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바로 잡아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한국 여자야구에 관한 '최초'의 기록들이 그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 여자야구 간판' 김라경(25·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은 일본 실업팀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 선수가 아니다. 그리고 올해부터 운영되고 있는 국민대학교와 장안대학교 여자야구부가 한국 최초의 '대학' 여자야구팀이 아니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는 계속된다

 최유라가 2019년 '아사히트러스트'에 뛰던 시절 모습.
최유라가 2019년 '아사히트러스트'에 뛰던 시절 모습.최유라 제공

지난 2022년 여름으로 시계추를 돌려보자.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야구 기자들이 기사에서 '김라경이 일본 여자야구 실업팀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 여자 선수'라고 보도했다. 당시 김라경은 일본 실업팀 '아사히 트러스트'에 입단을 앞뒀고, 실제로 입단했다. 그리고 김라경은 부상 재활 후 지난달 일본 재진출에 성공해 현재 실업팀 '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에서 뛰고 있다. 그러나 2022년 당시 입단은 한국 선수 최초가 아니다.

그렇다면, 최초로 일본 여자야구 실업팀에 진출한 선수는 누구일까. 알 수 없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언론 기록에 따르면, 김라경 이전에 한국 여자야구 선수가 일본에 진출한 사례로는 지난 1994년 대통령배 전국 고교야구 대회 마운드에 오르며 여자 선수 최초로 고등학교 엘리트 무대에 등장한 안향미(44)가 있다.

안향미는 지난 2002년 일본 여자 사회인 야구팀 '드림윙스'에 입단해 2004년까지 주전 선수로 뛰었다(당시 일본엔 여자 실업팀이 존재하지 않았다). 안향미가 일본으로 향했을 당시 <연합뉴스>에서 단신을 냈다(관련기사 : 여자야구선수 안향미, 일본 진출).

'최초' 기록을 재확인하고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 김라경의 일본 재진출과 맞물려 앞으로 그가 펼칠 활약상을 조명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필자는 요즘 '세이부 레이디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일본 무료 야구 중계 사이트를 통해 김라경의 등판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김라경이 '1호' 진출 선수라면, 그가 잡는 삼진 1개, 그가 따낸 승리, 홀드, 세이브 등 각종 기록이 모두 '최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록을 검토하다가 안향미의 일본 진출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안향미와 김라경 사이에 또 한 명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됐다. 소프트볼 엘리트 선수 출신이자 한국 여자야구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인 최유라(27)의 일본 진출이었다. 최유라는 지난 2019부터 1년간 실업팀 '아사히 트러스트'에 입단해 1루수와 포수를 맡아 고군분투 해왔다. 주변에선 말 그대로 '개고생'이라고 했지만, 정작 본인은 담담했다. 필자와 연락이 닿은 최유라는 "그때 경험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 체육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역사는 계속된다. 김라경이 '아사히 트러스트'에서 부상한 뒤 한국에 돌아와 재활할 때, 또 한 명의 한국 선수가 일본에 향했다. 바로 한국 여자야구 국가대표 내야수 이지아(23)다. 2023년 홍콩에서 열린 여자야구 아시안컵에 출전해 한국의 동메달 획득에 공헌한 그는 현재 '아사히 트러스트'에서 뛰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한국 여자야구 선수의 일본 진출 사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안향미가 일본 진출 1호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안향미와 최유라, 그리고 김라경, 이지아 사이에 또 누군가 일본에 진출했을 수 있다. 그들 앞에 'O호' 일본 진출 선수라고 붙일 수 없는 이유다.

최근 필자와 만난 안향미는 김라경이 일본에 재진출한 것에 대해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김)라경이가 일본에서 건강하게 잘 뛰길 바란다. 나중에 큰 일을 할 선수"라며 격려했다.

남아있지 않은 기록들... 한국 여자야구 현주소

 <외인구단 리부팅: 야구장 속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가> 표지
<외인구단 리부팅: 야구장 속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가> 표지턱괴는 여자들

최초의 대학 여자야구부도 그렇다. 지난해 필자는 국민대와 장안대가 한국 최초로 대학 여자야구부를 창단한다고 보도했다(관련 기사 : 국민대-장안대, 국내 최초 '대학' 여자야구팀 창단 준비 중 [여자야구 현주소(29)]). 당시 X(구 트위터)에서 큰 이슈가 되며 해당 기사가 6300회 이상의 리트윗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 이들은 최초가 아니다. 오보였다. 이 또한 기록이 거의 없어 최초인지 여부는 확실치는 않으나, 나주대학교에서 2006년 대학 여자야구부를 창단했다. 해당 기록은 2007년 <나주신문>에서 보도한 기사로 남겨져 있다(관련 기사 : 나주대학 여자야구부, 전국대회 석권 < 역사 교육 < 뉴스 < 기사본문 - 나주신문). 비록 나주대 여자야구부는 학생 모집 실패로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지만, 이들은 국민대·장안대보다 20년 먼저 대학 여자야구부를 창단했다. 이 자리를 빌려 잘못된 사실을 보도한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필자에게 이 점을 지적한 이는 여자야구 연구 사례집 <외인구단 리부팅: 야구장 속 여성의 자리는 어디인가>(2022)를 펴낸 '턱괴는 여자들'의 정수경·송근영씨였다. 두 사람은 "나주대학에서 예전에 여자야구팀을 창단했다"고 귀띔해준 뒤 "기록되지 못한 이들의 역사가 지워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들 역시 고군분투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들이 아닌가"라고 했다. 필자의 오보로 인해 나주대학 여자야구부의 역사와 그곳에서 용기를 품고 악전고투 해온 야구부원(김주현·김혜점·정이슬·김수미·박정희·김여름·이유영·이민정·이오영·조혜미·박형옥·이정옥·손금순,·박금주 등)이 지워졌음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기록이 정확히 남아있지 않은 것 자체가 한국 여자야구 현주소를 그대로 나타낸다. 관심이 없으니, 누가,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왜 일본에 진출했는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누군가의 개척정신과 피, 땀은 역사에 남지 못했고, 지워졌다.

'기록화'의 중요성이 드러나는 사례이기도 하다. 한국 여자야구가 실업·프로팀 없이 순수 아마추어 사회인 야구팀으로만 구성돼 있다 보니, 2007년 창설된 한국여자야구연맹 역시 해외에 자발적으로 진출하는 선수들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 하다. 또한 언론 역시 '여자야구'에 관심 갖지 않으니 뒤늦게 등장한 '여자야구 간판' 김라경이 일본 진출을 앞두자 제대로 기록을 찾아보지 않고 '최초' 타이틀을 붙였고, 대학 여자야구팀이 창단된다고 하자 또다시 '최초'를 언급했다.

'최초'가 누구인지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김라경이 일본 무대에서 세울 1승이 비록 한국 선수 '최초'가 아닐지라도, 그 의미는 퇴색되지 않는다. 김라경의 기록은 그 자체로 주목받고, 보도되고, 박수 받아야 한다. 마치 한국인 '27호' 메이저리거 이정후(27·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안타와 홈런이 그 자체로 가치 있고 매일 화제 되는 것과 같다. 다만, 누군가의 피나는 노력이, 조명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래서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워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 여자야구 최초의 기록들을 '바로 잡는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덧붙이는 글 필자는 전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입니다.
여자야구 안향미 최유라 김라경 이지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