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슨 타이드> 스틸컷
<크림슨 타이드> 스틸컷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달 가까운 수사 끝에 미궁에 빠졌던 배우 진 핵크만 부부 사망사건 수사가 종결됐다. 외부침입 등 범죄정황은 물론, 통상의 자살흔도 발견되지 않아 검시를 포함한 수사가 진행된 결과다.

1930년 생으로 95세의 고령이던 진 핵크만이 알츠하이머와 심장병까지 상당한 건강문제를 겪고 있었단 건 영화계에서도 알려진 일이었다. 사망 얼마 전엔 제법 나이든 시절까지도 유지하던 건장한 체구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한 채로 사진이 찍혀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30살 연하의 아내 베치 아라카와가 건강하게 그를 곁에서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더구나 기르던 개 한 마리까지 숨진 채로 발견됐다는 사실은 '철저한 수색과 조사가 필요하다'는 보안관 수사 보고로 이어졌다. 오스카를 두 차례 받았고 후보로도 자주 거론됐던 할리우드 명배우의 석연찮은 죽음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전후해 할리우드를 놀라게 했다.

오랜 수사 끝에 경찰은 이들의 죽음이 범죄나 자살이 아니라고 최종 결론 내렸다. 베치는 희귀 전염병인 한타바이러스로 사망했고, 일주일이 지나 진 핵크만의 이상 심장박동이 의료기기로 확인됐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던 그가 아내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판단이 뒤따랐다. 죽은 개는 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로써 진 핵크만 부부 사망사건은 종결됐다.

세상 떠난 전설적 배우, 그를 기리는 법

 <크림슨 타이드> 스틸컷
<크림슨 타이드> 스틸컷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진 핵크만은 40대 이상의 할리우드 영화팬에겐 친숙한 인물이다. 1970년대부터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 주연배우로 꾸준히 캐스팅됐고 1990년대 이후엔 조연으로도 대단한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고, 그가 아닌 다른 누구도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본능적이고 파괴력 있는 연기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오스카를 안긴 두 작품, <프렌치 커넥션>과 <용서받지 못한 자>를 비롯해 <컨버세이션>·<우리에게 내일은 없다>·<포세이돈 어드벤처>·<머나먼 다리>·<슈퍼맨>시리즈 <노 웨이 아웃>·<미시시피 버닝>·<야망의 함정>·<크림슨 타이드>·<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너미 라인스>·<로얄 테넌바움> 등 대표작이라 할 만한 영화가 한 다스는 된다. 특히 남다른 존재감으로 분위기를 휘어잡는데 능해 위 영화들을 본 사람이라면 진 핵크만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는 장면을 몇쯤은 즉각 떠올릴 수 있다.

사람이 떠난 뒤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일은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일이다. 철학자이자 비평가였던 롤랑 바르트는 '애도하는 이는 속없는 이가 아니며 도덕적이고 귀중한 주체'라고 했다. 추모와 애도는 일차적으로 죽음의 충격을 완화하는 일일 뿐 아니라, 죽은 자의 뜻과 업을 기리고 그의 지나온 길이 덧없지 않음을 깨우쳐 공감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인간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직간접적으로 공유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 그를 근본적으로 나아지게 하는 계기를 얻는다.

위의 작품군에서 알 수 있듯이 진 핵크만은 한국에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명배우다. 그 대표작 모두가 한국에서 개봉했고, 그 상당수가 커다란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의 죽음을 두고, 심지어는 영화 전문 매체조차도 그의 작품이며 연기를 제대로 소개하지 않으니, 지난 20년 간의 활동 공백이며 오늘의 인기에만 민감한 연예계와 언론의 생리를 감안하더라도 안타까움이 크다.

압도적인 존재감, 본능적인 연기

 <크림슨 타이드> 스틸컷
<크림슨 타이드> 스틸컷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크림슨 타이드>는 진 핵크만의 작품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영화다. 시종 긴장감 있는 연출로 잠수함 영화 가운데 손꼽는 명작일 뿐 아니라, 진 핵크만의 장기가 선명히 드러나는 장면이 단연 많기 때문이다. 진 핵크만은 190cm 가까운 키에 건장하고 단단한 몸, 과묵함이 어울리면서도 분노할 땐 폭발력 있는 발성을 낼 줄 아는 배우였다. 감성을 넘어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연기는 분노나 열정이 실렸을 땐 보는 이에게 충격적인 파문을 남기기 충분했다.

특히 좁은 곳에서 그의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연기가 뿜어져 나올 때는 공간 전체를 지배한다 해도 좋을 만큼의 존재감이 느껴지곤 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 속 침몰하는 배나 <크림슨 타이드>의 잠수함에서 그의 연기가 특별히 기억되는 데는 그러한 영향이 있을 테다.

<크림슨 타이드>는 잠수함 영화의 한 전형을 세웠다고까지 평가받는 명작이다. 4년 뒤 나온 한국영화 <유령>이 사실상 유사한 줄거리를 채택했고, 또 다른 잠수함 영화 < 강철비2: 정상회담 >에서도 유사한 설정이 여럿 엿보일 정도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에서 극우정치인 블라디미르 라첸코가 내전을 일으켜 핵기지를 점령하고 미국에 핵 공격을 가하겠다며 협박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미국 핵잠수함 앨라배마는 러시아 근해로 출동해 반군이 점거한 핵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반군이 핵미사일 발사코드를 확보해 미국 본토에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커졌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미사일을 발사하려는데 러시아 측 잠수함이 나타나 앨라배마를 요격하려 하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통신을 위해 띄운 부이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통신문이 '핵미사일 발 Nuclear Missile Laun'까지만 수신된 가운데, 아예 통신기기까지 고장이 나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 된다. 물 위 러시아에서 핵무기가 당장 발사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미국 본토를 지키기 위해 불확실한 명령만 믿고 미사일을 발사할지, 되돌릴 수 없는 사태를 피하려 일단 대기할지를 두고 함장과 부장이 의견을 달리한다.

진 핵크만은 독불장군 함장 프랭크 램지를 연기했다. 골수까지 군인, 해군, 잠수함 함장인 인물로, 그의 삶에서 함장을 빼놓고는 도대체가 무엇이 남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램지에게 최우선의 가치는 상명하복으로, 제 명령에 승조원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저 또한 그와 같이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못해 넘쳐흐른다.

격렬하고 폭력적이지만 현실적이며 우수어린

 <크림슨 타이드> 포스터
<크림슨 타이드> 포스터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그에 대항하는 부장은 론 헌터(덴젤 워싱턴 분)다. 밑바닥부터 올라온 하드코어 참군인인 램지와 모든 면에서 대비되는 인물로, 영화는 더없이 섬세한 설정으로 그를 지적이면서도 온화하고 신중한 지휘관으로 빚어냈다. 일단 명령이 떨어졌으니 미사일을 쏘고 봐야 한다는 램지와 확실하지 않다면 경거망동할 수 없다는 헌터가 치열하게 맞붙는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둘의 대립은 그저 논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헌터가 램지를 감금하고 그 지휘권을 넘겨받는 사태가 벌어지며 갈등은 되돌릴 수 없을 지경이 된다.

진 핵크만은 시종 강렬한 존재감으로 헌터와 그 지지자들을 몰아붙인다. 벼랑 끝까지 몰린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를 뚫어내고 함정을 되찾고 마지막까지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의지를 내보인다. 램지와 헌터가 대치하는 여러 장면들은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요소인데,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헌터와 격렬하게 그를 몰아붙이는 램지의 극명한 대조가 시종 긴박하게 이어진다. 특히 핵미사일 발사를 할 수 있는 열쇠를 내놓으라며 헌터에게 호통치고 주먹을 날리는 램지의 모습은 <크림슨 타이드>는 물론, 진 핵크만 연기 전반을 통틀어서도 기록할 만큼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진 핵크만과 덴젤 워싱턴, 불과 물을 연상케 하는 뜨겁고 차가운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이토록 첨예하게 대립하는 순간은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진 핵크만은 그저 격렬하고 폭력적인 인물만을 연기하지 않는다. 그가 표출하는 열기 뒤엔 짙은 쓸쓸함이며 회한이 깃들어 있다. <크림슨 타이드> 속 램지 함장에게 그저 개 한 마리뿐인 개인의 삶이 있는 것처럼, <용서받지 못한 자> 속 보안관의 카리스마 가운데도 주저하는 순간들이 자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장하지 않고 진짜 인간의 일면을 구현하는 데 최선을 다했던 배우, 가장 거짓된 순간조차 진실하게 연기한 진 핵크만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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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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