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스틸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스틸시네마 달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수빈(1985년생)과 황지영(1993년생), 두 사람은 공연예술가다. 그중에도 요즘 세대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여성국극' 활동에 꽂혀 있다. 잊힌 여성국극을 알리고자 관객만 있다면 팔도 어디든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열정이 가득하다. 어릴 적부터 판소리가 좋았고, 여성만으로 구성된 과거의 인기 장르에 관한 관심과 애정이 뜨겁기만 하다.

그런 둘에겐 '사부님'으로 모시는 존재가 있다. 여성국극 1세대의 거의 마지막 스타, 마치 '살아있는 화석'과도 같은 조영숙(1934년생) 명인이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전성기 여성국극의 기억을 간직하고 전수하는 명인에게 두 사람의 젊은 제자는 손녀와도 같다. 그는 둘의 어릴 적부터 성장 과정을 쭉 지켜봐 왔다. 대견하기 그지없지만, 당최 소외된 여성국극 부활을 위해 안간힘 쓰는 그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박수빈과 황지영은 경외하는 조영숙 명인을 비롯해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앞 세대 선배들을 기념하는 이벤트를 계획한다. 물론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반드시 이 프로젝트만은 성사하고 싶다. 그렇게 3세대 여성국극 활동가들은 1세대와 2세대 선배들을 한데 모은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다시 부흥을 꿈꾸는 '여성국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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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이란 것을 처음 접한 건 2013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이었다. 그 이전에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셈이다.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알아도 정작 자국에서 한때 큰 인기를 얻었던 독창적인 장르엔 무지했던 터라 보고 나서 퍽 무안했던 기억이다. 해방 전후 태동해 195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이 어떻게 이토록 잊힌 존재가 된 것인지 영화를 보면서 파악할 수 있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주변에 수소문해 보니 어렴풋하게라도 기억하는 이들이 제법 되어 놀랐다, 영화에서 침소봉대한 게 아니라 실제로 확고한 인지도와 전성기를 구가하던 장르였다.

아직 텔레비전도 보급되지 않고 상설극장도 제한적이던 시절, 여성국극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킬 법해 보였다. 요즘 뮤지컬이나 오페라 인기를 고려하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강조한 지점은 당시 시대상과 연결해 가난에 찌들고 여전히 억압받던 여성들의 특별한 호응이었다. 모든 캐릭터를 여성이 담당했던 특성이 빚어낸 과거의 페미니즘 관련 특이점도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이후 활발하게 독립 다큐멘터리 진영에서 제작된 과거 한국사회의 여성주의 효시 발굴과 연동하는 대목인 셈이다.

<왕자가 된 소녀들>을 재미있게 보고 나니 관련 내용이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영화에서 여성국극의 상징 중 하나이던 임춘앵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만화 <춘앵전>이 몇 해 전 출간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언급된 남장 배우와 열혈 팬층의 관계나 여성국극의 흥망성쇠를 좀 더 상세하게 접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웹툰으로 제작된 <정년이>는 얼마 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인기와 화제를 누린다. 아마 신세대 대중에겐 해당 드라마가 여성국극의 존재와 처음으로 만나는 가교가 되었을 테다.

<정년이>의 여세를 잇듯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이란 엄청난 제목의 신작 다큐멘터리가 극장가에서 봄을 맞이하려 준비 중이다. 출판·웹 만화가 복원한 과거의 찬란한 전성시대, <왕자가 된 소녀들>이 보여준 덧없는 영락과 끈질긴 명맥에 이어 본 작품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부활의 기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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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과 오페라가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서구에서 기인한 양식 위주인 게 사실이다.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 연희는 공공 지원에 의지해 대를 잇는 상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왕자가 된 소녀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195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성국극은 애꿎게 큰 인기를 누리는 바람에 국가의 전통예술 보호를 받지 못해 급속도로 쇠퇴하는 비극을 맞았다. (영화에선 여성 위주 공연형태에 반감을 품은 기득권 남성 권위주의에 책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 결과,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도, 상업적인 기회에서도 모두 배제된 여성국극은 당대 인기가 무색하게 사그라든 셈이다.

그런데도 엘리트 국악 전공자들은 왜 굳이 비인기, 심하게는 소멸 위기의 여성국극에 매료된 걸까. 영화의 초반부는 3세대 공연자 박수빈과 황지영의 여정을 따르며 그들이 걸어온 길과 속내를 관객에게 풀어내는 데 주력한다. 한눈에 봐도 들러리인 동네 행사, 구색 갖추기가 뻔한 소규모 공연도 불사하며 두 사람은 캠핑카에 몸을 싣고 전국을 누빈다. 자신들이 인생을 건 장르를 한 명이라도 더 알아줬으면 하는 소망이 아니라면 힘든 행보다.

그런 이들에겐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 드라마 <정년이>의 실제 모델이자 자문역으로 참여했던 조영숙 명인이다. 90살이 된 고령이지만 지금도 현역으로 공연에 나서는 건 물론, 1세대의 마지막 생존자 중 하나로 여성국극의 화신 같은 존재다. 사부님 모시고 어떻게 자신들이 투신한 여성국극의 가치를 알릴까 고심하던 박수빈과 황지영은 고대 유물 취급을 벗어나 현대적 공연으로, 그것도 옆 나라 잎본의 다카라즈카처럼 제대로 된 무대에 올리자는 궁리를 꺼낸다. 물론 맨땅에 헤딩하기다. 하지만 일본 현지를 방문해 대기업의 후원으로 웅장한 전용관에서 열리는 다카라즈카 공연을 본 이들은 여성국극을 지켜온 이들도 그만한 예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중반부는 이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여기저기 아쉬운 소리와 부탁해 가며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공연 준비하는 여정을 추적한다. 짠 내 난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다. 수십억은 필요한 대형 공연을 손에 쥔 종잣돈 한 푼 없이 하겠다니 말이다. 이미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여성국극이라 후원 모집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홍보에도 다들 무관심하다. 과연 공연이 가능할지 보고 있어도 통 믿음이 가지 않는다.

공연할 팀원을 모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둘은 회심의 무대가 여성국극 세대를 아울러 시대를 초월하는 장르의 매력과 부흥의 신호탄이 되길 희구한다. 자신들만으론 역부족이 확연하다. 하지만 곳곳에 흩어진 1세대 마지막 생존자와 수난을 감수하며 실낱같은 명줄을 지켜온 2세대 몇 안 남은 선배들 찾아다니며 한 명, 한 명 끌어오는 게 품이 여간 아니다. 마침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공연은 본격적으로 준비에 돌입한다. 화면에 'D-50'이 자막으로 등장한다.

현재의 무대예술로 부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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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역경을 딛고 성공적인 공연만 남은 듯하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이 무대에 올릴 공연은 '레전드 춘향전', 여성국극 황금시대의 대표 래퍼토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세대를 아우르는 공연자들이 여성국극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하려는 야심작이다. 이를 위해 주요 배역은 과감히 세대별 연기자가 조합되어야 한다. 상징성을 위해선 당연히 고안할 만한 방법이다.

그러나 공연을 기획한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속속 터진다. 1세대와 3세대는 할머니와 손녀보다 더 나이 차이가 크다. 공연 홍보 카피 중 하나는 심지어 '93세 대 93년생'일 정도다. 이 정도면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2세대라 해도 1940년대생들과 세대 차이가 아득하다. 원로 연기자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공연했던 정통에 따르려 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대사 한 마디조차 과거와 현재가 안 맞다. 초고속 압축 성장의 대명사 현대 한국 사회답게 언어의 변천도 가파르다. '아'와 '어'만 달라도 느낌이 확 변하는데 큰일이다.

박수빈과 황지영은 춘향전을 현대적으로, 여성주의적 재해석을 가하고자 피력한다. 그러나 선배들에겐 여성국극의 전통을 훼손하는 것처럼 비친다. 분위기가 미묘해진다. 선배들끼리도 의견이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 모양새다. 과거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지 불편한 구석도 엿보인다. 오순도순하기만 할 것 같던 신구 여성국극 전수자들이 모인 연습실은 순간순간 복잡한 기운이 소용돌이친다. 오랜만에 큰 무대 오르려니 노구의 1/2세대 선배들 몸 상태도 예전 같지 않다. 대형 무대에서 현대적 공연 연출을 위해 조명을 절제하니 눈이 침침해 넘어질까 봐 당황하는 모습이 웃프다.

일단 모든 배역을 여성 연기자가 담당하니 얼핏 여성주의적 분위기 가득할 것 같은데, 오히려 이몽룡은 훈남이니 성춘향은 더 고전적 여성미를 강조해야 한다는 선배들 입장 vs. 좀 더 능동적 캐릭터로 춘향을 탈바꿈하려는 후배들 시각이 충돌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여성국극 용어로 여성형 주연은 '이마이', 남성형 주연은 '삼마이', 반동인물이자 '빌런' 역할은 '가다끼'라 호칭하는데, 과거 공연에서 가장 핵심은 '삼마이'에 집중되었다. <왕자가 된 소녀들>이나 <정년이>를 보면 금방 이해될 대목이다. 선배들은 각자 오랜 세월 전담해 왔던 역할에 쉽게 자리를 잡는다. 역시 고수들은 다르다.

문제는 3세대 핵심 황지영이다. 삼마이 역 박수빈은 별 애로가 없다. 하지만 이마이 캐릭터 황지영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1세대 선배들은 삼마이가 돋보이기 위해 이마이가 여리여리하고 가냘파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지영에게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거나, 배역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하다. 아마 처음으로 3세대가 선배들과 대립하는 순간일 테다. 그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못했을 게다.

영화는 우여곡절 이어가며 2023년 '레전드 춘향전'으로 향하는 여정을 차근차근 밟는다. 막바지에 장대한 공연 무대를 보고 있자면, 마치 공연의 제작과정 다큐멘터리 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여성국극의 전환점을 기대하며 진행된 역사적 공연 역시 그들이 일으키려는 새로운 파도의 서막에 불과하다. 이유는 공연 에필로그가 설명해준다. 참으로 오랜만에 맞는 여성국극 부활의 노래로 다큐멘터리는 제 몫을 수행하길 기다리는 중이다.

<작품정보>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Women's Gukgeuk: Enduring on the Edge of Time
2025|한국|다큐멘터리
2025.03.19. 개봉|104분|12세 관람가
연출 유수연
출연 조영숙, 박수빈, 황지영, 이소자, 이옥천, 김성예, 이미자
제작 더 액티비스트
배급 시네마 달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포스터
<여성국극 끊어질듯 이어지고 사라질듯 영원하다> 포스터시네마 달




여성국극끊어질듯이어지고사라질듯영원하다 유수연감독 조영숙 박수빈 황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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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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