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
<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엣나인필름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방송 제작자 '제임스'는 동종업계 종사자 '캐서린'과 결혼해 풍요롭고 성공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문란한 성생활에 탐닉한다. 기이한 건 아내도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 제임스는 난폭 운전을 즐기다 맞은편에서 오던 자동차와 충돌해 중상을 입는다. 상대편 운전자는 운전석에서 튕겨 나와 자신의 차 앞 유리에 머리가 박힌 채 죽어 있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1차로 놀란 제임스는 희생자 아내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모습에 2차로 당황한다. 기묘하게도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임스는 병원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누워 있다. 아내의 병문안을 받은 후 다친 몸을 이끌고 복도를 걷던 중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희생자의 아내 '헬렌'과 재회한다. 헬렌과 함께 있던 정체불명의 남자는 제임스에게 묘한 이야기를 남긴다. 퇴원 후에 사고로 부서진 차량을 확인하러 간 제임스는 같은 목적으로 주차장에 방문한 헬렌과 재회한다. 둘은 서로가 비슷한 성적 취향을 공유함을 알게 된다. 제임스는 헬렌과 함께 동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비밀 회합에 참석한다. 알고 보니 모임의 리더 격인 '본'은 헬렌과 병원에서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였다.

그들은 점점 본이 주도하는 모임에 빠져든다. 이들은 자동차 충돌 사고에서 기괴한 성적 쾌감을 찾는 이들이다. 현실의 권태로움에서 아득히 벗어난 성적 욕망은 이들을 생과 사의 경계로 이끌고, 여태껏 누려본 적 없던 극한의 긴장과 충동적 쾌락은 제임스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이것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중독성을 지녔다는 걸 알지만, 이미 한참 일상을 벗어난 그는 금단의 쾌락을 향해 더욱 깊이 빠져들어만 간다.

거장의 현대문명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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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엣나인필름

세기말을 상징하던 문화예술 결과물들은 서로 다른 지향과 장르인데도 동시대성으로만 설명 가능한 공감대를 지녔다. 인류가 이룩한 기술의 눈부신 성취, 하지만 그로 인해 스스로 멸망하게 만들 수 있는 파괴적 위력에 전율하고, 그런 두려움을 자아내는 인간에 관한 회의와 불신을 품었다. 대체 우리가 창조한 과학과 문명은 어디로 향할 것인지 통제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테크놀로지의 명암에 일찍부터 주목해 왔다. 그의 영화에선 텔레비전과 인간이 경계를 넘어 뒤섞이거나(<비디오드롬>), 입덧 방지용 약품의 부작용으로 초능력자가 양산된다(<스캐너스). 가상현실 게임과 실제의 경계는 무너지며 동기화하고(<엑시스텐즈>), 인간이 파리와 융합하며 붕괴하는 과정을 그린다(<플라이>). '불쾌한 골짜기'를 시험하듯 그의 영화는 나올 때마다 선정성과 불편함으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 명성(?)은 크로넨버그의 본령과는 거리가 멀다. 얼핏 극한의 호러 영화로 비칠 수 있지만, 감독의 영화는 인간이 상상하는 통념의 한계를 초월해 내면의 복잡하고 설명 불가능한 심연을 끄집어내고, 인간이란 종의 변화 종말점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지적 모험으로 끝없이 치닫는다. 꿈에 튀어나올까 두려울 만큼 끔찍하고 끔찍한 이미지의 향연은 단지 그런 초현실적 체험으로 인도하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문명비판과 인간의 무의식 속 욕망 탐구에 매진해 온 거장의 작업 중에도 가장 상징적인 결실 중 하나로 <크래쉬>를 지목하는 건 당연한 통과의례가 된다. 텔레비전, 현대의학, 비디오 게임, 장기 이식 등 어느 하나 굵직하지 않은 소재가 없지만, 현대인과 자동차만큼 불가분의 관계가 또 있을까? 무엇보다 자동차란 공업제품은 제조업의 총아이자 결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대 산업 문명의 정수로 꼽기에 부족할 게 없는 존재다. 자동차 엔진과 완성품을 완결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해당 국가의 산업 능력과 국력의 척도인 것이다. 우리에게 자동차가 너무 익숙해져서 오히려 그런 실체에 둔감해진 것이다.

거대 사회에서 개인은 개성을 잃어감과 동시에 소외에 휩싸인 모순적 존재다. 익명성을 추구하면서도 정서적 유대를 갈구하고, 타인과 어울릴 기회를 찾으면서도 '자기만의 방'을 원한다. 하지만 정작 마음 편하게 전유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도 어렵다. 의외로 집은 역할을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시 주거 최고 말단에 속한 고시원이나 원룸 등은 마음 편하게 음악 듣기도 쉽지 않은 조건이다. '집'을 갖고 있더라도 대개 가족과 함께 살기에 눈치를 봐야 한다. 자신만의 자유롭고 안전한 공간은 도무지 찾기 힘들다.

의외로 묵직한 인간 내면 탐구

 <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
<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엣나인필름

이런 역설적 상황에서 적지 않은 이들은 집보다 자가용 차량에서 '자기만의 방'을 찾곤 한다. 현대 사회에서 집이 단순한 주거 목적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과 투자수단, 사회적 계급의 표상으로 변한 것처럼, 자가용 역시 단순한 이동 수단의 편리함을 초월한 지 오래다. '카푸어'란 사회적 용어가 범람하듯 자가용과 차주를 동일시하는 인식이 팽배한 것은 사회적으로 지양할 폐단이긴 하지만, 그만큼 자동차가 갖는 복잡한 성격의 일단을 드러내는 계기인 셈이다.

감당하기 힘든 고가 수입 자동차를 할부로라도 구매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성행위 장소를 포함한) 숙박 편의 때문이다. 웃을 일이 아니다. 집이 아닌 장소에서 성적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자동차는 그저 교통수단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시트에 열선을 도입하고 리클라이너 기능을 강화하는 등에는 이유가 있는 법. 드러내기 힘든 목적 외에도 집에선 누릴 수 없는 나만의 요새로 활용하고자 카 오디오와 엔터테인먼트 기능 강화는 필수다. 그렇게 자동차는 '비밀의 방'이자 음악감상실, 취미생활 공간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집보다 차에서 보내는 비중이 더 늘 정도다.

그렇게 일상생활에 마치 몸의 확장처럼 친숙해진 자동차는 <크래쉬>에서 마침내 성적 행위 주체로 승격한다. 처음 보면 엽기적 상상력에 충격과 공포에 빠질 테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은유하는 정수를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인간 육체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와 기계의 지원을 받는 건 이미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현상이다. 성욕을 위해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거나 기구를 사용하는 건 쉬쉬할 뿐 폭넓게 활용되는 중이다. 산업의 정수이자 일상의 동반자인 자동차가 빠질 이유가 없다.

영화 속 제임스와 캐서린은 프로그램이 제작되는 스튜디오 밖 도시의 전망을 바라보며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이 마치 의지로 어디론가 향하듯 보인다며 대화를 나눈다. 자동차가 인격을 갖추고 교감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남편을 사고로 죽게 만든, 어찌 보면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 제임스와 재회한 헬렌은 그날의 기억을 품은 박살이 난 자동차 안에서 순간적인 성욕을 느끼고, 충동으로 빠져든다. 마치 만신창이가 된 자동차에 그날 사고의 기억, 아니 자신이 그 안에서 겪은 성적 욕구가 응축된 것 마냥.

이것을 단순하게 변태성욕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권태로운 도시의 삶 속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 찰나를 그리워하며 자극을 쫓는 행태는 오늘날 익숙해진 현대인의 초상이 된다. 물론 도덕적으로 옹호하기란 어렵다. 충격적인 불륜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임스는 기묘한 컬트 집단 리더 본과 만나며 그가 벌이는 재연 쇼에 깊숙하게 빠져든다. 이들은 교통관리국 추적을 피해 그들만의 이벤트를 즐긴다. 제임스 딘, 제인 맨스필드, 그레이스 켈리, 알베르 카뮈 등 자동차 사고로 최후를 맞이한, 하지만 대중문화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이들의 사건을 공들여 재현하는 목숨 건 이벤트다.

그들은 점점 도착 상태로 빠져든다. 영화는 극도로 절제하며 인물들의 기상천외한 탐닉을 화면에 차례로 표현한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야말로 아찔한 장면이 도를 더 해간다. 포르노 수준 표현을 거장다운 자제력으로 최소화하지만, 관객은 상상하는 것만도 감당하기 힘든 수위다. 그러나 선정적 효과보다 괴이함이 우선되고, 상식과 동떨어진 집착에 당혹하며 어떻게 반응할지 혼란할 따름이다. 이러다 인간과 자동차가 섹스하는 지경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 괜히 두려울 지경이다.

문제적 걸작의 진면목

 <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
<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엣나인필름

이 영화는 처음 탄생할 때나, 2025년 현재나 여전히 충격적이고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다. <크래쉬>를 혐오하거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취급해도 딱히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영화는 평범한 이들에겐 악몽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모든 예술작품이 바람직하고 도덕적일 순 없다. 오히려 금기와 경계에 도전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크래쉬> 역시 그런 유형의 일부, 아니 최전선에 선 작업일 테다.

특히 한국에서 이 작품의 흔적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크래쉬>는 1996년 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하지만 사전심의 탓에 일부 장면이 삭제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원작자와 감독도 언급할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 후진적 사례다. 그런 망신 끝에 국내에서도 영화제 출품작은 등급면제분류가 가능해졌다. <크래쉬>가 겪은 수난 덕분에 한국 관객들은 영화제에서 최대한 금기를 넘나드는 문제작을 있는 그대로 관람하게 된 것이다.

그런 영화가 극장에 귀환한다. 검열의 악몽이 사라져 무삭제 판본으로 볼 수 있어 사실상 감독의 의도 그대로 최초 관람할 기회다. 30년이 지난 시간 덕분에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자동차도 엄청난 진화를 거듭했다. 산업 기계의 대표 격이던 게 이제 IT 플랫폼까지 뒤집어쓴 존재가 되었다. 그로 인해 영화에서 은유하던 인간과 과학기술의 융합, 마치 AI 도움에 힘입듯 기억과 욕망을 활성화하던 <크래쉬>의 파괴적 매혹은 더 현실과 가까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세대가 흘렀음에도 여전히 영화가 보여주는 비전은 파격적이다.

 <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
<크래쉬: 디렉티스컷> 스틸㈜엣나인필름

<작품정보>

크래쉬: 디렉터스컷
Crash
1996|캐나다|범죄, 드라마
2025.03.26. (재)개봉|100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출연 제임스 스페이더, 홀리 헌터, 엘리어스 코티스
원작 제임스 G. 발라드 - 소설 《크래시》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1996 49회 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1996 카이에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1위

 <크래쉬: 디렉티스 컷> 포스터
<크래쉬: 디렉티스 컷> 포스터㈜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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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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