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팬들과 만난 자리였다.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요즘 영화는 다 뻔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꼭 이야기만이 아니라 연출과 편집, 쇼트의 형태와 배열까지도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라고 하였다. 다른 이들이 앞다퉈 동의를 표했다. 그들에 따르면 현대 영화란 갈수록 대동소이해지는 것이다. 쇼트는 많아지고 연출은 자연스러워지며 편집은 보는 이가 그 흐름을 의식할 수 없도록 가는 경향이 뚜렷해진다는 이야기.

그 얼마 뒤 이번엔 영화를 제작하는 이들과 자리를 가졌다. 그들은 오늘날 한국 젊은 영화인들의 연출이 틀에 박혀 있음을 개탄하였다. 서로 얼마 다르지 않은 연출과 편집을 되풀이하는 탓으로 서사 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한국영화만의 새로움과 활력을 찾아보기 어렵단 이야기였다. 한 이가 말하기를 "요즈음 영화과에서 가르치는 것이 다 비슷하고 졸업하는 학생들도 거의 같은 지식을 가져서 창의적인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역시 영화판에 몸담은 사람이 말하길 오늘날 영화를 제작하는 체계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창의적이어야 마땅한 독립영화판에서조차 상업영화와 대동소이한 연출의 경향이 발견되는 이유로 그 제작체계의 한계를 언급했다. 기관으로부터 제작지원을 받아 제작되는 작품은 사전에 기획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 양식에서 장면마다 유명한 작품의 레퍼런스를 붙이게 마련이란 이야기다. 기성 작품의 레퍼런스를 인용해야 그를 참고하는 이가 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기 쉬우니, 그를 기반으로 연출된 작품은 창의적이라기보다는 있는 것의 반복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포스터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포스터엣나인필름

비슷해지는 영화, 달라지려는 작품

갈수록 영화 연출과 편집이, 장면과 장면의 연결부터 화면의 구성,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과 형식까지가 비슷해지고 있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아예 격식의 파괴를 목적으로 삼는 일단의 실험영화를 제외하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의 구분이 무색해지고 특수성이 사라지는 현상이 분명하다는 분석이다. 자연스럽고 매끄러울지 몰라도 형식의 도전을 도모하지 않는 경향이 한국영화판에서 갈수록 굳어지고 있단 사실은 결코 무시해선 안 되는 위기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에르완 르뒤크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 같은 측면에서 한국영화에 경각심을 던진다. 로맨스가 흐르는 가족드라마인 영화는 내용 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다분히 프랑스적이다. 익숙한 무엇에도 기대지 않은 채 자유분방하게 이야기를 펼쳐간다는 뜻이다. 딸을 낳고 훌쩍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모성애 없는 엄마와 아이를 책임지며 아내를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아빠의 모습부터가 한국영화에선 익히 접한 적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작품은 그저 설정의 특이함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본 이라면 누구나 쇼트와 쇼트의 이색적 배치, 즉 점프컷에 대해 의식할 밖에 없다. 그건 이 영화가 수차례에 걸쳐 의도적으로 점프컷을 적극 활용하고, 그로부터 분명한 영화적 효과를 구하고 있는 때문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스틸컷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스틸컷엣나인필름

의식을 깨워 생각하게 한다

흔히 현대 영화는 쇼트와 쇼트를 자연스럽게 배치해 관객이 연출자가 장면을 자르고 붙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감춘다. 서사가 진행되는 속도와 관객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속도가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편집을 약간 당기고 늦춤으로써 지루하지 않게 하는 방식을 가장 흔히 사용한다. 카메라는 관객이 이야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장소에 대부분 위치한다.

반면 점프컷은 관객으로 하여금 앞의 쇼트와 뒤의 쇼트가 어긋난 사실을 의도적으로 일깨운다. 지난 장면에서 프랑스의 집에서 누군가와 포르투갈 여행을 약속했는데, 다음 장면에선 곧장 함께 포르투갈 거리를 거닐고 있는 식이다. 통상 여행의 준비부터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 포르투갈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부리고 하는 등의 장면은 단박에 생략한다. 그로부터 관객은 마치 뒤의 장면이 타이타닉 앞에 갑자기 나타난 빙하처럼 돌출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점프컷의 효과는 명확하다. 사고의 속도와 시공간적 연속성의 유지라는 영상연출의 기존 관습을 무시함으로써 낯선 감각과 의식을 깨우는 것이다. '엇 갑자기 뭐지?'하는 일차적 당혹과 감독이 이처럼 익숙하지 않은 선택을 한 이유를 좇는 이차적 사유가 연달아 이뤄진다. 작품 가운데 인물의 감정에만 몰입하는 대신, 화면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이야기와 형식을 사유할 공간을 얻는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스틸컷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스틸컷엣나인필름

뚜렷한 경향과 그에 반하는 창작

현대 영화는 갈수록 쇼트를 짧게 가져가고 그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아이언맨>이 쇼트당 3.5초를 조금 넘는 길이였는데 <아이언맨2>는 3초, <아이언맨3>는 채 2.5초가 되지 않았다. 각기 2008년과 2010년, 2013년 제작된 작품이 이토록 큰 변화를 겪었단 사실은 현대 영화가 얼마나 빠르게 그 형식을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정 영화뿐이 아니다. 2002년 작 <본 아이덴티티>의 평균 쇼트 길이는 <아이언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4년 작 <본 슈프리머시>와 2007년 작 <본 얼티메이텀>은 2.5초 이하로 1초 이상 짧아졌다. 장면을 자연스럽게 하여 관객의 의식을 서사 안에 붙잡아 두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치밀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프랑스에서 일었던 영화 혁신운동, 소위 누벨바그 경향을 떠올리게 한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이후 195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영화제작의 경향으로 등장한 프랑스 누벨바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잘 만들어진 영화와 의도적으로 그 스타일을 달리하는 일련의 작품군을 이야기한다. 어딘지 낯설고 엉성한 스타일이 그 자체로 매력을 발하는 시도를 거듭했는데, 점프컷과 핸드헬드, 애드리브 연기와 카메라 앵글을 향해 말을 거는 장면 등 기존 상업영화에선 거의 쓰이지 않던 수법을 적극 활용했다.

에르완 르뒤크는 어느덧 사멸한 제 나라 옛 사조를 되살리려는 듯 그 특징들을 제 작품 안에 능청스레 활용한다. 에티엔(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이 첫사랑과 만나 진한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는 과정을 동화적으로 연출하면서도 어딘지 착 가라앉는 단조의 음악을 배경으로 까는 것부터가 이색적이다. 이들의 연애부터 에티엔이 축구선수 엘링 홀란드와 꼭 닮은 딸 로자(셀레스트 브룬켈 분)를 열성적으로 길러내는 과정, 나아가 대학교에 진학해 독립을 한 딸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낯설고 특이한 연출을 거듭한다. 이를 가만히 따르다보면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어디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영화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스틸컷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스틸컷엣나인필름

르뒤크가 한국 영화에 던지는 울림

에티엔이 우연히 서핑하는 이들을 다룬 TV프로그램에서 오래 전 사랑했던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를 찾아 세계 최고의 파도가 있다는 포르투갈로 떠나는 모습, 그로부터 이어진 일련의 이야기는 기실 영화의 형식만큼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영화는 내용보다 더욱 이색적인 연출을 통하여 저를 잊지 못하도록 한다. 에르완 르뒤크의 영화는 형식이 내용만큼 중요하다는 오랜 진실에 더하여, 현대 영화가 초창기의 혁신성을 잃은 채 관객을 마취시켜 제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맥 없이 잡혀 있도록 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케 한다.

기술과 학식이 과거에 비해 확연히 발전한 오늘의 영화가 과거만큼 혁신을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지 민망한 감상을 일으킨다. 할리우드에 비해 영화적 변방이라 할 만한 한국 영화계가 변혁을 포기한 채 익숙한 연출만을 반복하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민망함을 더욱 크게 한다. 근 몇 년 동안 독립영화를 뒤져 보아도 내세울 만한 파격과 혁신을 찾아보지 못한 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가 한국 영화와 예술, 나아가 문화계 전반에 울림이 있는 작품이라 여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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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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