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스틸
(주)블루라벨픽쳐스
원작의 잘 구축된 세계관을 충실하게 구현한 영화판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사실 작품에 눈이 쏠린 건 연출을 맡은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의 전작들에 관한 신뢰 역시 큰 지분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후카다 코지, 미야케 쇼 등 일본영화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가는 40대 감독 집단과 비교해 작가로서 평가는 덜할지라도, 그가 지금껏 펼쳐 온 독특한 질감의 작품들은 '작가'로서 주목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마이즈미 리키야의 이름을 각인시킨 건 2018년 <사랑이 뭘까>부터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푹 빠져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그렇지만 정식 연인 대접도 못 받는데 외사랑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는 집착증과 순애보 경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넷플릭스와 협연한 2023년 <치히로 상>은 전직 성 노동자 여성이 작은 바닷가 마을 도시락집에 취업해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며 과거를 감추지 않고 사람들과 교감하는 여정을 다뤘다. 잔잔한 일상을 다루지만 결코 평범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감정의 교차, 꽤 극단적인 주인공 캐릭터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드라마 판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은 원작을 충실히 옮겼기에 감독의 오리지널 작업과 비교하면, '순한 맛'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궁합이 척척 들어맞은 결과물이다. 요즘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애들이 애들 같지 않다는 푸념이 적지 않다.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접하고, 청소년의 순수함을 누릴 기회를 잃어버린 채 '촉법소년' 논란처럼 차근차근 성장하는 단계를 건너뛰는 데 대한 염려다.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풋풋하고 미세한 소년×소녀 로맨스는 멸종위기종이 된 지 오래다. 그 자리엔 성조숙증과 어른 흉내로 채워진다. 그런 세태를 반영한 영화나 드라마는 현실을 충실히 재연하지만, 보고 있자면 씁쓸함은 지울 수 없다.
그런 시류에서 타카기와 니시카타의 매일매일 반복되는 것만 같은 잔잔한 밀고 당기기 평행우주는 오히려 희귀한 경험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둘의 어설프지만 10대 중반다운 풋풋한 연기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지금 시대가 더 이상한 것 아닌지 의문이 들 만큼. 과거에 존재했던 인기 청소년 드라마 <반올림>의 청소년 연기자들이 벌이는 우당탕 청춘물의 감성이 오랜만에 부활하는 기분이다.
영화는 드라마에서 10년 후 시간으로 출발한다. 드라마의 주역인 중3 시절 타카기와 니시카타는 영화에서 과거 회상으로 깜짝 출연하기도 한다. 실제 그들이 성장하면 나올 법한 성인이 된 타카기 역 나가노 메이, 니시카타 역 타카하시 후미야 두 배우는 2차원 만화책에서 현실 3차원으로 슥 튀어나온 듯 보는 이들의 판타지를 끌어올린다.
여기에 원작의 배경인 소도시마 풍광이 그야말로 일본 청춘물의 상징, 여름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살짝 전형성을 변주하되, 장르의 검증된 왕도는 다 써먹는 영리함의 조합이다. 꼭 과잉된 전시용 연출이 아니라도 시원한 바람처럼 청량하게 휙 당기는 솜씨가 노련하다.
그 시절 동경했던 어떤 것
영화는 원작이 그랬듯,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두가 둘이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영화 속 주변 인물도 다르지 않다. 대체 쟤들은 언제 본심을 교환할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그 기다림이 10년이다. 일찌감치 한 쪽이 포기하고 나가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보고 있자면 참다 참지 못한 관객은 이제는 제발 그만 고백해! 제발 고백해! 절규해도 이상할 게 없다.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이게 과장이 아님을 공감할 테다.
'염장 지르다' 표현이 이보다 더 절박할 작업이 흔하지 않다. 타카기는 왜 그리 짓궂게 니시키타만 표적으로 삼아 장난을 쳤을까. 상상이 해답을 얻는 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니 출발부터 답은 정해져 있다. 뻔한 결론을 괜히 뒤집는 건 언어도단이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타카기와 니시키타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이걸 억지로 바꾸는 게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다 아는 결말까지 어떻게 전개를 늘어지지 않게 끌어갈 수 있을까. 오직 그 문제만 남는 셈이다.
잔잔한 바다, 온대 습윤 기후의 풍요로운 자연, 낙천적이고 선량한 이웃, 자전거 타고 동네 한 바퀴 돌 수 있는 작은 섬마을, 여기에 초여름 파란 하늘 아래 함께 마시는 라무네의 청량감, 영화는 그런 필살기를 돌아가며 투입해 힐링 여행으로 안내한다. 여기에 '고백'이란 행위가 오늘날 너무 충동적으로, 심지어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행태에 (원작을 올바르게 계승해) 경종을 울린다.
마치 자신들 10년 전을 보듯 진심을 나누는 데 애를 먹는 제자들을 보면서 마침내 오랜 '밀당'에 마침표를 찍는 타카기와 니시키타의 순애보는 2025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우리가 쉽게 단정하기에 더 간절하고 반가운 정경이다. 첫사랑 향수가 그리운 이들, 원작 피날레를 목격하고픈 이들에게 더 바랄 수 없는 궁극의 엔딩이다.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포스터(주)블루라벨픽쳐스
[작품정보]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からかい上手の高木さん
Teasing Master Takagi-san
2024|일본|멜로/로맨스, 코미디
2025.03.05. 개봉|120분|12세 관람가
감독 이마이즈미 리키야
출연 타카하시 후미야, 나가노 메이, 쿠로카와 소야, 츠키시마 루이
장르 로맨스, 코미디, 청춘 드라마
수입 ㈜블루라벨픽쳐스
배급 TCO㈜더콘텐츠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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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