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SBS의 한일 월드컵 대회 중계를 맡은 송재익 캐스터와 신문선 해설위원.
2002년 SBS의 한일 월드컵 대회 중계를 맡은 송재익 캐스터와 신문선 해설위원.연합뉴스

'대한민국 스포츠 중계의 전설' 송재익 선생(전 아나운서 겸 스포츠 캐스터)이 별세했다.

지난 18일 송 전 캐스터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각계에서 추모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고인은 지난해 4월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향년 82세.

송재익은 1970년 MBC 공채 4기 아나운서로 입사하면서 방송에 입문했고 주로 스포츠 중계에서의 활약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시작으로 다수의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프로축구연맹(FIFA) 월드컵 등 메이저 스포츠대회 중계를 맡아 무려 5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1세대 스포츠 간판 캐스터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귀에 쏙쏙 박히는 발성과 매력적인 음색, 판소리 재담꾼을 연상시키는 현란한 입담으로, 국내 스포츠 중계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린 '중계석의 명창(名唱)'으로 불렸다.

훗날 본인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사실 송재익은 아나운서 시절 초기에는 특유의 입담을 살릴 수 있는 토크쇼 진행을 원했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길이 스포츠 중계였다. 당시만 해도 직장인 월급에 맞먹는 고가의 녹음기를 사비로 구매한 후, 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운동장을 찾아가 선배들을 따라하며 혼자 중계 연습으로 실력을 갈고 닦았다.

송재익이 스포츠 캐스터로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권투 중계였다. 프로 스포츠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인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는 권투였다. 당시 권투 중계는 시청률도 높은데다 당시만 해도 드물던 외국 출장의 기회까지 주어졌기에 모든 스포츠 캐스터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송재익은 당시 한보영 권투 해설가와 콤비를 이뤄 MBC의 간판 스포츠 캐스터로 국내외의 굵직한 권투 빅매치를 전담 중계하게 된다. '비운의 복서' 고 김득구의 마지막 경기로 알려진 1982년 레이 맨시니와의 대결을 중계한 것도 그였다. 이때의 인연으로 2002년 김득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챔피언>에 캐스터 역할로 특별출연하기도 했다.

물론 아나운서답게 스포츠 중계만 전담한 것은 아니고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진행도 종종 맡았다. 국가적 비극이었던 아웅산 테러 사건, KAL기 폭파사건 당시 특집 프로그램에서는 스포츠 중계 때와는 전혀 다른 송재익의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현란한 표현력으로 스포츠를 드라마로 만들다

 자료사진(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화면 갈무리)
자료사진(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화면 갈무리)tvN

1986년 한국축구가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하면서 '전설의 축구 캐스터 ' 송재익의 활약상도 시작된다. 멕시코 월드컵을 시작으로 2006 독일 월드컵까지 무려 6회 연속 월드컵 중계를 맡아 시청자들에게 현장의 생동감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 기간 역시 입담으로는 뒤지지 않는 신문선(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스포츠기록학과) 교수와 무려 20년이나 월드컵 간판 콤비로서 호흡을 맞췄다. 두 사람은 의외로 사적으로 친분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중계석에서의 호흡은 신기할 만큼 찰떡궁합이었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송재익-신문선 조합은 전성기에는 대한민국 축구 중계 '최초의 스타 캐스터-해설위원' 조합으로 불릴 만큼 많은 화제와 인기를 모았다.

송재익의 트레이드 마크하면 역시 현란한 표현력을 빼놓을 수 없다. 다양한 스포츠 경기 상황에 따라 유머러스한 비유에서 때로는 문학적 표현을 넘나들며 장면의 현장감을 극대화시키는 역량이 당대에 독보적이었다. 이건 그의 철학이기도 했다. 스포츠 중계는 '경기 내용의 사실적 전달'에 충실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넘어, '스포츠의 매력을 더 극대화하는 오락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 생각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중계 스타일이었다.

"자 여기서, 주춤주춤." (공을 잡은 선수가 드리블 타이밍을 가늠하는 상황, 송재익의 축구중계 최다 단골멘트 1위)
"어림없는 볼!" (슈팅이 골문을 한참 벗어났을 때, 송재익의 단골멘트 2위)
"수비가 깨진 쪽박처럼 물이 줄줄 세고 있어요."
"우리가 가스불(기세)을 줄일 필요는 없어요. 끓일 때는 펄펄 끓여야 해요."
"감독은 오늘 굶고 자는 게 좋겠네요, 먹고 자면 체하겠어요."
"마치 보신각 타종하듯이 내리찍은 헤딩이네요."
"종교가 있으신 분은 신께 빌고, 없으신 분은 조상님께 빕시다." (한일 월드컵 8강전 승부차기를 앞두고)

이러한 무수한 전설적인 어록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가 꼽힌다. 1997년 9월 28일,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축구 한일전(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3차전)에서 한국은 일본에 선제골을 내주고도 극적인 2-1 역전승을 거뒀다. 이른바 한국축구사에 전설로 남은 '도쿄대첩'이다. 당시 중계방송 시청률은 50%를 넘어설 정도로 국민적인 반응은 뜨거웠다.

이민성의 역전골이 터질 당시 송재익 캐스터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갑자기 '후지산'을 언급했다. 훗날 송 캐스터는 이 순간을 회상하며 "한일전의 의미는 일반적인 경기와 다르기에 좀더 특별한 멘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 왠지 일본의 자존심을 한번 건드리고 싶었다"면서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일왕'이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그 다음으로 생각난 어휘가 '후지산'이었다. 그것이 호응을 많이 얻었고, 일본에서도 굉장히 반응이 컸다고 하더라"고 고백했다. 당시 그의 말은 한일전 스포츠 명승부를 지켜본 한국인들의 감정을 가장 시원하게 대변해준 어록으로 기억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송재익의 어록을 단순히 가벼운 애드리브나 말장난으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대본이 없는 상황에서도 즉흥적으로 말을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란 충분한 공부와 준비 없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송재익은 "외국에 나가면 꼭 그 나라의 문화나 도시의 특징을 먼저 공부한다. 때로 길 위에서 만나는 평범한 노인이나 상인의 이야기를 듣고 배움을 얻기도 한다"는 노하우를 전하며 현란한 어록의 원천이 바로 풍부한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 바 있다.

또한 "스포츠 캐스터라면 어휘를 잘 선택해야 하고, 발성도 정확해야 한다. 때로는 어려운 이야기도 평범하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하고, 재미와 메시지를 가미하는 균형감이 필요하다"고 후배 스포츠 캐스터들을 위한 조언도 남겼다.

이뤄지지 못한 송재익의 마지막 꿈

 78세 현역으로 활동하던 고인(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78세 현역으로 활동하던 고인(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연합뉴스

물론 송재익의 중계 방식은 당시에도 호불호가 엇갈렸다. 해당 종목에 대한 부족한 전문성과 잦은 사실 오류, 중립을 잃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낸 실언들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스포츠보다 개인의 입담을 부각하는 데만 의존하는 '만담가'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다만 이는 당시만 해도 온라인이 발달하지 않아 정보 습득에 제약이 있었고, 스포츠 중계도 개인의 역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와 관련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전문성이 강화된 축구 전문 캐스터와 선수 출신 해설가의 등장, 높아진 축구 팬들의 눈높이 등으로 시대 흐름이 변화했고, 송재익은 콤비 신문선과 더불어 차츰 주류에서 밀려났다.

그럼에도 송재익은 꾸준한 노력과 자기관리를 통해 동세대 캐스터들이 세대교체 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갔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잠시 활동이 뜸해진 시기도 있었으나, 2019년 무려 77세의 나이에 현장에 복귀해 약 2년가량 '현역 최고령 캐스터'로서 다시 K리그 중계를 맞기도 했다.

2020년 11월 21일 진행한 K리그2 서울 이랜드-전남 드래곤즈의 경기가 송재익이 마이크를 잡은 마지막 축구중계였다. 생각보다 엄청난 체력 소모가 요구되는 스포츠 중계에서 고령의 나이에도 말년까지 음색과 발성, 전달력은 크게 녹슬지 않았을 정도였다.

송재익은 평생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지난 2021년 신문선 교수와 오랜만에 함께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복귀전'에 대한 소망을 은근히 내비친 바 있다.

그는 "다들 내가 은퇴한 줄 아는데, 아직 결정한 게 아니다. 목소리만 유지하면 언젠가 신문선 위원과 다시 함께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우리 둘을 그리워하는 곳이 있다면 좋은 자리가 마련되지 않을까"라는 소망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암으로 투병 생활을 겪었고, 송재익의 마지막 꿈은 안타깝게 이뤄지지 못했다.

송재익이 스포츠 캐스터로 한창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는, 지금보다도 방송의 '엄숙주의'가 훨씬 강하던 시대였다. 그는 틀에 박힌 중계방식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진행과 입담을 추구하며 이후 세대의 스포츠 캐스터들이 활동할 수 있는 운신의 폭과 표현의 자유를 넓히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똑같은 장면의 반복이 될 수도 있는 스포츠 경기는, 송재익의 입담을 통해 '기승전결과 희노애락의 서사가 있는 90분의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중계의 역사에서 송재익의 이름과 기여도가 오랫동안 기념돼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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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익 후지산 스포츠캐스터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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