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도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았다면 변심하지 않았을까. 신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우리는 어느 때보다 종교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돈을 쫓는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지지하는 정치인 앞에서 광신도가 되고, 순결한 마음으로 음모론을 의심하지 않는 세상. 곳곳에서는 자신이 신(神)을 대리하는 인물이라며 종교전쟁을 방불케 하는 신념 전쟁을 벌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은 진정으로 종교적인가. 어쩌면 신의 뜻을 착각했거나 어두운 욕망을 실현하고자 그 권위만 흉내 내는 걸지 모른다. 모든 것이 종교로 변하는 지금, 진정한 종교와 믿음이란 무엇인지 되물어야 한다. 그래서 영화 <콘클라베>를 찾았다. 신과 가장 가까이 사는 추기경들에게도 욕망으로 물든 마음이 있다고 하기에.
정직은 사라지고, 남은 교활함
▲영화 <콘클라베> 스틸컷
(주)디스테이션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의 모임을 뜻하는 '콘클라베'는 말 그대로 가톨릭 전체를 대변하는 지도자를 뽑는 자리다. 다만 일반 선거와 차이점은 그들이 외부와 단절된 채 감금되어 투표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절반을 넘긴 후보자가 나올 때까지 투표를 무한대로 반복한다. 그렇기에 시간이 갈수록 추기경들은 날카로워진다.
처음에는 순수한 얼굴이던 추기경들은 점점 야망을 드러낸다. 한사코 교황 자리를 거절하던 '벨리니(스탠리 투치)'는 "교황이 되기 싫은 추기경이 어디 있냐"며 "이건 전쟁이다. 당신도 어느 편에 서야 한다. 솔직하게 야심을 보이라"고 다른 추기경을 독촉한다.
다른 후보를 비방하는데 열을 내는 추기경도 있다. '트랑블레(존 리스고)'는 유력한 후보자인 '아데예미(루시언 음사마티)'가 과거에 어린 수녀와 성관계를 맺어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누설하려 모략한다. 하지만 트랑블레조차 단장 '로렌스(랄프 파인즈)'의 폭로로 성직을 매매해 추기경 자격을 박탈당할 뻔했다는 사실이 퍼진다.
전 세계 가톨릭을 총괄하는 추기경들이 모였지만, 그 숫자가 적어 언뜻 보면 반장 선거 같다. 그러나 그들이 정치 분파를 형성하고 서로 추돌하는 방식은 베테랑 정치인들과 다를 바 없다. 추기경들은 같은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뭉치고, 가톨릭 전체가 아닌 자신의 이권을 보호할 후보자를 찾고, 반대 세력을 막고자 단일화를 종용한다.
반복되는 선거에 모두가 지쳐갈 때 폭탄 테러가 터진다. 잔해를 뒤집어쓴 추기경들은 성직자다운 언어를 내던지고 거침없이 혐오 발언을 한다. 그들은 이슬람 신자를 '동물'이라 칭하며 "이건 종교 전쟁이다, 저 동물들을 없애야 한다"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서로 삿대질하며 고함치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손을 든다. 그 지저귐에 소요가 멈췄다.
찬송가는 레이디 가가의 '본 디스 웨이'
▲영화 <콘클라베> 속 '베니테스'(주)디스테이션
손을 든 '베니테스(카를로스 디에즈)'는 그간 존재감이 미미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온 데다 콘클라베가 시작할 때 급작스레 등장해 어느 세력에도 끼지 못한 채 사실상 혼자였다. 권력 다툼이 벌어지는 내내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았던 그가 전쟁을 가볍게 말하는 발언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베니테스는 "당신들이 전쟁을 아느냐"고 운을 떼며 "내가 온 카불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죽는다. 가톨릭 신자도, 이슬람 신자도 마찬가지"라 말한다. 전쟁을 외치는 추기경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려는 건지 모르겠다며 그는 "이 자리에 가톨릭 전체를 위하는 이가 없다. 모두 실망스럽고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 될 것 같다"고 마침표를 찍는다.
일순간에 숙연해진 회의장을 뒤로 하고 추기경들은 다시 투표를 치른다. 막강한 후보자들은 몰락했고, 진영 간 싸움은 더욱 심화했다. 쉽사리 투표지에 이름을 적지 못하던 그때,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린다. 평화로운 울음소리에 홀린 듯 사람들은 같은 이름을 적어 간다. 그렇게 베니테스가 새로운 교황직에 오른다.
순조롭게 교황 임명 절차를 준비하던 단장 로렌스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고 황급히 베니테스를 찾는다. 베니테스는 자기 신체 비밀을 고백한다.
영화에서 추기경들은 동성애나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며 보수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들이 성소수자를 교황으로 선출하다니. 뜻하지 않게 가톨릭계에 무지개 바람을 일으켰다. "신은 실수하지 않으니 나는 완벽하다"는 가사로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상징하는 노래가 된 레이디 가가의 '본 디스 웨이'를 연상하게 하는 베니테스의 대사. 극 중 권위적인 추기경과 홀대받는 수녀를 지켜보며 자라난 노여움도 사라지게 한다.
확신하지 마라, 추앙하지 마라
영화 <콘클라베>는 흔히 '종교', '믿음'하면 떠오르는 착각을 건드린다. 선거를 앞두고 로렌스는 추기경들을 모아놓고 말한다. 확신은 가장 두려운 죄이며, 통합과 포용을 방해하는 강력한 적이라고. 그러니 우리들은 다양성을 포용해야 한다고.
종교는 선(善)을 믿는 것이지,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선한 존재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악행의 정당성을 찾고 맹목적인 추종자를 만들기 위해 종교의 이름을 빌리는 이들이 있다. 신처럼 막강한 힘을 누리고 싶으나, 신처럼 자책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그들은 종교의 본질을 오인하는 것이다.
종교를 믿는 신자도, 그렇지 않은 무신론자도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영화 <콘클라베>. 추기경들의 싸움은 거룩하고 고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유치하고 치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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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대리하는 추기경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