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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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네타냐후는 현재 이스라엘의 총리이자, 현재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우는 이스라엘-중동 전쟁의 핵심인물로 꼽힌다. 네타냐후는 역대 최장수 이스라엘 총리이자 극우 세력의 리더로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주변국들과 끊임없이 대립하며 국제사회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최근 국제형사재판소는 네타냐후에게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또한 네타냐후는 자국 내에서도 사기·배임 혐의와 가족 비리 스캔들 등이 연이어 터지며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는 상황에서도 네타냐후가 끊임없이 전쟁을 고집하며 강경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1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이-팔전쟁, 네타냐후는 왜 전쟁을 계속하나' 편을 조명했다. 성일광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네타냐후는 1949년 10월 21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보수적인 유대교 가문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형적인 유대인 극우(시오니즘) 가문이었다.

네타냐후는 8세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7세가 되던 1967년 '3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형제와 함께 이스라엘로 귀국해 자원입대한다. 당시 네타냐후는 입대연령 미달이었고 미국 이중국적을 보유하고 있어서 굳이 참전의무가 없었음에도, 본인의 애국심으로 입대를 자원했다고 한다. 5년간 이스라엘군 특수부대에서 군 복무를 마친 네타냐후는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MIT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만큼 촉망받는 엘리트로 성장했다.

네타냐후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형의 죽음'

1976년 6월, 네타냐후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서 이스라엘 여객기를 하이재킹하여 인질극을 펼치다가, 이스라엘 대테러부대에 진압된 '엔테베 작전'이다.

네타냐후의 형 요나단은 이 작전에 특공대장으로 투입됐다가 테러리스트들과 총격전 중 유일하게 전사했다. 형을 롤모델로 동경했던 네타냐후는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네타냐후의 팔레스타인을 향한 적개심과 정치적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네타냐후는 형의 이름을 딴 반테러 연구소인 '요나단 연구소'를 설립하는가 하면, 미국 경험을 살려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의 부대사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1988년에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극우 정당인 리쿠르당의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38세의 나이에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에 나서게 된다.

1996년에는 소속이던 리쿠르당이 이스라엘 총선에서 승리하며 네타냐후는 불과 46세의 나이에 최연소 이스라엘 총리로 부임하게 된다. 강경파였던 네타냐후는 반테러를 내세운 안보정책으로 불안한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집권 1기 당시만 해도 평화를 강요하는 미국 정부의 눈치를 봐야 했던 사정상, 네타냐후는 처음부터 강경한 본색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네타냐후가 집권하기 3년 전인 1993년 미국의 중재 속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간에 분쟁종식을 위한 '오슬로 평화 협정'이 체결된 상태였다.

이어 네타냐후는 1999년에 팔레스타인의 주권 인정과 영토 양보에 합의한 '와이리버 수정 협정'을 체결하게 되면서, 지지층인 극우파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여기에 이스라엘 경제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며 지지율이 하락한 네타냐후는 그해 총선에서 패배하며 별다른 업적없이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2000년대 중후반 들어 레바논의 헤즈볼라-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반이스라엘을 표방하는 강경 무장단체들의 득세, 적대국 이란의 핵개발 등으로 이스라엘의 안보 위기가 높아진 것은, 네타냐후에게 정치적 재기의 기회가 됐다. 네타냐후는 강경파와 극우층의 지지를 얻어 2009년 59세의 나이로 10년 만에 두번째 총리직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2017년 도널트 트럼프의 집권은 미국-이스라엘 관계에 전환점이 됐다. '유대인 정착촌' 확장 문제 등을 놓고 네타냐후와 극우파를 견제했던 전임 오바마 행정부와는 달리, 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인하고 미국 대사관 이전을 결정하는 등 기존의 중동정책을 뒤집는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노선으로 네타냐후의 든든한 아군이 됐다.

미국은 유대계의 영향력이 강하며, 트럼프의 지지층인 미국 보수 유권자들은 친이스라엘 성향이 뚜렷하다.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은 네타냐후는 2021년까지 무려 12년간이나 총리로 장기집권하며 굳건한 위상을 과시했다.

네타냐후에게 찾아온 정치적 위기

승승장구하던 네타냐후에게도 정치적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네타냐후는 각종 뇌물 수수·사기·배임 혐의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며 2019년 11월 이스라엘 역사상 현직 총리로서는 재임중 최초로 기소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네타냐후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각종 스캔들에 휘말렸다. 네타냐후의 부인인 사라 네타냐후는 잦은 갑질 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폭로되며 국민 밉상으로 전락했다. 또한 네타냐후의 아들인 야이르 네타냐후는, 아버지 네타냐후가 이스라엘의 '가스 재벌'인 코비 마이몬과 유착해 200억 달러 규모의 거래를 제안했다는 내용을 언급한 통화 녹취록이 폭로돼 곤욕을 치렀다. 네타냐후는 자신의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지만 거듭된 스캔들로 지지율은 폭락했고 본인은 실형 위기까지 몰렸다.

궁지에 몰려있던 네타냐후에게 뜻밖에 생명연장의 기회가 된 것은 2021년 발발한 '가자 전쟁'이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이스라엘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리 교체를 미루는 데 합의했다.가자 전쟁 이후 하마스에 강경한 대응을 원하는 극우층을 결집시킨 네타냐후는, 2022년 12월 다시 열린 이스라엘 총선에서 승리하며 73세의 나이에 총리 6선에 성공한다.

네타냐후가 총리 복귀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른사 '사법 개혁'을 표방하며 총리 직무를 정지할 수 있는 대법원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이는 네타냐후 본인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기위한 방탄 입법이라는 비판이 거세졌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네타냐후의 사법개혁에 반발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외신들도 일제히 네타냐후를 비판했다.

2023년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한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사상 초유의 대량학살에 이스라엘과 전 세계가 경악했다. 정작 네타냐후 정권은 하마스의 기습에 무려 10시간가량이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며 안보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네타냐후가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경고하는 첩보를 보고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는 안이한 판단을 내린 것이 치명적인 실책이었다는 평가다.

네타냐후는 안보 실책에 대한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 '피의 보복'을 선언하며 전쟁을 통한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가자지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전기·음식·물·연료 등 필수자원들이 모두 차단됐고, 심지어 민간인 밀집지역에 수백 톤의 폭탄까지 투하해 수만 명이 사망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스라엘이 봉쇄작전이 반인륜적인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네타냐후는 "완전한 승리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며 하마스의 휴전제한도 거부하고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여기에 이란 영사관까지 공습하며 오히려 전선을 3개로 더욱 확대하기까지 했다.

국제 전문가들은 강경한 전쟁을 고집하는 네타냐후의 진짜 목적이 결국 총리직 유지와 정치생명 연장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네타냐후는 휴전 반대를 주장하는 이스라엘 극우파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최근 적대세력인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수장들을 암살과 공습 등으로 연이어 제거했다. 이란과는 본토에 미사일 공습을 주고받았으며, 헤즈볼라의 주요 기점인 레바논 전역에서 삐삐(무선호출기)로 위장한 폭탄을 대거 폭발시키는 충격적인 테러 공작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네타냐후의 막가파식 행보에 국제사회의 불안과 우려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쟁범죄 혐의' 체포영장... 푸틴·알바시르·카다피 이어 4번째

결국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 2024년 11월 네타냐후에게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 카다피 리비아 원수에 이어 국가 지도자로는 역대 4번째였다. 네타냐후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의 결정은 국가 안보를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네타냐후는 현재 자국 내에서도 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으나, 전쟁을 핑계로 계속해서 재판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2025년 1월 17일, 강경하던 네타냐후의 입장이 갑자기 변화하면서,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영구적 종전'을 목표로 하는 휴전 합의를 타결했다. 친이스라엘 성향의 트럼프가 4년 만에 미국 대통령으로 재집권하면서, 네타냐후가 트럼프를 위한 '외교적 선물'을 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첫 정상회담 상대로 네타냐후를 선택하는가 하면, 가자지구를 '중동의 휴양지'로 만들겠다는 파격적인 종전 프로젝트로 논란을 일으켰다.

휴전에 합의한 가자지구와는 달리, 서안지구에서는 팔레스타인과의 군사적 충돌과 상호 보복 행위가 계속해서 진행중이다.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네타냐후로서는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한 입장이다. 설사 휴전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이후에 네타냐후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무력은 모든 것을 정복하지만 그 승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영국 총리를 지낸 아서 네빌 체임벌린의 격언이다. 오래 집권 동안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분열을 이용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네타냐후의 행보는, 과연 훗날 역사의 평가에서는 '국가를 위한 선택'으로 기억될까. 아니면 '권력 유지를 위한 계산'으로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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