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웹툰이나 웹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굉장히 많아졌다. <무빙>, <조명가게>의 강풀 작가나 <신병>의 장삐쭈 작가처럼 원작자가 직접 각본에 참여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만화를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 필요했는데 제작사에서 믿고 판권을 구입하는 작가는 허영만 작가와 이현세 작가 등 극히 한정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출판 만화로 시작한 윤태호 작가는 웹툰 쪽으로 넘어온 후 오히려 출판만화가 시절을 능가하는 인기와 명성을 누리며 많은 작품들이 영상물로 제작됐다. 2007년에 연재했던 <이끼>는 2010년 강우석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돼 340만 관객을 모았고 2009년에 연재했던 <내부자들>은 2015년 영화로 개봉해 무려 915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윤태호 작가는 지난 2012년에도 샐러리맨들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바둑에 비유한 신작을 선보이며 직장인들의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14년 드라마로 제작되면서 '노동자들의 힐링 드라마'로 엄청난 열풍을 일으켰다. tvN의 <시그널>과 <나의 아저씨>, 넷플릭스의 <폭싹 속았수다>를 연출한 김원석 감독이 2014년에 연출했던 tvN 8주년 특별 기획 드라마 <미생>이었다.
▲<미생>은 방영 당시 <응답하라1994>에 이어 케이블TV 역대 시청률 2위 기록을 세웠다.
<미생> 홈페이지
'배우형(?) 아이돌' 제국의 아이들 최고 아웃풋
주얼리를 배출했던 연예기획사 스타제국은 지난 2010년 9인조 보이그룹 '제국의 아이들'을 데뷔시켰다. 제국의 아이들은 2장의 정규 앨범과 미니앨범, 4장의 싱글 앨범을 발표하며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정규 2집 타이틀곡 <후유증> 정도를 제외하면 크게 히트한 노래를 남기진 못했다. 하지만 제국의 아이들 멤버 중 박형식, 김동준, 황광희 등은 해체 후에도 배우와 예능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제국의 아이들에서 리드 보컬을 담당했던 임시완은 제국의 아이들이 배출한 배우들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임시완은 가수 활동이 한창이던 2012년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송재희가 연기한 허염의 아역, <적도의 남자>에서 이준혁이 맡은 이장일의 아역으로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013년 천만 영화 <변호인>에서 박진우 역을 맡아 '연기돌'로 입지를 굳혔다.
<해품달>과 <변호인>을 통해 유망주로 떠오른 임시완은 2014년 드라마 <미생>에서 바둑기사 출신의 신입사원 장그래 역을 맡았다. 캐스팅 당시만 해도 아이돌 출신이라는 편견과 주연을 맡기엔 연기 경력이 짧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임시완은 낯선 공간에 홀로 던져진 사회 초년생 장그래를 역을 잘 소화하면서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임시완으로 인해 장그래는 '아픈 청춘'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됐다.
2016년 고아성, 이희준과 <오빠생각>에 출연해 영화에서도 주연 신고식을 한 임시완은 2017년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된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을 통해 아이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칸 영화제에 참석했다. 같은 해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를 끝으로 현역으로 군에 입대해 병역 의무를 마친 임시완은 전역 후 2019년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주인공 윤종우를 연기했다.
2020년 드라마 <런 온>에서 국가대표 육상선수 기선겸 역을 맡았던 임시완은 2022년 영화 <비상선언>과 2023년 넷플릭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에서 악역을 맡으며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2023년 <소년시대>의 장병태 역을 통해 청룡시리즈어워즈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서 전성기를 연 임시완은 현재 < 오징어게임2,3 >에서 코인 투자 유튜버 출신 참가자 이명기를 연기하고 있다.
<미생> 출연 배우들 대거 스타로 도약
▲임시완은 <미생>의 장그래를 통해 보이그룹 멤버라는 타이틀을 떼고 배우로 인정 받았다.
tvN 화면 캡처
'미생'은 완전한 두 눈(독립된 두 집)이 나지 않아 생사가 불분명한 돌의 무리를 의미하는 바둑 용어다. '미생'은 평소 바둑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었다. 하지만 2014년 드라마 <미생>이 방송되면서 '미생'은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상징하는 표현이 됐고 드라마가 끝난 지 10년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드라마 <미생>은 종합상사 원인터내셔널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과 이를 헤쳐 나가는 직장인들의 삶과 노력, 애환을 다루면서 직장인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그렇다고 <미생>이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소위 '상사맨'들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는 결코 아니다. <미생>은 월급을 받는 모든 근로 소득자들은 물론이고 자영업자들을 포함해 땀 흘려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해 주는 '힐링 드라마'였다.
<미생>은 임시완이 연기한 주인공 장그래가 속한 원인터내셔널 영업 3팀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기존 드라마들처럼 주인공 중심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진 않는다. 특히 최귀화가 연기했던 IT영업부의 박용구 대리는 하청업체와 협력업체의 편의를 봐주다 상사에게 깨지는 소극적인 모습만 보여주다 중요한 순간 협력업체 사장을 회사로 소환하면서 그 유명한 '날개CG'의 주인공이 됐다.
<미생>은 스타배우 캐스팅 없이도 8.4%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이변을 일으켰다(닐슨코리아 시청률 기준). 하지만 <미생>의 시즌2는 현실적으로 제작이 쉽지 않다. 장그래 역의 임시완을 비롯해 이성민, 변요한, 강하늘, 김대명, 박해준 등 <미생> 주요 배우들의 위상이 당시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만약 같은 출연진으로 <미생> 시즌2를 만든다면 제작비가 엄청나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난 2015년 1월에는 <미생>의 인기에 힘입어 tvN에서 <미생>을 패러디한 2부작 드라마 <미생물>이 방영됐다. <미생물>에서는 '로봇 연기'로 유명했던 장수원이 장그래 역을 맡았고 장도연이 안영이, 황현희가 오상식 차장, 황제성이 장백기, 이용진이 한석율, 정성호가 최영후 전무를 연기했다. 그리고 <미생>에서 강해준 대리와 하성준 대리로 출연했던 오민석과 진석호는 <미생물>에서도 같은 캐릭터를 맡았다.
일엔 철저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장그래의 멘토
▲이성민은 <미생>에서 인간적인 상사 오상식 차장을 연기하며 배우로서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tvN 화면 캡처
지금은 두 편의 천만 영화를 보유하고 있는 검증된 스타 배우 이성민은 2012년 <골든타임>의 최인혁 교수에 이어 <미생>의 오상식 차장을 통해 전성기를 열었다. 일에는 누구보다 철저하지만 따뜻한 면모를 갖추고 있어 장그래를 비롯한 신입사원들의 멘토 역할을 했다. 특히 오상식이 술에 취해 동기에게 "너 때문에 '우리 애'가 혼났잖아"라고 했던 말은 회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장그래에게 큰 힘이 됐다.
영화 <써니>와 드라마 <닥터 이방인>을 통해 라이징 스타로 주목받던 강소라는 <미생>에서 외국어에 능하고 업무 이해도가 빠른 장그래의 입사동기 안영이 역을 맡았다. 안영이는 뛰어난 능력에도 남자 중심의 자원2팀에서 무시 받기 일쑤였는데 뼈를 깎는 노력으로 동료들에게 인정받는다. 비중으로는 여주인공이지만 <미생>은 멜로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장그래와는 좋은 동료 정도로만 그려진다.
안영이가 20대 여성 직장인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신은정이 연기한 영업 1팀의 선지영 차장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워킹맘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오상식과 입사 동기인 선차장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오상식보다 먼저 차장으로 진급했지만 육아 문제로 시댁에서 퇴사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선차장은 사회로부터 '슈퍼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여성들의 남모를 고충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미생>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겉으론 차갑고 냉정해 보여도 속으론 인간미를 가진 인물들이 많은 것과 달리 김희원이 연기한 '중동통' 박종식 과장은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최악의 빌런으로 나온다. 회사 생활의 따분함과 한계를 느낀 조직원의 일탈로 보기엔 박종식 과장의 비리는 너무 악랄하고 거대했다. 결국 박종식은 거래처로부터 뒷돈과 지분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회사에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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