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슨 타이드> 스틸컷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크림슨 타이드>는 진 핵크만의 작품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영화다. 시종 긴장감 있는 연출로 잠수함 영화 가운데 손꼽는 명작일 뿐 아니라, 진 핵크만의 장기가 선명히 드러나는 장면이 단연 많기 때문이다. 진 핵크만은 190cm 가까운 키에 건장하고 단단한 몸, 과묵함이 어울리면서도 분노할 땐 폭발력 있는 발성을 낼 줄 아는 배우였다. 감성을 넘어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연기는 분노나 열정이 실렸을 땐 보는 이에게 충격적인 파문을 남기기 충분했다.
특히 좁은 곳에서 그의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연기가 뿜어져 나올 때는 공간 전체를 지배한다 해도 좋을 만큼의 존재감이 느껴지곤 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 속 침몰하는 배나 <크림슨 타이드>의 잠수함에서 그의 연기가 특별히 기억되는 데는 그러한 영향이 있을 테다.
<크림슨 타이드>는 잠수함 영화의 한 전형을 세웠다고까지 평가받는 명작이다. 4년 뒤 나온 한국영화 <유령>이 사실상 유사한 줄거리를 채택했고, 또 다른 잠수함 영화 < 강철비2: 정상회담 >에서도 유사한 설정이 여럿 엿보일 정도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에서 극우정치인 블라디미르 라첸코가 내전을 일으켜 핵기지를 점령하고 미국에 핵 공격을 가하겠다며 협박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미국 핵잠수함 앨라배마는 러시아 근해로 출동해 반군이 점거한 핵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반군이 핵미사일 발사코드를 확보해 미국 본토에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커졌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는데 러시아 측 잠수함이 나타나 앨라배마를 요격하려 하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통신을 위해 띄운 부이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통신문이 '핵미사일 발 Nuclear Missile Laun'까지만 수신된 가운데, 아예 통신기기까지 고장이 나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 된다. 물 위 러시아에서 핵무기가 당장 발사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미국 본토를 지키기 위해 불확실한 명령만 믿고 미사일을 발사할지, 되돌릴 수 없는 사태를 피하려 일단 대기할지를 두고 함장과 부장이 의견을 달리한다.
진 핵크만은 독불장군 함장 프랭크 램지를 연기했다. 골수까지 군인, 해군, 잠수함 함장인 인물로, 그의 삶에서 함장을 빼놓고는 도대체가 무엇이 남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램지에게 최우선의 가치는 상명하복으로, 제 명령에 승조원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저 또한 그와 같이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못해 넘쳐흐른다.
격렬하고 폭력적이지만 현실적이며 우수어린
▲<크림슨 타이드> 포스터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그에 대항하는 부장은 론 헌터(덴젤 워싱턴 분)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하드코어 참군인인 램지와 모든 면에서 대비되는 인물로, 영화는 더없이 섬세한 설정으로 그를 지적이면서도 온화하고 신중한 지휘관으로 빚어냈다. 일단 명령이 떨어졌으니 미사일을 쏘고 봐야 한다는 램지와 확실하지 않다면 경거망동할 수 없다는 헌터가 치열하게 맞붙는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둘의 대립은 그저 논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헌터가 램지를 감금하고 그 지휘권을 넘겨받는 사태가 벌어지며 갈등은 되돌릴 수 없을 지경이 된다.
진 핵크만은 시종 강렬한 존재감으로 헌터와 그 지지자들을 몰아붙인다. 벼랑 끝까지 몰린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를 뚫어내고 함정을 되찾고 마지막까지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의지를 내보인다. 램지와 헌터가 대치하는 여러 장면들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요소인데,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헌터와 격렬하게 그를 몰아붙이는 램지의 극명한 대조가 시종 긴박하게 이어진다. 특히 핵미사일 발사를 할 수 있는 열쇠를 내놓으라며 헌터에게 호통치고 주먹을 날리는 램지의 모습은 <크림슨 타이드>는 물론, 진 핵크만 연기 전반을 통틀어서도 기록할 만큼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진 핵크만과 덴젤 워싱턴, 불과 물을 연상케 하는 뜨겁고 차가운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이토록 첨예하게 대립하는 순간은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진 핵크만은 그저 격렬하고 폭력적인 인물만을 연기하지 않는다. 그가 표출하는 열기 뒤엔 짙은 쓸쓸함이며 회한이 깃들어 있다. <크림슨 타이드> 속 램지 함장에게 그저 개 한 마리뿐인 개인의 삶이 있는 것처럼, <용서받지 못한 자> 속 보안관의 카리스마 가운데도 주저하는 순간들이 자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장하지 않고 진짜 인간의 일면을 구현하는 데 최선을 다했던 배우, 가장 거짓된 순간조차 진실하게 연기한 진 핵크만의 명복을 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