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탄생시킨 노버트 위너, 컴퓨터 기술의 예언자 더글러스 엥겔바트, C언어의 창시자 데니스 리치, 해커문화의 주도자 리처드 스톨만. 인터넷이 오늘날 누구나 값싸고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도록 기틀을 만든 이들이다. 이들에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 외에도 공통점이 있다. 제가 빚고 성취한 것을 감추고 그 값을 받아내는 흔한 태도 대신, 대가가 없거나 적을 지라도 기술을 공개하고 확산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다. 이 같은 결정엔 인터넷이 집단지성의 힘을 폭발시키는 새 시대의 커뮤니티로 기능할 것이란 믿음이, 그로부터 인류가 더 나은 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자리했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은 그와는 정확히 반대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정부와 기업, 학교가 독점하던 정보가 공유되고 전파되는 정도에서 인터넷은 머무르지 않았다. 온갖 거짓을 사실처럼 분칠해 유통하고, 혐오조장과 마녀사냥을 멈추지 않는다. 현실에선 좀처럼 발붙이기 어려운 극단주의자들이 소통하는 장이 되어주고, 가짜뉴스를 생산해 정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조작도 상시로 벌어진다.

인공지능이며 양자컴퓨터, 자율주행과 우주여행까지, 인류 앞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오늘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장은 앞에 펼쳐진 미래일 수만은 없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실을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오랜 문장이 유효한 시대인 때문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한국사회는 여전히 과거, 정리되고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두고 지난한 싸움을 이어간다.

왜곡된 인식 퍼뜨리는 문제 있는 다큐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스틸컷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스틸컷퓨어웨이 픽쳐스

제주 4·3사건은 한국사 손꼽는 비극 중 하나다. 시간을 20세기 이후로 한정한다면 한국전쟁을 제하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다수 죽음이 국가에 의한, 적어도 그 묵인과 방조에 의한 것이었으니 사회가 나서 정리할 필요가 컸다. 제주 4·3사건의 상징일인 매년 4월 3일을 기해 관련된 지식을 전파하고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은 이 같은 시각에서 경계해야 할 작품이다. 2022년 제작돼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시청할 수 있도록 한 이 다큐멘터리는 적극적 왜곡점이 얼마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도록 할 우려가 있다.

80분 분량의 다큐는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이야기를 강조한다. 즉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와 약탈로 피해를 본 이들의 목소리를 인터뷰를 통해 들려준다. 한편으로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투박하나마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연출도 병행한다.

제주 4·3사건 본질이 남로당 봉기라고?

우선 영화는 미군정 치하 제주도에서 남로당이 얼마나 세를 떨치고 있었는지 설득해 나간다. 먹고 살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사회주의가 상당한 매력을 발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볼셰비키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소련의 레닌이 민족해방론을 주장하였으며,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일본 공산당 노선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의 독립운동과 그 궤를 같이했다는 이야기다. 일본 오사카엔 제주도 출신 조선인이 많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회주의며 공산주의에 경도돼 제주도로 귀환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공들인 설명은 제주 4·3사건을 촉발한 1947년 3월 1일 민중집회가 남로당에 의해 조직되고 계획된 것이란 주장으로 흘러간다. 사망 경찰 유가족인 이승학 제주 4·3 진실규명도민연대 사무총장이 카메라 앞에 나서 이를 불법시위로 규정하고 남로당의 개입을 주장한다. 구체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다큐는 그의 인터뷰를 통하여 1948년 들어 남로당이 제주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키려 한 정황 또한 부연한다. 이 사무총장이 지난 2021년 국민의힘에 의해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될 당시 극우행적으로 논란이 인 인물이란 점은 언급되지 않는다.

국방부 출신 나종삼 전 국무총리실 산하 4‧3위원회 전문위원의 발언도 이어진다. 그는 제주 4·3사건을 '남로당 제주도당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제헌 의원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하기 위해 일으켰고, 더 나아가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이는 지엽적으로만 맞는 말일 뿐, 전체 그림을 보자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야기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폭동을 주도하고 무력봉기를 일으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들에 의해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도 아예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다큐는 나아가선 안 될 지점까지 나아간다. 4·3사건이 남로당 빨갱이들의 봉기이며 그에 따른 일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라 축소하는 것이다.

정부 진상조사 결과도 무시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 스틸컷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 스틸컷퓨어웨이 픽쳐스

이는 우리가 통상 4·3사건에 대해 인지하는 것, 나아가 정부 주도로 이뤄진 진상조사의 결과와 어긋난다. 남로당 제주도당을 진압하기 위해 육지에서 파견된 서북청년단과 군 병력이 제주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일방적 학살극, 정부에 의해 인정된 확인사망자만 1만 명을 훌쩍 넘고 추정 사망자는 그 수배에 이르는 참극을 그저 '빨갱이 소탕에 따른 부작용' 으로 치부하고 만다.

게다가 이는 4·3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행위다. 남로당 제주도당을 소위 '빨갱이'로 치부하고 이들의 범죄행위를 조명하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반드시 그에 비할 수 없는 피해를 일으킨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도 말하여야만 한다. 서북청년단을 파견한 최종 결정권자 이승만 대통령, 당시 경무부장이던 조병옥, 무엇보다 이를 조장한 미군정에 대한 책임 말이다.

다큐는 김학성 전 강원대 헌법교수를 통해 적극적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는 4·3사건에 대해 '좌파는 민중봉기라 하고 우파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일으킨 반란이라 한다'며 우파의 주장이 맞다는 근거로 2001년 헌법재판소 결정을 언급한다. 김대중 정부 시기 제정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특별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제주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일으킨 반란사건이다'라고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는 거짓이다. 해당 판례(2000헌마238, 302 병합)에서 반란에 대한 언급은 청구인 주장을 요약하는 대목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오히려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 제주4·3연구소 등 4개 유관단체는 '제주4·3사건을 단순한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파악하거나, 북한 공산세력과 연계된 조직적인 공산무장반란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입장을 내 청구인 측과 반대되는 주장을 펼쳤다. 다수 재판관은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관 2명(권성, 주선회)만이 이를 '공산무장세력이 주도한 반란행위'라 소수의견을 냈을 뿐이다. 다큐가 담아낸, 재판관이 전원일치로 공산당 반란이라 규정했다는 대목은 확인할 수 없다.

적극적 왜곡까지 버젓이 유통한다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은 말 그대로 1948년의 봄만을 잔혹하다고 이야기한다. 무장대 반란이 일어난 4월의 잔혹함만을 바라보고, 11월 17일 선포된 계엄령부터 12월 31일 계엄해제까지 집중적으로 자행된 중산간 지역 초토화작전, 그 전후로 이어진 학살극에 대해선 외면한다.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와 같이 신뢰성 있는 자료는 당시 기준으로 4·3위원회가 심의·결정한 민간인 희생자를 총 1만 4442명이라 적고 있다. 이중 토벌대에 의해 죽은 이가 78.7%, 무장대에 의해 사망을 15.7%로 기록했다. 전체 희생자의 7할 가까이가 초토화작전이 이뤄진 시기, 즉 1948년 가을부터 이듬해 늦겨울까지 발생했다. 1948년 탐라의 봄이 잔혹하다 말하려면 그 이후를 돌아봐야 할 일이다.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은 근 몇 년간 꾸준히 이어져 온 우파다큐의 흐름 가운데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감독인 권순도는 2023년엔 이승만의 일대기를 미화해 다룬 <기적의 시작>을 감독해 또 한 번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기적의 시작>에선 감옥에서 영혼과 민족을 구원해달라며 신께 기도를 올리는 이승만의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잡아내는 등 개신교적 주제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에서도 제주도 기독교인의 죽음 등을 공들여 잡아낸 대목이 눈길을 끈다. 서북청년단이 영락교회 등 기독교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단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작품이 완성된 뒤 최근 논란이 된 부산 세계로교회 등 개신교 교회들에서 순회상영을 이어간 점은 의미심장하다.

역사적 사실을 은근히 비틀어 보도록 하는 이와 같은 작품이 근 몇 년 끊이지 않고 제작되는 현실은 갈수록 역사에 무관심해지는 이들이 늘어나는 국면에서 경각심을 자아낸다. 역사적 사실을 두고 정치적 파벌로 갈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린다. 더 세가 강한 쪽이 사실을 점령하고 후세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공공연히 벌어진다. 온라인에 공개돼 꾸준히 관심을 받는 이와 같은 영화, 나아가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유튜브며 커뮤니티 상의 콘텐츠들이 꼭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닌지 두려워지는 오늘이다.

해법은 명백하다. 거짓을 가려내는 눈을 얻는 일, 파고들어 진실을 발굴하고 그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고단하고 불편한 작업이지만 오로지 이것만이 거짓의 범람에 대항하는 길이다. 어둠을 물리치는 건 빛뿐이듯, 진실만이 거짓을 걷어내기 때문이다.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포스터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포스터퓨어웨이 픽쳐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잔혹했던1948년탐라의봄 권순도 제주43사건 다큐멘터리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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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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