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넷플릭스

(*이 기사는 드라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들과 함께 역사 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막상 수업에 들어가서 역사 얘기를 풀어 놓다 보면 정작 친구는 그 시절을 몸소 살아낸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양로원이고 노인정이고 그곳에서 만난 어르신 한 분 한 분이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 될 만큼 곡진한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으셨다는데.

볕 좋은 요양원 아래 스케치북 가득 제주 바다를 그려낸 한 노인을 오버랩하며 시작된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는 그렇게 친구가 만난 어르신 중 한 분의 이야기인 듯 실감나는 우리 어머니 세대의 삶을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에 빗대어 풀어낸다.

인생이 당신에게 시련을 준다면

이야기는 주인공 애순(아이유 분)의 어머니 전광례(염혜란 분)로부터 시작된다. 제주 바다 해녀로 물질을 하며 살아가는 전광례는 그악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한 사람 등에 얹힌 식구들이 너무 많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새로운 남자인 염병철(오정세 분)를 만났지만, 그저 그녀가 돌볼 입 중 하나일 뿐이다.

어머니 전광례의 삶은 길지 않았다. 어떻게든 똑똑한 애순을 뭍으로 보내 대학까지 보내겠다고 애를 썼지만 해녀의 직업병이 그녀를 삼켰다. 죽음을 예감한 전광례는 '자신이 죽으면 뒤도 안돌아보고 이 집을 떠나라'고 말한다. 가족에 발목 잡히지 말고 너의 삶을 살아가라고.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넷플릭스

애순은 떠나려 했다. 하지만 떠나지 못한다. 아직 돌봄이 필요한 두 동생을 놔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열 살 먹은 애순이 양배추를 키워 팔며 가장이 됐다.

시인 지망생 애순(아이유 분)은 억척스럽게 양배추를 키워 장에 내다 팔면서도 '양배추 사세요' 한 마디를 못한다. 대신 그녀의 곁에는 그녀 대신 양배추를 팔아주는 양관식(박보검 분)이 있다.

똑부러진 애순이 대통령이 되겠다 했을 때, 그럼 자기는 영부인이 되겠다던 관식. 코딱지 만할 때부터 우직하게 애순을 챙겼다. 내가 '걸뱅이(거지)'냐며 악을 써도 언제나 관식은 애순의 곁에 있었다. 어머니 상을 당할 때도, 양배추 밭에 홀로 갈 때도, 언제나.

그런 관식이가 좋으면서도 애순은 언제나 노래하듯 말했다. 제주 바다가 징글징글하다고. 그래서 뭍으로 나가 대학까지 공부할 거라고. 남자를 만난다면 '노스탤지어'(유치환의 시 '청마'에 등장하는 말)도 모르는 남자는 안 만날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애순이는 시험만 쳤다 하면 100점을 맞는 똑부러지는 아이였다. 반장 선거를 하면 37표를 받았고, 시를 썼다 하면 벽에 걸렸다. 하지만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1950~1960년대 제주도는 애순이라는 여성이 살아가기에는 척박한 시절이었다. 하물며 어미, 아비가 돌아가셔 세상에 기댈 곳이라고는 없는 소녀에게는.

지난 7일 공개된 4회차까지의 <폭싹 속았수다>는 '호로록 봄'(호로록은 후르륵을 뜻하는 제주 방언)에서부터 '꽈랑꽈랑 여름'(과랑과랑, 제주 방언으로 '햇볕이 쨍쨍'이라는 뜻)에 이르기까지 애순의 젊은 시절을 <동백꽃 필 무렵> 임상춘 작가의 감칠 맛 나는 대본으로 <나의 아저씨>의 김원석 감독이 사람 냄새 풀풀 나게 펼쳐낸다.

제대로 속은 줄 알았는데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넷플릭스

사실 제주 방언을 모르는 타지 사람들이 보면 드라마의 제목 '폭싹 속았수다'는 말 그대로 '제대로 속아 넘어갔구나'란 뜻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하면 '수고 많으셨습니다'란 뜻이란다. 마치 부산 사투리 '욕봤다'와 비슷한 뉘앙스처럼 말이다.

굳이 오해를 살 만한 제목을 쓴 이유가 있을까? 4회차까지 보면, 어쩌면 이 '오해'는 의도된 오해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애순의 삶이 정말로 속았구나 싶은 여정이기 때문이다.

당차고 야무졌던 여자 아이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37명의 반 아이들이 찬성을 해도 반장은 군 장성 집 자식에게 돌아갔다. 엄마가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로 시를 잘 써도 장원은 그 아이 차지다.

엄마는 애순의 팔자가 자기를 닮을까 걱정했는데, 그 우려는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새아버지는 애순의 발목을 잡았고, 어린 애순은 엄마 대신 그 가정을 지켰다. 어떻게든 식구들을 먹여살리던 애순을, 새아버지는 새 여자를 들이자마자 쫓아냈다. 하루아침에 오갈 데가 없어졌다.

그럴 때 애순에게 손을 내민 것이 관식이었다. '나를 걸뱅이 취급한다', '섬놈이랑은 안 사귈 것'이라면서도 그의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던 애순은, 그래서 관식과 함께 도망쳤다. 신혼부부라고 바득바득 우기며 배을 타고 부산까지 감행한 '첫사랑의 도피'. 그 결과는 처참했다. 결국 경찰서에 가게 되고, 관식의 어머니 덕에 다시 제주로 돌아오게 된 두 사람. 정학을 맞은 관식과 달리 애순은 퇴학을 당하고, '요망'하다며 손가락질 당하는 신세가 됐다.

서울로 가겠다고,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던 애순이지만, 대학을 보내주겠다던 새아버지도, 공부를 시켜주겠다던 관식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애순은 틈만 나면 귀신을 쫓는다며 자신에게 팥을 던지는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감당하며 살아간다.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넷플릭스

서사로만 보면 제주 여인의 수난사와도 같지만, '폭싹 속았수다'가 알고 보니 '수고 많으셨습니다'란 뜻인 것처럼, 애순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첫 아이로 딸을 낳은 애순은 공부를 포기해서 아쉽지 않냐는 관식의 말에 딸을 안으며 '이렇게 예쁜 딸이 있으면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이든 애순에게 딸이 아버지와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냐 했을 때, 애순은 다시 태어나도 관식을 선택할 거라고 말한다. 세상에 의지할 데 없던 애순은 '입신양명' 대신 자신의 보금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간다.

드라마는 말한다. 인생이 당신에게 떫은 귤을 준다면 그걸로 당신은 귤청을 만들어 따뜻한 귤차를 만들어 먹으라고. 그렇게 떫고 신 자신의 인생을 따뜻한 한 잔의 귤차로 만드는 과정, 그 기나긴 숙성의 과정을 드라마는 보여주고자 한다.

폭삭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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