스를 붙잡고 넘어지면서까지 공을 잡아내는 모습. 그는 이 공을 잡다가 펜스에 이마를 세게 부딪히기도 했다.
한국 여자야구 국가대표 내야수 김현희가 2024 세계 여자야구 월드컵 예선전 멕시코전에서 3루 파울 펜스를 붙잡고 넘어지면서까지 공을 잡아내는 모습. 그는 이 공을 잡다가 펜스에 이마를 세게 부딪히기도 했다.황혜정

스포츠를 '돈줄'로 만들 수 있는 이 법칙을 여자야구 실업·프로팀 탄생 조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얘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불모지', '열악한 환경'만 강조하면 잠깐의 동정과 지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꾸준한 관심을 받기 어렵다. 여자야구 서사를 지금부터라도 쌓아야 한다. 자체 SNS 계정을 활성화 해 선수들 사이의 티키타카와 개개인의 서사(스토리), 팀간의 라이벌 구도 등을 지속적으로 노출해야 한다.

미디어 역시 어려운 현실보다는 재미나고 흥미로운 지점, 그리고 사람들이 야구에 열광하는 포인트(도파민이 터지는 스피드와 힘)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필자는 스포츠 전문 일간지 재직 시절, 여자야구에 관해 총 243건의 기사를 썼는데, 여자야구 대표팀 선수들만의 직구·슬라이더·체인지업 그립 잡는 법, 여자야구 대표팀 선수 중 학생 선수들의 재미난 셀카 놀이, 여자 선수들의 투혼의 슬라이딩 등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기사를 쓰려고 노력했다.

이 점에서 여자야구는 이미 갖고 있는 소재가 차고 넘친다. 우선, 각자 직장을 다니며 야구를 하는 선수라는 점에서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많고,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에 신선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여자배구, 여자농구 프로구단들의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듯, 여자 선수만의 '워맨스'와 '재치있는 입담 대결'도 충분히 갖고 있다.

관중을 동원할 만한 출중한 실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실력을 키우면서도 '서사와 역사' 쌓기라는 '물밑' 작업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여자야구연맹(WBAK)은 열악한 자금 사정에 따른 인력 부족을 이유로 이 같은 일을 할 의지를 확고히 보이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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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필자는 전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입니다.
여자야구 여자야구대표팀 불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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