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아 페레즈> 스틸
그린나래미디어(주)
국내 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을 갖고 참석한 외국 감독들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이 영화의 장르는 대체 무엇입니까?' 감독들은 거의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이런 질문을 받는다며 신기하게 여긴다. 해외 감독들은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를 조합하거나, 다양한 장르를 혼합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유독 한국 관객은 자신이 관람하는 영화가 뚜렷하게 규정되길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요즘 들어서 오히려 심화하는 편이다.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영화를 접하기보단, 시간과 비용을 들인 투자 기회비용처럼 대하는 것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칠 테다.
그런 이들에게 <에밀리아 페레즈>는 무척 당혹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대체 이 영화는 무슨 장르에 속할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쉽게 답이 나올 수 없다. 애초 그런 구분에 구애되지 않고 출발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명백히 악역에 속하는 인물이 성전환을 고민한다는, 감독이 무심코 읽던 소설 속 조역 캐릭터의 사연이 코로나 19로 고립된 시절, 머릿속에서 구름처럼 피어올라 확장된 내용은 영화화하고자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기이하게도 자꾸만 '오페라' 대본으로 변했다고 한다. 아예 이참에 정식으로 4막짜리 오페라를 만들어볼까, 감독은 고심했지만 본업에 충실하게 영화를 완성한다. 하지만 그 고민의 흔적은 아주 뚜렷하게 작품 전체에 새겨져 있는 셈이다.
영화는 내용 면에선 범죄 스릴러, 형식 측면으로는 뮤지컬 장르 구조를 갖췄다. 여기에 로맨스와 코미디가 가미된다. 일부에 포함되는 게 아니라 골고루 영화 전체에 융합되듯, 하지만 뒤죽박죽 혼재가 아니라 퍼즐 조립하듯 딱딱 끼워지며 서로를 조밀하게 연결해 떠받치는 식이다. 영화를 온전히 소화해야 이해 가능한 구석이다. 이런 다양한 요소가 중남미에서 보편적인 문화적 요소, '텔레노벨라 Telenovela'를 기본 틀로 삼아 조합된다. 직역하면 '텔레비전 소설', 과거에 국내 공중파 방송에서 종종 볼 수 있던 일일 단막극 같은 형식이다. 남녀나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다툼, 갈등을 주축으로 한국과는 비교 불가의 수위로 벌어지는 요란법석 '막장'극이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바로 이 '텔레노벨라'의 영화화 버전이라 하겠다. 물론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기조는 딱 그런 모양새다. 처음엔 생경하게 들리겠지만, 멕시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소재로 벌이는 거대한 '치정극'이란 이야기 얼개를 경험하면 수긍하기에 어렵지 않을 테다. 감독 자크 오디아르는 흔히 '3대 영화제' 전문 예술영화 감독으로 규정되곤 하지만, 늘 선이 굵은 범죄와 액션, 사건들로 점철된 자극적 소재를 활용해 작업을 진행해 왔다. 강렬한 소재와 거친 전개를 통해 관객에게 감정의 극적 정화를 유도하는 감독만의 스타일은 본 작품에서 일대 완성에 이른 셈이다.
그렇게 짚기 시작하면, 이 영화는 막장 드라마 특유의 '욕하면서도 자꾸만 보게 되는' 속성과 온통 시선을 잡아끄는 뮤지컬 특유의 몰입감이란 최상의 재료를 선택한 결과물이다. 감독의 전작들과 이질적으로 보이던 작품의 개성도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연결고리가 완성된다. 처음엔 그저 낯설고 현란한 혼돈 자체이지만, 점점 아주 익숙한 이야기, 그리고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평범한 실수와 충동에서 거대한 비극이 잉태된다는 보편적 교훈으로 치닫는다.
에밀리아의 내면에서 충돌하는 '젠더'
▲<에밀리아 페레즈> 스틸
그린나래미디어(주)
왜 악명 높은 카르텔 두목은 뜬금없이 여자가 되려는 걸까? 리타도 처음엔 들으면서도 믿지 못할 지경이다. 마니타스 '델 몬테'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천, 수만의 사람을 죽여왔다. '사업'에 방해가 된다면, 경쟁세력은 물론 민간인이고 경찰이고 정치인이고, 여자건 노인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런 악인이 왜 여성성을 갈망할까? 마니타스는 자신을 믿어달라며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음을 강조한다. 가난하고 범죄가 판치는 멕시코 시골에서 태어나 '퀴어'가 되느니 차라리 범죄자가 되는 게 남성성과 강함의 과시인 배경에서 살아남고자, 성공하고자 열심히 목숨을 걸고 살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는, 하지만 내면의 갈망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리타의 계획이 진행되며 수술을 집도할 세계 최고 전문가와 대면한 마니타스는 마지막 관문에 들어선다. 24살부터 의사로 활동하며 숱한 성전환 수술을 담당해 온 '와서만' 박사는 신분 세탁을 위해서라면 경력과 신분증을 위조하면 되지 않냐고 권유한다. 정말로 수술한다 해도 '여자'의 몸을 가진 내면의 '남자'가 될 수 있다며 전문가로서 의견을 낸 상대에게 마니타스는 자신의 진심을 들려준다. 그렇게 '에밀리아 페레즈'가 세상에 탄생한다.
리타는 꾸준히 의뢰인을 의심한다. 하지만 여자가 된 그는 내면에 잠재한 '여성성'이 발현되며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도 일부 책임을 진, 마약 카르텔에 의해 실종된 이들을 수습하고 가족에 시신을 인도하는 비정부 공익단체를 만들고 재산을 털어 열성적으로 활동한다. 처음엔 신분 세탁으로만 이해하던 리타도 점차 에밀리아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 쓴웃음을 지으며 리타는 에밀리아의 권유로 NGO 활동에 동참해 명예를 누린다. 그 과정에서 에밀리아는 여자로서 새 연인 '에피파니아'를 만난다. 에밀리아로선 과거를 조금이나마 속죄하는 건 물론 진실한 사랑도 얻었으니 더는 바랄 것 없는 완벽한 새출발이다.
하지만 여전히 에밀리아의 마음에 남아 있던 남성성이 재앙의 불씨가 된다. '델 몬테' 시절, 암살 위협 속에 유목민처럼 매일 거처를 옮기며 생사를 함께 하던 원래 가족을 포기하지 못한 에밀리아는 친척으로 위장해 가족을 불러들인다. 아이들이 너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을 잃고 방황하던 아내 '제시'는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다. 가족에 대한 소유욕이 발현하는 바람에 에밀리아는 다시금 (자신이 리타를 강제로 끌어들였던, '남성성'의 극단적 형태인) 무력과 금력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평생 떨쳐내려 한, 거의 성공에 도달한 어두운 그림자에 기대면서 에밀리아가 꿈꾼 행복은 어그러진다. 리타를 만족시킨, VISA 최상위 버전 '인피니트' 카드의 마력은 에밀리아가 간절히 원했던 여자로서의 행복을 보장해 준 것만이 아닌 셈이다. 적절하게 활용하고 떼어내야 했건만, 결국 '마니타스' 시절 피의 업보가 발목을 사로잡을 위기에 처한다. 그의 부와 권력의 원천이던 마약의 본질과 통하는 맥락이다. 그 장대한 비극이 압도적 형식미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영화는 찬사와 악평 한복판에 서 있다. 매혹적 이야기와 이미지에 사로잡힌 이도, 멕시코 현실을 착취하고 퀴어 내부 논란을 일삼는다며 분개한 이도 모두 각자 근거가 있다. 그러나 <에밀리아 페레즈>는 꼭 직접 보고 판단할 성질의 것이다. 일단 본 다음 의견을 나누자. 갑론을박은 그 후다.
<작품정보>
에밀리아 페레즈
Emilia Perez
2024|프랑스/멕시코|코미디/범죄/뮤지컬/스릴러
2025.03.12. 개봉|132분|15세 관람가
연출/각본 자크 오디아르
주연 조 샐다나,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셀레나 고메즈, 아드리아나 파즈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배급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공동배급 롯데컬처웍스㈜롯데시네마
공동제공 ㈜키노라이츠
2024 77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여우주연상
2025 97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조연상, 주제가상
▲<에밀리아 페레즈> 포스터그린나래미디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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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찬사와 악평 함께 쏟아진 이 영화, 꼭 직접 보고 판단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