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옥> 스틸컷
영화 <정옥> 스틸컷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이제 버리려고. 끝난 것 같아."

영화 <정옥>은 하나의 평범한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혼자 남은 집에서 퇴근할 남편을 기다리며 빨래와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한 주부의 일상이다. 그를 따르는 카메라의 앵글에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렇다. 이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그런 모습으로부터 공허한 마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며 프레임을 가득 채우기 전까지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하루다. 오늘은 폐경을 맞이한 정옥이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날이다. 화장실 서랍장 한 편에 쌓아둔 생리대를 봉투에 담아 현관문 앞에 내놓는다. 마치 생의 마지막 꽃잎을 제 손으로 떼어내는 듯한 모습으로.

폐경을 마주한 전업주부 정옥의 모습을 통해 유지민 감독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폐경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를 극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전반부에 배치된 개인의 서사 하나와 후반부에 놓이는 관계의 서사 하나다. 두 서사는 동일 인물인 정옥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점에 놓여 있지만, 주변 인물인 남편(김진구 분)과 지수(김보민 분)에 의해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직전의 표현에서 전반부에 '개인의 서사'가, 후반부에 '관계의 서사'가 놓인다고 표현한 것도 그래서다. 주변 인물이 월경이라는 생리 현상을 경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중심인물이 마주하게 되는 상황도 달라진다. 이는 사회적인 의미로 남성과 여성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이 놓인 상황과 감정 모두를 오롯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경험할 수 없을 때 이 간극은 더욱 커지고 만다.

02.
정옥과 남편이 등장하는 전반부의 서사에서는 두 사람의 감정이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무심하고 어설픈 배려와 위로 때문이다. 처분이 결정된 생리대 앞에서 남편은 홀가분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한다. 그의 말을 미루어 보면 정옥은 꽤 오랫동안 자신의 폐경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정확히 알아차리지는 못하지만 종종 아내의 기분을 살피고자 하고, 무엇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고 하는 등 그는 꽤 다정한 남편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남편이 그러면 그럴수록 정옥은 더 혼자가 된다. 낯선 세상 앞에서 이미 위축되어 버린 이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거리감만 느끼도록 할 뿐이다.

버리기로 한 생리대를 중고 직거래 마켓 어플로 판매하자는 남편의 제안도 같은 맥락에 있다. 자신이 쓰지 않는 넥타이 더미를 팔아 수박을 사 온 일처럼 어차피 버릴 물건을 실용적으로 활용하자는 뜻. 물론 당사자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옥으로서는 폐경의 증거처럼 여겨지는 대상을 쉽게 다루는 것처럼 여겨지고, 이는 다시 자신의 감정을 깊이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뒤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의 마음은 카메라의 시점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정확히 정옥만을 바라보는 컷과 타인인 남편의 시선을 통해 정옥이 비춰지는 컷 두 장면이다. 오롯이 정옥이 담기는 장면을 통해서는 그가 느끼고 있을 마음이 그려지고, 남편의 시선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에서는 가닿을 수 없는 타자의 맴도는 감정이 담긴다. 그렇게 극 중에서는 서로 마주할 수 없던 두 사람의 심리가 하나의 형상을 완성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세계가 끝나버렸다는 허망함에 아쉬움을 느끼는 한 사람을 완성해 내면서다.

 영화 <정옥> 스틸컷
영화 <정옥>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3.
"생리대 지금 살게요. 지금이요!!"

언짢은 구석이 있던 남편의 중고 거래 제안은 지수(김보민 분)의 다급한 연락으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한다. 초경을 시작한 소녀가 플랫폼에 올라온 정옥의 생리대를 구매하겠다고 나서면서다. 폐경을 맞이한 여성과 초경을 시작한 소녀. 자연스러운 연결처럼 보이던 두 사람의 중고 거래는 생각지도 못한 소녀의 요청과 줄행랑으로 인해 일종의 소동극이 되고 만다. 지수는 심지어 아무 관계도 없는 정옥을 데리고 동네 슈퍼에 가서 자신의 엄마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처지에 갇혀 있던 정옥으로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극 중 지수의 존재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가진다. 폐경을 두고 남편과 긍정적인 라포를 형성하지 못한 정옥이 세상으로 나와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매개로 작용하는 것이 하나다. 앞서 언급했던 경험의 문제, 같은 여성만이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측면에서 서사를 쌓을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지수가 작은 소동극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서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여성의 성(姓)을 바라봐왔던 방식과 태도에 대한 환기다.

먼저, 정옥을 만나기 전까지의 지수에게 갑자기 시작된 초경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어른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직장을 다니는 엄마는 딸을 챙겨줄 여력이 없고,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하지만 하필 집 앞 슈퍼 주인은 나이 든 아저씨다. 가방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듯 슈퍼를 뛰쳐나온 이유도 분명 부끄러움 때문이었을 텐데 그에게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옥의 생리대값을 내미는 것을 보아 생리대값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깊이 파고들면 문제는 더 많아진다. 중요한 것은 모든 여성이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생리적 현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04.
"그럼 아줌마도 새로운 시작이네요?"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서사에서 두 존재는 대등한 관계로 마주하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옥과 지수의 관계다. 다만 이 작품 속 두 대상은 엄밀히 말해 수평적이지 않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서다. 남편과 함께 등장하는 초반부 정옥의 어두운 기운이 지수를 만나면서부터 조금씩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정옥은 지수의 사정에 다가가는 동안에 자신의 상황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특히 그의 바지 뒷부분에 생리혈이 묻은 모습을 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은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관계의 측면에서 보자면 두 사람의 시간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대상끼리의 서사(여성 서사)로 읽힐 수 있다. 한 사람은 이제 그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고, 또 한 사람은 이제 시작하려 한다는 차이만 존재한다. 정옥 한 사람의 측면에서는 누군가의 시작을 통해 하나의 여정을 갈무리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로 여겨질 수 있다. 초경을 맞이한 소녀의 장난스런 불평에 대해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자신의 작은 위로가 스스로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초경이 그렇듯, 자신의 폐경 또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말이다.

 영화 <정옥> 스틸컷
영화 <정옥>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영화 <정옥>은 구조적으로 쉽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고, 인물의 관계나 서사 위에도 특별한 장치나 꼬임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감정의 깊이까지 얕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극적으로 이끌어내는 힘보다는 인물에 내재되어 있는 심정을 내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정서는 세상의 모든 여성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공유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어 보인다.

이제 혼자인 정옥의 얼굴에도 그늘이 지지 않는다. 초경이 그렇듯, 폐경 또한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으로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자신의 모두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봐 주는 이들의 곁에서.
덧붙이는 글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유통 배급 환경 개선을 위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는 2025년 3월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4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90편(장편 22편, 단편 68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두 번째 큐레이션인 '손에 꽉 쥐고'은 3월 16일부터 3월 30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정옥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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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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