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손> 스틸컷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아버지는 가만히 계시소. 제때는 제 방식대로 할 낍니더."
영화 <장손>을 떠올리면 성진(강승호 분)의 아버지 태근(오만석 분)이 먼저 생각난다.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는 집안 여자들 뒤로 런닝셔츠 바람으로 작은방에 틀어박혀 고스톱이나 치고 있던 장면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 집안의 장남이자 독자로 태어나 가업인 두부 공장을 이어받은 그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승필(우상전 분)과 가업이 아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배우 일을 하는 아들 성진 사이에 끼어 있다.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반(正反)의 태도를 함께 갖고 있어서다.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장손이 등장한다. 할아버지 승필과 아버지 태근, 그리고 아들 성진이다. 두부 공장 사업을 시작하며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자각했던 아버지와 애초부터 가업을 이을 생각 따위는 없었던 아들은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태근은 그렇지 않다. 한 집안의 장손으로 거스를 수 없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업을 잇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에 대한 확신이나 신념은 가지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 법대까지 나와 한때 운동권에서 활동했을 정도로 다른 쪽에 더 큰 꿈을 안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것으로 그 시절의 모습과 미련이 현재에 그려진다.) 내게는 태근이 그저 자리가 씌운 껍데기만 남은 인물처럼 여겨진다.
두 장면이 더 있다. 장면 하나,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 말녀(손숙 분)의 모습과 목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술에 취한 태근의 주정이다. 공장을 물려받지 않겠다는 아들에 대한 화풀이로 그는 불을 질러버리겠다며 으름을 놓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는지, 방 밖으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성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막는다.) 장면 둘. 말녀가 세상을 떠난 직후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이번에도 술에 취해 제사상에 문제가 있다며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났을까? 적어도 아들의 선언이나 장례식장의 문제 그 자체는 아닌 것 같다.
02.
중심인물도 아닌 태근에 대해 글의 처음부터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다. 그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의미적으로는 상실되어 있는 자리의 틈을 집안의 여성들이 채우고 지지하는 모습이 영화 전반부 내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려지고 있어서다.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두부 공장 신 안에는 엄마 수희(안민영 분)가 존재하고, 제사상을 준비하는 집안에는 말녀가 커다란 대들보처럼 서 있다. 임신한 누나 미화(김시은 분) 역시 힘을 보탠다.
말녀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균열이 일기 시작하는 가족의 모습만 보더라도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실질적인 중심은 여성이었음이 다시 한번 증명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장손인 성진만 감싸고 돌고, 같은 여성에게까지 야박하게 굴던 말녀였지만, 그의 존재감에는 구성원 각자가 안고 있던 불만과 갈등을 모두 잠재울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다. 문중에서 편찬했다는 족보를 들먹이면서 정작 때마다 오르내리던 가족의 산소에서는 시신과 관을 찾을 수 없는 실속 없는 남자들의 권위와 비교될 정도다.
03.
"내는 니 두부 공장하라고 서울 보낸 거 아이다. 알재?"
물론 작품 속 여성 서사에 언제나 상호 간의 이해와 협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누나가 있음에도 동생인 아들이 집안의 장손(한 집안의 맏이가 되는 후손)이 되고, 가업은 언제나 첫째가 물려받아야 하는 등의 가부장제의 부조리로 인해 갈등 또한 경험하게 된다. 손자인 성진을 편애하는 말녀의 모습은 헤프닝에 가까울 정도다. 수희는 무능력한 남편으로 인해 장손이 떠안아야 할 책무를 대신하고 있음에도 시어머니의 냉대를 받아야 했고, (아들로 인해 고생할 며느리에게 미안해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큰고모 혜숙(차미경 분)은 남편이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 누워있는 걸 알면서도 재산 문제로 야박하게 구는 수희와 대립하게 된다. 남성 중심의 체제 아래에서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서로의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던 모습이다. 물론 그 자리를 보듬어내는 것 또한 여성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작품이 단순히 전통적인 의미의 가부장적 사회의 문제를 전면으로 반박하거나 체제의 전복을 위해 만들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정민 감독 역시 '가족이 어때야 한다는 뚜렷한 정의를 내리거나 가져본 적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가부장제 위에서 남성은 형식적으로 완성되어 대물림되어 온 자신의 의무와 책임(라 여겨지는), 자존심 같은 것을 지키고자 했고, 이를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생산활동에는 여성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만큼 그런 배경이 영화 속에 자리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 지점이 영화 <장손>이 가진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를 잇는 장손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으면서도, 고전적 제도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 말이다.
04.
"저 두부 공장 안 할거예요."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워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장손 성진은 중심인물에 해당한다. 가업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장손의 의무로 여겨지는 책임을 이탈, 주요 갈등을 유발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가족의 두터운 기대와 사랑을 모두 차지하는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주요 행사에만 겨우 참석하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 속에 휘말려 부모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할아버지의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것도, 큰고모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갈등을 바라보고 일부 해소시키는 것도 모두 그의 시선이다. 조카인 늘봄의 탄생을 맞이하는 것 또한 성진의 역할이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에서 성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의 장손들이 하고자 했던 것에서 벗어나 하지 못했던 것을 해내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영화가 보여주는 계절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미화가 낳은 딸 늘봄은 아이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직접 보여주지 못하는 계절을 대신 상징하기도 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영화는 서사 속의 계절감이 카메라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애초에 처음부터 영화 자체를 여름의 생동성으로부터 시작해 가을을 지나 겨울의 정적인 방향으로 전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계절에 따라 컷의 길이와 속도감을 달리해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했고, 가족이 마주하게 되는 사건이나 감정의 순서도 이에 따라 배치된다. 계절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다시 차갑게 식어가는 동안, 가족의 서사도 갈등과 반목에서 이해와 화해로 나아가게 된다.
05.
그래서일까? 영화의 종반부에서 성진을 떠나보내고 두부 공장 쪽으로 향하다가 가족들의 묘가 있는 선산으로 홀로 걸어가는 할아버지 승필의 모습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다. 처음 성진을 택시에 태우던 장면에서는 그의 곁에 할머니 말녀가 함께였으나 이제는 혼자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불쑥불쑥 찾아오는 일을 두부 공장 직원들이 불편해한다며 타박하던 아들 태근의 말이 떠올라서이기도 하다. 날이 지나기도 전에 제사를 치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역정을 내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던 초반부의 모습 또한 마치 복선처럼 느껴지는 것은, 롱테이크 속에 담긴 그의 마지막 걸음이 이제 저물어가는 한 세대의 퇴장을 의미하는 것처럼 다가오고 있어서가 아닐까.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가업 앞에서 자동기계화라는 완전히 다른 꿈을 꾸는 시원찮은 아들과 가업 잇기를 거부하는 손자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그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모두가 주목하게 되는 뛰어난 작품은 매년 한두 작품씩 반드시 존재한다. 2023년에 이정홍 감독의 <괴인>이 있었다면, 2024년에는 이 영화 <장손>이 그런 작품임이 분명하다. 어느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라기엔 전체적인 구조와 만듦새가 매끄러우면서도 허술함이 느껴지지 않고, 이제 갓 30대 중반이 된 감독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엔 주제를 바라보고 풀어가는 방식이 또 깊고 선명해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린 5년은 분명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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