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옥>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3.
"생리대 지금 살게요. 지금이요!!"
언짢은 구석이 있던 남편의 중고 거래 제안은 지수(김보민 분)의 다급한 연락으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한다. 초경을 시작한 소녀가 플랫폼에 올라온 정옥의 생리대를 구매하겠다고 나서면서다. 폐경을 맞이한 여성과 초경을 시작한 소녀. 자연스러운 연결처럼 보이던 두 사람의 중고 거래는 생각지도 못한 소녀의 요청과 줄행랑으로 인해 일종의 소동극이 되고 만다. 지수는 심지어 아무 관계도 없는 정옥을 데리고 동네 슈퍼에 가서 자신의 엄마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처지에 갇혀 있던 정옥으로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극 중 지수의 존재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가진다. 폐경을 두고 남편과 긍정적인 라포를 형성하지 못한 정옥이 세상으로 나와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매개로 작용하는 것이 하나다. 앞서 언급했던 경험의 문제, 같은 여성만이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측면에서 서사를 쌓을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지수가 작은 소동극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서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여성의 성(姓)을 바라봐왔던 방식과 태도에 대한 환기다.
먼저, 정옥을 만나기 전까지의 지수에게 갑자기 시작된 초경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어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직장을 다니는 엄마는 딸을 챙겨줄 여력이 없고,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하지만 하필 집 앞 슈퍼 주인은 나이 든 아저씨다. 가방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듯 슈퍼를 뛰쳐나온 이유도 분명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텐데 그에게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옥의 생리대값을 내미는 것을 보아 생리대값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깊이 파고들면 문제는 더 많아진다. 중요한 것은 모든 여성이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생리적 현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04.
"그럼 아줌마도 새로운 시작이네요?"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서사에서 두 존재는 대등한 관계로 마주하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옥과 지수의 관계다. 다만 이 작품 속 두 대상은 엄밀히 말해 수평적이지 않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서다. 남편과 함께 등장하는 초반부 정옥의 어두운 기운이 지수를 만나면서부터 조금씩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정옥은 지수의 사정에 다가가는 동안에 자신의 상황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특히 그의 바지 뒷부분에 생리혈이 묻은 모습을 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은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두 사람의 시간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대상끼리의 서사(여성 서사)로 읽힐 수 있다. 한 사람은 이제 그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고, 또 한 사람은 이제 시작하려 한다는 차이만 존재한다. 정옥 한 사람의 측면에서는 누군가의 시작을 통해 하나의 여정을 갈무리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로 여겨질 수 있다. 초경을 맞이한 소녀의 장난스런 불평에 대해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자신의 작은 위로가 스스로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초경이 그렇듯, 자신의 폐경 또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영화 <정옥>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영화 <정옥>은 구조적으로 쉽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고, 인물의 관계나 서사 위에도 특별한 장치나 꼬임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감정의 깊이까지 얕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극적으로 이끌어내는 힘보다는 인물에 내재되어 있는 심정을 내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정서는 세상의 모든 여성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공유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어 보인다.
이제 혼자인 정옥의 얼굴에도 그늘이 지지 않는다. 초경이 그렇듯, 폐경 또한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으로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자신의 모두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봐 주는 이들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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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