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우> 스틸
판씨네마㈜
등장 비인간 동물들은 대홍수를 벗어나기 위해 힘을 합쳐 서로 도와야만 한다. 하지만 재난 이전엔 나 몰라라 하거나 심지어 적대하던 존재들이 하루아침에 협력하기란 요원하다. 그나마 사회화 과정을 거친 인간조차 이기적 면모를 위기 상황에서 민낯으로 드러내기 일쑤인데, 애초 생태계 차원에서 종과 종 사이 분업은 있을지언정, 개별 개체 간에 대화나 협조 개념은 부재하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부류가 흔히 취하는 방식, 비인간 동물을 의인화시키는 손쉬운 방법론은 통용되지 않는다. 뜬금없이 인간의 언어, 영어나 불어, 일본어로 소통하는 장면은 영화 내내 한 차례도 선보이지 않는다. 각각 손짓, 발짓에 소리 질러가며 대충 입장을 확인하는 정도다. 식성도 특징도 상이하다. 하늘을 날고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뱀꼬리수리, 수영할 줄 알고 초식성인 카피바라, 땅에선 강점이 많지만, 사방이 물인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개... 구성원 중 일부는 항해와 생존에 유용한 능력이 있지만, 일부는 무용지물 천덕꾸러기에 가깝다.
비인간 동물들의 오순도순 재난 극복기를 기대하기엔 <플로우>는 생존물의 정석을 충실히 따른다.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분담해야 하고, 모두를 다 구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낡은 배를 의지하는 존재들은 선택의 순간마다 충돌하고 대립할 운명이다. 먹이를 구하는 능력자와 얻어먹어야 하는 자 사이에 서열도 자연스레 생긴다. <설국열차>에서 계급 대립처럼 무임승차자를 향한 시선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인간과는 다르면서도 흡사한 동물들의 관계 구축과 변화는 상업 작품에선 보기 드문 구현이다.
감독은 개별 동물들의 종 속성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이를 반영해 캐릭터를 구축한다. 대사 한 마디 들려주지 않고도 오직 표정과 동작, 소리로만 개체들 사이의 상황과 태도를 유추할 수 있도록 설정했다. 그러면서도 대사가 주는 명확한 의사 표현은 배제해 관객이 주체적으로 상상하고 추리할 여지를 남겨둔다. 인간이 온전히 소화하기 힘든 지점에서 최소한의 인격 설정을 통해 과도한 의인화 폐단을 방지하면서 진입장벽을 조절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마치 풍랑을 헤쳐가는 카피바라의 키잡이 조정실력처럼.
적자생존 본능은 여실히 <플로우>의 대홍수 상황에서 강조된다. 안경원숭이가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마치 인간처럼) 빛나는 수집품에 집착하는 면모는 그런 밉상이 없다. 들개 무리 중 붙임성 좋고 다른 종에 친화적이던 골든 리트리버 외의 다른 무리들이 버리지 못한 이기적 속성도 '빌런' 몫을 톡톡히 소화한다. 반면에 원래 다른 종을 이타적으로 돕는 것으로 유명한 카피바라나 고래는 위기 때마다 대가 없이 주인공 고양이나 다른 동물을 기꺼이 구조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고양이는 성장형 주인공으로 개성을 갖추게 된다.
대안적 세계를 향한 상상력을 충전할 기회
▲<플로우> 스틸
판씨네마㈜
인간이 왜 영화 속 세계에서 사라졌는지 이유는 끝내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정말 갑자기 모종의 이유로 인간이란 종만 실종되듯 없어진 건 분명하다. 인간은 없지만 그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낡아빠진 배는 주인공 동물들의 '방주'가 되어준다. 비인간 동물들만 남겨진 세상에 갑자기 일어난 대홍수는 인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세계를 열려는 것처럼 닥친다. 마치 동서양 공통으로 존재하는 대홍수 설화의 목적처럼 말이다.
비인간 동물 역시 그저 선하고 자연친화적인 존재일 순 없는 노릇이다. 그들 역시 서로 적대하고 각축을 벌이며 대홍수를 겪으며 도태되거나 멸종할 운명이다. 선량하다고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고, 잇속만 차린다고 무사할 수도 없다. <플로우>의 결말은 그런 자연의 파괴적 위력, 불가역적 법칙을 준엄하게 보는 이들에게 각인시킨다. 인간의 값싼 통념은 그들이 사라진 화면 속 세계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이란 그렇게 함부로 측량하기 불가능한 성질의 것이다. 오직 적응해야만 할 뿐이다. 이곳은 '멸망한 인간들의 바다'인 것이다.
여정의 끝에서 생존자들은 인간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쩌면 새로운 사회를 형성할 씨앗을 뿌린다. 물론 그 미래가 인간 본위로 상상하던 그것과는 무척 다를 테지만, '동물의 왕국'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단초는 예감할 수 있다. 함께 고난을 헤치며 역경을 이겨낸 서로 다른 종들의 유대관계는 학습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플로우>는 인색하지만은 않다.
이 탁월한 애니메이션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자연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각도에서 지구와 자연에 관해 서술해 나간다. 아름답고 신비한 그래픽으로 표현된 인류 멸망 이후의 지구, 비인간 동물들에게 경외감과 함께 섬뜩한 경고를 던지는 인간 문명의 잔해들, 그 안에서 봉착한 종말의 위기를 어떻게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소통해가며 새로운 전기를 형성할지 관한 대안적 상상력이 모두 들어 있는 경이로운 작품은 문명론적 고찰과 함께 현실의 아귀다툼을 초월한 장엄한 환상 체험으로 관객을 기꺼이 이끌어줄 것이다.
<작품정보>
플로우
FLOW
2024|라트비아/벨기에/프랑스|애니메이션/모험/판타지
2025.03.19. 개봉|85분|전체관람가
감독/각본/제작/음악 긴츠 질발로디스
출연 고양이, 골든 리트리버,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 그리고 고래
수입/배급 판씨네마㈜
2025 미국아카데미상 장편 애니메이션상
2024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관객상, 심사위원상, 음악상, Gan Foundation상
▲<플로우> 포스터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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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인간 사라진 세상, 고양이·골든 리트리버는 어떻게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