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엄마가 썼던 일기를 읽고 나는 직감했다. 이번 생에 엄마를 미워하는 건 글렀다고.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엄마는 고민 많은 청춘이자 불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걸어왔고, 나도 모르게 그를 이해하게 됐다. 누구든 속내를 알면 미워할 수 없다는데 그 상대가 엄마라면 더욱 지독하다.

딸들에게는 한 번쯤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가 되면 "나처럼 살지 말라"던 그가 궁상맞지도, 원망스럽지도 않고 한없이 안아주고 싶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속 '애순'과 '금명'에게도 그런 시기가 찾아왔다. 매정하게 돈만 밝히고, 나에게 가난을 알려줬던 존재를 사랑하게 된 딸들은 그제야 엄마와 최초의 악수를 한다.

해녀 엄마가 고급 양복을 입은 이유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광례 역을 맡은 배우 엄혜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광례 역을 맡은 배우 엄혜란.넷플릭스

장래희망이 '5선 대통령'인 딸 애순(아이유)은 재주 많은 제주 소녀다. 글을 잘 써서 백일장에서 부장원을 타고, 시험에서는 100점을 받는다. 어른들이 훈계해도 기죽지 않고 작은아버지가 괴롭혀도 꿋꿋한 애순에게도 마주치면 물러지는 존재가 있다. 돈 벌겠다고 매번 바다에서 가장 오래 버티는 해녀인 엄마 '광례'(엄혜란)'다.

독으로 버티고 산다고 해서 별명이 복어인 광례는 애순의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고 한량 같은 두 번째 남편과 살고 있다. 생계를 꾸리기 바쁜 그는 가난한 집에서 딸을 키우고 싶지 않아 억지로 애순을 작은아버지 댁에 머무르게 한다. 애순이 울면서 같이 살자고 해도, '엄마한테 백 환 주고 쉬게 하고 싶다'는 시를 써도, 광례는 "네 사랑은 네가 받고 네 밥그릇 네가 챙겨야 한다"고 야멸차게 말한다.

매몰찬 광례가 무너진 건 딸에게만 조기를 주지 않는 작은 집의 실체를 봤을 때다. 그는 딸을 홀대하는 식구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애순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은 집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몰표를 받은 애순에게 부급장을 시킨 담임 선생님을 찾아간다. 평소 성격이라면 학교를 엎었을 텐데 광례는 엄마 노릇을 하겠다며 고급 양복을 입은 채 굽신거리고 촌지까지 두둑이 바친다.

그렇게 평생 행복할 줄 알았던 모녀는 이른 이별을 하게 된다. 숨병에 걸린 광례는 먹고 살기 위해 바다로 나가고, 애순은 엄마의 잠수복을 버리며 바다를 향해 "남의 엄마는 내버려둬, 우리 엄마는 봐줘야지"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아슬아슬한 바다 생활은 광례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겨우 10살에 애순은 "어차피 모든 사람들은 고아가 된다. 살다 보면 더 독한 날도 있다"는 유언을 듣는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때로 엄마를 원망하며, 애순은 그의 뜻처럼 식모가 되지 않고 시인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하지만 "쫄아붙지 말고 푸지게 살아야 한다"는 광례의 말과 달리 애순은 점점 쪼그라든 삶을 살게 된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애순은 '관식(박보검)'과 결혼하게 되고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애순과 금명 역을 맡은 배우 아이유.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애순과 금명 역을 맡은 배우 아이유.넷플릭스

엄마 애순(문소리)은 하나밖에 없는 딸 '금명'(아이유)을 꿀리지 않게 키우려고 애쓴다. "계집애한테 자전거를 태우냐"는 시할머니의 비아냥을 들어도 "자전거 못 타면 아궁이 앞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라며 자전거를 태우고, 부실한 밥상에서도 보리·콩을 찾아 입에 넣어준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 애순에게 항상 떠오르는 사람은 자신의 엄마인 광례다.

"죽은 광례가 귀신이 돼 따라다닌다"는 말에 그는 "엄마가 딸을 좋아해서 그러는 건데 무엇이 문제냐"고 맞받곤 한다. 시집살이에 정신없이 살다가 애순은 자신처럼 분주하게 살았던 광례를 떠올리고, 온전히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광례를 향한 그리움을 느끼며 남은 청춘은 딸을 키우는 데 바친다.

"내 딸은 상 차리는 사람 말고 엎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애순의 바람대로 금명은 할 말 다 하는 여성으로 자란다. '결혼하면 아들 뒷바라지하라'는 남자친구 어머니의 말에 "나는 능력 있는 애라서 취직으로 만족 못 한다. 계속 승진해서 다 해 먹고 싶다"고 답할 만큼 씩씩하게 컸다. 그러나 애순을 향해서는 허기진 마음에 뾰족한 말을 던진다.

금명은 애순에게 "엄마는 이런 데 시집을 왜 왔냐"고 따지면서 "나는 엄마처럼 안 살겠다"고 하고, 쇼핑을 많이 한다는 잔소리에 "없이 커서 그런지 계속 사고 싶었다"고 비수를 꽂는다. 그런 딸을 보며 애순은 화를 내지도 못하고 "내가 가진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을 주며 키웠다"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애순이 광례를 이해했듯 금명도 애순을 이해하게 된다. "엄마도 나름대로 행복했고 쨍쨍했다"는 말을 들으며 금명은 젊은 시절의 애순을 되짚어보고 결국에는 툴툴거리는 표정으로 자신이 구매한 신발을 선물하게 된다. 엄마들은 '나처럼 살지 말라'고 하고, 딸들은 '엄마처럼 안 살겠다'고 하는데 왜 그들은 그토록 닮았을까. 모녀 관계에 얽힌 저주 같은 사랑을 <폭싹 속았수다>가 풀었다.

여자의 팔자는 시대가 만든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금명 역을 맡은 배우 아이유(1인2역)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금명 역을 맡은 배우 아이유(1인2역)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애순 역을 맡은 배우 문소리.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애순 역을 맡은 배우 문소리.넷플릭스

흔히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고 하던가. <폭싹 속았수다> 속 여성들은 이 말을 피하고자 몸부림친다. 그들은 각박한 삶을 물려주거나 또는 받지 않으려 하지만, 사실 그 팔자는 핏줄 말고 시대에서 비롯됐다.

광례는 힘겹게 남편 병수발을 들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고 "여자 팔자가 남자 잡아먹었다"고 비난 당한다. 애순은 관식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사내의 치기는 호걸이나 계집애의 순정은 화냥질"이란 인식에 혼자 퇴학당한다. 금명은 결혼해도 직장 생활을 유지하려 하지만, "너무 욕심내는 건 허기이자 허영"이란 남자친구 어머니에게 지적질을 당한다. 언뜻 보면 기구한 팔자가 대물림되는 듯하지만, 정확히는 여성에게 차별적인 시대가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도 <폭싹 속았수다> 속 여성들은 꿋꿋이 시대를 이겨낸다. 광례의 '깽판' 치는 능력이 애순의 DNA에 박혔고, 애순의 불같은 성정을 금명이 빼다 닮은 덕분이다. 과연 애순과 금명은 수고스러운 삶을 끝까지 헤쳐갈 수 있을까. 아직 12부가 남은 <폭싹 속았수다>, 유채꽃이 만개하기에는 시간이 남았다.
폭싹속았수다 아이유 박보검 IU 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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