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87주기가 되는 날이다. 주지하다시피 안창호 선생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축에 속한다 해도 좋을 독립운동가다. 무장투쟁이 아닌 방식으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어간 대표적 지도자로 꼽힌다. 만민공동회를 통해 동포들에게 자주독립을 위해 국민이 자각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현지 한인들을 조직해 계몽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멸망이 가시화된 1907년엔 대한제국으로 돌아와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후 수십 년간 민족 계몽 운동에 매진해 독립운동을 뒷받침한 사실은 역사가 기록해 후세에 전하는 바다. 그와 같은 공헌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중책을 맡았다. 내무부장부터 법무부장, 노동총장, 국무총리 대리, 국무령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1938년 순국하기까지 안창호는 민족의 지도자라 할 만한 삶을 살았다

선생이 남긴 말과 글로써 미루어 짐작건대, 그 지향은 명확하다 하겠다. 계몽을 통해 민족의 힘을 일깨워 조직하고 혁명과 무장투쟁이란 실력 행사로 국권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 물리력 행사 없이는 민족국가의 건설과 독립이 요원하리란 인식이 그에게는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자치가 아닌 독립, 타협 없는 저항이란 목표를 명확히 해두고서, 그 실천 방안으로 계몽과 조직을 택한 안창호의 길은 먼저 실력부터 쌓고, 후에 저항하자는 소위 실력 양성론자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왜 안창호 다룬 영화가 없었을까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tvN

안창호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며 국민적 인지도를 고려할 때 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은 실망스럽다. 제 나라의 자랑스러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만드는 일을 문화강국이라 자부하는 한국이 게을리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구와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지난 몇 년간 몇 편 만들어지긴 했으나, 안창호와 같은 다면적인 인물을 여태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20세기 말부터 부흥을 이룬 한국영화가 독립운동사를 충실히 조명했다면 안창호는 결코 놓치지 않았을 법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창호의 삶은 영화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말하자면 난도가 높은 축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같이 돌출된 역사적 사건이 있다면 영화를 사건 중심으로 극화할 수 있다. 안창호의 사례는 그 반대로,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선 삶 전반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뒤 삶의 곡절을 풀어내고 사상의 태동을 그와 연관시켜 비추어야 한다. 말인즉슨 전기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수준 높은 드라마를 창조하고 인물의 삶과 철학에 대한 연구까지를 병행해야 하는 전기영화는 여러 장르 가운데서도 만들기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물며 안창호와 같이 활동 상당 부분이 베일에 감춰진 인물이라면 더욱 그러할 테다.

그래서일까. 안창호를 정면에서 다룬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몇몇 영화와 드라마가 그를 스치듯 그린 적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그의 사상이 왜곡되거나 캐릭터에 대한 연구가 충실히 이뤄지지 않은 작품도 적잖다. 별 무리 없이 다뤄진 경우에도 거물급 독립운동가로서의 존재감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미스터 션샤인' 속 안창호의 존재감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tvN

물론 예외는 있다. 2018년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대표적이다. 총 24회차 드라마 가운데 한 편, 그것도 극 후반부인 22회 차에 특별출연하는 게 고작이긴 하지만 말이다.

배우 박정민이 연기한 젊은이는 이 작품의 중심인물인 유진 초이(이병헌 분)와 미국에서 우연히 만난다. 이십 대 청년인 그는 미국이 초행으로, 같은 동양인인 유진 초이에게 길을 물은 참이다. 둘은 이내 말을 트고 서로가 조선 동포임을 알게 된다. 조선 땅에서 장장 21회의 에피소드로 꾸려진 복잡다단한 일들을 겪어낸 유진 초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조국으로 택한 미국에 해를 입히게 된 그다. 그로 인해 군에서 불명예 전역한 뒤 뉴욕으로 돌아와 3년을 지냈다.

미국과 한국은 태평양을 사이에 둔 먼 나라가 아닌가. 휘청이는 작은 나라 대한제국의 소식이 미국까지 제대로 전해질 리 만무하다. 조선의 상황과 러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유진 초이에게 청년은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친절하게 이야기해 준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대한제국은 일본과 을사늑약을 맺고 주권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다. 조선통감부가 설치돼 대한제국이 일본의 수족쯤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사실상의 멸망과도 같은 일이다.

"저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tvN

드라마는 대화의 끝에서 청년이 누구인지를 인상적으로 내보인다. 서로 통성명을 하며 "안가 창호입니다"라고 저를 소개하는 청년의 모습이 보는 이에게 꽤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좋지 못한 소식들을 접하고도 "조선은 쉽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 이유로 의병의 존재를 드는 유진 초이다.

그가 지나온 삶을 시청자는 알고 있다. 그 말에 실린 무게 또한 그래서 안다. 그의 말을 들은 청년 안창호가 "저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라고 답하는 장면은 그 못잖은 울림을 준다. 이후 수십 년간 안창호가 걷게 될 길 또한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에 전하는 안창호의 일화야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빛나는 이야기 하나는 죽음의 직접적 계기가 된 수양동우회 사건과 관계된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믿느냐' 묻는 검사의 심문에 안창호는 '대한의 2000만 동포가 믿기에' 반드시 이뤄지리라 답한다.

드디어 나오는 안창호 영화 '호조'

코웃음 치는 검사 앞에서 안창호는 일본을 위해 대한이 독립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본이 무력뿐 아니라 도덕을 겸하는 것이 동양인으로서 명예를 갖는 것이며, 원한 품은 2000만의 적보다 우정 있는 2000만의 이웃을 두는 것이 나은 길이라 당차게 주장한 안창호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고 고문까지 당하면서도, 수많은 동지가 돌아서 친일파로 전락하는 광경을 목도하면서도, 끝내 뜻을 꺾지 않은 그다. 독립운동계의 또 다른 거두인 이승만, 김구와 대립하면서도 큰 틀에서 함께했던 그가 일제에 체포당해 거꾸러지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역사가 조금쯤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립된 조국이 품지 못한 안창호의 존재는 그저 자연인인 그의 소실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주목할 만했던 정치가와 그 뜻의 소실이기도 했다. 그의 삶과 사상, 드라마가 오늘의 대중에 닿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일 테다.

한편, 안창호의 이야기가 영화로 관객과 만날 날이 머지 않았다. 안창호와 손정도, 두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영화 <호조>가 12일 개봉을 앞둔 것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87주기가 되는 주, 의미를 챙겨 개봉하는 이 영화가 안창호의 삶을 어떻게 조명할지 주목된다. 그저 그의 이름만을 기억할 뿐, 삶도 업적도 사상도 알지 못하는 이가 많은 가운데 국민의 깨어남만이 조국의 희망이라 역설한 그의 이야기가 특별한 힘을 발휘하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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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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