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 봅니다. 그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편집자말] |
(* 이 글은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은 고해(苦海)다.'
정신분석의 스캇 펙 박사의 명저 <아직은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이다. 20대 때 처음 접했을 땐, 공감되지 않던 이 문장이 40대 후반에 이른 요즘엔 부쩍 와 닿곤 했다. 그러던 차에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만났다.
애순(아이유, 문소리)과 관식(박보검, 박해준)의 삶을 그린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이 문장이 자꾸만 떠올랐다. 결코 쉽지 않은 이들의 삶이 '고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고해 같은 삶을 엿보고 나면 마음이 달달해지는 듯했다.
마침내 아껴뒀던 드라마의 마지막회를 보고야 말았을 때,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슬프면서도 뿌듯하고, 애달프면서도 벅찬 느낌 때문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느낌 같은 것이었음을 말이다. 모순된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오듯이 삶은 쓰지만 동시에 달콤하기도 하다고 알려주는 듯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드라마에는 고해 같은 삶을 '봄날'로 만들어주는 장면들이 가득했다. <폭싹 속았수다>가 알려준, 쓰디쓴 삶을 달디 달게 만드는 것들을 정리해 봤다.
작은 호의로 연결되는 마음
▲애순과 관식의 삶을 그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제주도의 한 시골 마을서 자란 애순은 하고 싶은 게 많지만, 엄마 광례(염혜란)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답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한다. 그러다 일편단심 자신만 바라보는 관식과 함께 부산으로 떠나는데, 하룻밤 머문 숙소에서 사기를 당한다. 도난당한 물건을 찾으러 숙소에 다시 간 애순과 관식은 또 다른 손님에게 같은 수법을 쓰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에 애순은 그 손님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사건이 해결된 뒤 손님이 자신을 도운 이유를 묻자, 애순은 이렇게 답한다.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죠." (8회)
손님은 이 말을 오래도록 간직한다. 그리고 훗날 이 말을 떠올리며 애순의 딸 금명을 돕는다. 낯선 이에게 베푼 호의가 7246일 뒤에 금명에게 돌아온 것이다.
낯선 이의 호의가 마음을 데우는 장면은 또 있었다. 금명이 깐느극장에서 일하던 때 극장 간판 그림을 그리던 충섭(김선호)의 엄마(이지현)는 아들 몰래 극장에 와 그림을 본다. 극장 앞에서 서성이다 암표상으로 오해받던 충섭모는 이런 자신의 사연을 금명에게 털어놓는다. 멀찍이서 이를 듣던 무뚝뚝한 극장 사장(김해곤)은 무심한 듯 "박 화백 없으면 우리 극장 망해요"라며 영화표를 건넨다(10회). 충섭모는 이 말에 뭉클해 하고, 처음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는다.
이 장면들은 경제학자 도리나 허츠가 <고립의 시대>에서 적은 '스치듯 지나는 관계가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를 상기시켰다. 나 역시도 그랬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을 때 뒤에서 문을 잡아주는 이, 강아지와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나 몇 걸음 함께 걷은 이들과의 다정한 인사 덕에 마음이 따스해진 경험이 있다.
물론, 광례의 해녀 동료들인 '이모들'처럼 친밀하게 돌봐주는 이들의 도움이 애순에겐 가장 큰 힘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호의들의 역할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애순이 임신한 채로 생활고에 시달릴 때 쌀독을 조금씩 채워주던 집주인 할머니와 할아버지, 동명을 잃고 슬픔에 잠긴 애순의 집에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웃이 없었다면 그 시기를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새겨진 사랑하는 이의 흔적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넷플릭스
이렇게 여러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지만, 만남에는 언제나 헤어짐이 따르기 마련이다. "인생 아주 철마다 이별"(12회)이라는 애순의 말처럼, 사실 살아가는 것은 이별하는 일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도 애순은 많은 이들을 잃는다. 아버지, 어머니, 시할머니, 해녀 충수 이모(차미경) 그리고 마침내 관식과도 이별한다. 셋째 아들 동명을 잃은 상처는 평생토록 애순의 마음에 남는다. 하지만 애순은 이 많은 상실을 겪고도 자신의 삶을 "수만 날이 봄"(16회)으로 회상한다. 어떻게 이별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걸까.
그건 바로 사랑하는 이들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금명의 행동을 보면서 애순이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걸. 여지없이 본대로 자라는 것을'(11회)이라고 독백하듯, 친밀한 이의 말과 행동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우리 안에 쌓인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내면화'라고 한다. 내면화된 사랑하는 이의 모습과 말은 삶의 고비에서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다.
애순은 삶의 고비마다 항상 엄마 광례를 떠올리며 용기를 낸다. 특히 동명을 잃고 절망에 빠졌을 때 "살다가 살다가 똑 죽겠는 날이 오거든 가만 누워있지 말고 발버둥을 쳐"(6회)라는 광례의 말을 떠올리고는 일어나 아이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금명 역시 "수틀리면 빠꾸해. 아부지 여기 있어"라는 관식의 말을 마음에 지니고 가족의 품을 떠나 독립해 간다. 금명은 이 말 덕분에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관식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 말은 힘을 발휘한다. 관식은 투병 중에도 말없이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해둔다. 집안 곳곳을 손보고, 금명에게는 모아 둔 용돈을, 한방을 좋아하는 은명(강유석)에게는 중고 벤츠차를, 애순에게는 늘 그랬든 머리핀을 선물한다. 이는 관식이 떠난 후에도 '곁에 있는 듯' 느끼게 했을 것이고, 남은 가족들은 각자 마음에 관식을 지닌 채 일상을 살아간다.
'정신화'하는 마음들
▲'정신화'한 마음은 '못 되게' 굴던 인물들마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했다. 넷플릭스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좋은 말만 간직하게 되는 건 아니다. 주변엔 모진 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꼭 있다. 금명만 해도 그렇다. 금명은 애순과 관식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짜증 나"라고 말한다. 애순과 관식은 이런 금명을 너그러이 바라본다. 도가 넘을 땐 화를 내기도 하고, 서운하다며 툴툴대기도 하지만 애순의 말에 크게 다치지 않는다.
이는 애순과 관식이 '정신화 능력'을 발휘해 금명을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화'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이해하고 그 너머의 마음을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애순과 관식은 금명의 '짜증'에 담긴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범벅된 마음'을 읽어냈기에 보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신화'한 마음은 '못 되게' 굴던 인물들마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했다. 애순의 시어머니 계옥(오민애)은 젊은 애순을 사사건건 구박한다. 애순은 이를 마음에 담아두기보다 적당히 받아치면서 넘기는데 이는 계옥의 마음 깊은 곳엔 애정이 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계옥은 애순이 동명을 잃었을 때, 애순을 탓하지 않고 '살아 있나' 들여다봐 준다. 이 속마음을 알아준 애순 덕에 계옥은 애순에게 "구박해서 쏘리고 살아줘서 땡큐"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 것이다(15회).
'학 씨' 아저씨 상길(최대훈)도 마찬가지다. 상길은 가족들에게 폭군처럼 군림한다. 이를 참아낸 아내 영란(장혜진)은 마침내 이혼을 선언하고, 상길은 혼자가 된다. 그런데 현숙(이수경)은 혼자가 된 상길을 바라보며 "아빠가 쫄보라 그랬던 것 같아. 우리가 진짜 다 떠날까 봐서 그냥 좀 쫄았던 것"이라며 상길의 내면을 읽어낸다. 관식도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지만 외롭고 겁에 질린 상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가게 일을 도와달라 부탁한다. 그로 인해 상길은 조금 덜 외롭게 늙어간다.
"좋기도 좋고 싫기도 싫은가 보다." (7회)
애순이 계장이 되고 잔치를 열었을 때, 툴툴거리며 전을 부치는 계옥을 보고 영란이 한 말이다. 나는 이 대사가 <폭싹 속았수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은 좋기만 하고 싫기만 한 게 아니라 언제나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섞여 있다. 아무리 고해 같아도 작은 호의들에 행복해지고, 많은 이별을 하면서도 소중했던 이들의 모습을 기억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마음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늘 나쁜 것만은 아닐 테다. 드라마가 알려준 이런 것들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애순처럼 '수만 날이 봄'인 삶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삶은 고해다.' 하지만, <폭싹 속았수다>를 정주행한 지금 이 문장을 조금 수정하고 싶다.
'삶은 달콤한 고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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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죠"... 이렇게 살면 달콤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