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스틸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스틸(주)블루라벨픽쳐스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본 시코쿠 북단에 맞닿은 소도시마. 섬마을 중학교에는 기묘한 단짝이 있었다.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여학생 '타카기'와 그 장난을 감당해야 하는 남학생 '니시카타' 콤비다. 타카기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기상천외한 수법으로 니시카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니시카타는 번번이 당하는 게 일상이다. 게다가 장난질 최고의 보람인 리액션이 너무 뛰어난 바람에 타카기는 장난을 멈출 생각이 추호도 없다. 놀림감이 된 게 너무 분한 나머지 소년의 삶의 목표는 타카기에게 역으로 장난을 쳐 복수하는 것이 돼버릴 지경이지만, 그의 숙원은 도무지 성공할 기미가 없다. 아무리 반격해도 타카기의 손바닥 안이다.

니시카타는 마치 저주받은 심정이다. 작은 섬이라 달리 숨거나 달아날 구석도 없다. 이대로 타카기 전용 호구가 될 판이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며 좌절할 즈음, 타카기의 가족은 갑자기 이사를 떠나게 된다. 영원한 형벌처럼 계속될 것만 같았던 타카기의 장난에서 해방된 것이다. 하지만 니시카타는 해방의 기쁨보다는 왠지 모를 허무함에 빠진다. 그로부터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소년은 자신이 다닌 학교에서 교사가 됐다. 변함없는 섬마을의 일상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타카기가 갑자기 돌아왔다. 미술을 전공하던 타카기가 3주간 고향 마을 학교에서 교육 실습을 받기로 한 것이다. 심지어 담당 교사는 니시카타 몫이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둘의 관계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타카기는 짓궂게 니시카타를 놀림감으로 만들고, 니시카타는 타격감 좋게 소꿉친구의 장난을 흡수한다. 학생들과도 원만하게 지내며 타카기는 오랜만에 돌아온 소도시마의 시간을 만끽한다. 동창생 커플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하고, 방과 후 순찰도 나가며 둘은 흡사 데이트하듯 더불어 시간을 보낸다. 3주는 쏜살같이 흘러간다.

원작의 성공적인 확장 세계관

영화의 원작은 1200만 부 넘게 팔린 동명의 인기 만화다. 처음엔 만화잡지에 단편으로 시작한 것이 잔잔하게 인기를 얻으며 정규 연재작이 되고, 20권으로 완결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만 해도 드문 성공담이다. 축제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애니메이션은 시즌 3까지 완성됐고, 2024년 동명의 드라마 역시 좋은 평판을 얻었다. 만화의 높은 인기 덕분에 외전도 여러 편 제작되기에 이른다.

작품 자체의 인기도 인기이지만, 오랜만에 등장한 1:1 러브 코미디 역작은 일본 청춘물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잊힌 지 오래였던 순정 로맨스가 일상물 형태로 부활한 것이다. 아이들이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에 접어들면서 사장된 것 같던 해당 장르의 은근함이 호응을 얻고, 새롭게 돌아온 흐름에 올라탄 다른 작가들의 유사 작업이 줄을 이었다. 하나의 작품이 만화업계 경향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셈이다. 이런 작업은 흔할 리 없다.

심지어 나라면 이렇게 이야기를 확장하겠다는 도전이 이어져, 다른 작가들에 의한 독자적 전개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모두가 상상하던 타카기와 니시카타의 후일담은 원작 작가가 아니라 팬에 의해 <장난을 잘 치는 전 타카기 양>이란 제목으로 오리지널 20권보다 더 방대한 분량(23권 완결)으로 탄생할 정도다.

팬들은 기승전결 스토리 완결이 아니라 만화 속 은근한 분위기와 둘의 서툰 듯 조금씩 다가서다 마는 아련한 교감이 마치 무한 루프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세계관에 푹 빠진 채 헤어나오길 원치 않은 것이다. 그렇게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과 최상의 샌드백 니시키타의 이야기는 무한한 우주처럼 확장돼 간다.

성공한 만화 원작의 당연한 수순으로 실사 드라마도 제작되지만, 일각에서 우려하듯 원작 파괴의 우려를 불식하고 괜찮은 각색으로 좋은 평가를 획득했다. 이런 경우 대개 영화판도 후속으로 제작되는데,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은 전형적인 공식에서 일정하게 벗어난 행보를 보인다. 제작비 절감 등 이유로 드라마의 집약판 형태를 취하기 일쑤인 극장 버전을 오리지널 스토리 형태로 완성한 것이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수긍할 만한, 아니 사실은 현기증 나게 보고 싶던 장면들을 특별 팬 서비스처럼 선사해준 셈이다. 이렇게 행복한 궁합도 쉽지 않을 만큼.

10년 후 후일담은 원작을 훼손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고려했다. 원작자의 작업은 아니지만, 팬북 형태로 출발해 사실상 후계로 취급되는 <장난을 잘 치는 전 타카기 양>의 설정을 상당 부분 구현하고, 이야기를 복잡하게 빙빙 돌리는 둘이 떨어져 지낸 10년이란 시간 동안 당연히 있을 법한 다른 이성과의 관계 같은 건 과감히 다 날려버렸다. 멀쩡한 성인 남녀, 그것도 꽤 선남선녀인 주인공들을 봐선 비현실적이긴 해도 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배려한 결과다.

일본영화계 신성 감독의 회심작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스틸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스틸(주)블루라벨픽쳐스

원작의 잘 구축된 세계관을 충실하게 구현한 영화판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사실 작품에 눈이 쏠린 건 연출을 맡은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의 전작들에 관한 신뢰 역시 큰 지분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후카다 코지, 미야케 쇼 등 일본영화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가는 40대 감독 집단과 비교해 작가로서 평가는 덜할지라도, 그가 지금껏 펼쳐 온 독특한 질감의 작품들은 '작가'로서 주목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마이즈미 리키야의 이름을 각인시킨 건 2018년 <사랑이 뭘까>부터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푹 빠져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그렇지만 정식 연인 대접도 못 받는데 외사랑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는 집착증과 순애보 경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넷플릭스와 협연한 2023년 <치히로 상>은 전직 성 노동자 여성이 작은 바닷가 마을 도시락집에 취업해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며 과거를 감추지 않고 사람들과 교감하는 여정을 다뤘다. 잔잔한 일상을 다루지만 결코 평범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감정의 교차, 꽤 극단적인 주인공 캐릭터를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드라마 판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은 원작을 충실히 옮겼기에 감독의 오리지널 작업과 비교하면, '순한 맛'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궁합이 척척 들어맞은 결과물이다. 요즘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애들이 애들 같지 않다는 푸념이 적지 않다.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접하고, 청소년의 순수함을 누릴 기회를 잃어버린 채 '촉법소년' 논란처럼 차근차근 성장하는 단계를 건너뛰는 데 대한 염려다.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풋풋하고 미세한 소년×소녀 로맨스는 멸종위기종이 된 지 오래다. 그 자리엔 성조숙증과 어른 흉내로 채워진다. 그런 세태를 반영한 영화나 드라마는 현실을 충실히 재연하지만, 보고 있자면 씁쓸함은 지울 수 없다.

그런 시류에서 타카기와 니시카타의 매일매일 반복되는 것만 같은 잔잔한 밀고 당기기 평행우주는 오히려 희귀한 경험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둘의 어설프지만 10대 중반다운 풋풋한 연기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지금 시대가 더 이상한 것 아닌지 의문이 들 만큼. 과거에 존재했던 인기 청소년 드라마 <반올림>의 청소년 연기자들이 벌이는 우당탕 청춘물의 감성이 오랜만에 부활하는 기분이다.

영화는 드라마에서 10년 후 시간으로 출발한다. 드라마의 주역인 중3 시절 타카기와 니시카타는 영화에서 과거 회상으로 깜짝 출연하기도 한다. 실제 그들이 성장하면 나올 법한 성인이 된 타카기 역 나가노 메이, 니시카타 역 타카하시 후미야 두 배우는 2차원 만화책에서 현실 3차원으로 슥 튀어나온 듯 보는 이들의 판타지를 끌어올린다.

여기에 원작의 배경인 소도시마 풍광이 그야말로 일본 청춘물의 상징, 여름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살짝 전형성을 변주하되, 장르의 검증된 왕도는 다 써먹는 영리함의 조합이다. 꼭 과잉된 전시용 연출이 아니라도 시원한 바람처럼 청량하게 휙 당기는 솜씨가 노련하다.

그 시절 동경했던 어떤 것

영화는 원작이 그랬듯,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두가 둘이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영화 속 주변 인물도 다르지 않다. 대체 쟤들은 언제 본심을 교환할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그 기다림이 10년이다. 일찌감치 한 쪽이 포기하고 나가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시간이다. 그래서 보고 있자면 참다 참지 못한 관객은 이제는 제발 그만 고백해! 제발 고백해! 절규해도 이상할 게 없다.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이게 과장이 아님을 공감할 테다.

'염장 지르다' 표현이 이보다 더 절박할 작업이 흔하지 않다. 타카기는 왜 그리 짓궂게 니시키타만 표적으로 삼아 장난을 쳤을까. 상상이 해답을 얻는 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니 출발부터 답은 정해져 있다. 뻔한 결론을 괜히 뒤집는 건 언어도단이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타카기와 니시키타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이걸 억지로 바꾸는 게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다 아는 결말까지 어떻게 전개를 늘어지지 않게 끌어갈 수 있을까. 오직 그 문제만 남는 셈이다.

잔잔한 바다, 온대 습윤 기후의 풍요로운 자연, 낙천적이고 선량한 이웃, 자전거 타고 동네 한 바퀴 돌 수 있는 작은 섬마을, 여기에 초여름 파란 하늘 아래 함께 마시는 라무네의 청량감, 영화는 그런 필살기를 돌아가며 투입해 힐링 여행으로 안내한다. 여기에 '고백'이란 행위가 오늘날 너무 충동적으로, 심지어 강압적으로 일어나는 행태에 (원작을 올바르게 계승해) 경종을 울린다.

마치 자신들 10년 전을 보듯 진심을 나누는 데 애를 먹는 제자들을 보면서 마침내 오랜 '밀당'에 마침표를 찍는 타카기와 니시키타의 순애보는 2025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우리가 쉽게 단정하기에 더 간절하고 반가운 정경이다. 첫사랑 향수가 그리운 이들, 원작 피날레를 목격하고픈 이들에게 더 바랄 수 없는 궁극의 엔딩이다.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포스터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포스터(주)블루라벨픽쳐스

[작품정보]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 양
からかい上手の高木さん
Teasing Master Takagi-san
2024|일본|멜로/로맨스, 코미디
2025.03.05. 개봉|120분|12세 관람가
감독 이마이즈미 리키야
출연 타카하시 후미야, 나가노 메이, 쿠로카와 소야, 츠키시마 루이
장르 로맨스, 코미디, 청춘 드라마
수입 ㈜블루라벨픽쳐스
배급 TCO㈜더콘텐츠온
장난을 치는 타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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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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