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필사적으로 장르에서 도망친다. 두 형사의 연쇄살인 수사물이 엄혹한 시대상을 고발하는 <살인의 추억>으로 남고, 한강 둔치에 출몰한 괴수물은 약자의 생존과 연대를 묻는 정치영화로 <괴물>처럼 탈바꿈한다.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는 <마더>의 애틋한 동분서주는 결국 폭주하는 핏빛 춤사위로 한 덩어리가 되며, <기생충>에 이르러 소시민의 삐딱한 빈곤 탈출기는 벼락같은 초인종 소리와 함께 계급 투쟁의 참극으로 연결된다. 필모그래피 내내 봉 감독이 이어온 필사의 도주가 < 미키17 >에서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까.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

 영화 < 미키17 > 스틸컷
영화 < 미키17 > 스틸컷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영화 내부의 질서로 돌아가 보자. 개척선에서 제일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사람으로 보지도 않는 듯)는 외부 장치에 기억을 저장하고, 입력된 신체 데이터를 통해 바이오프린터로 새로운 몸을 찍어낼 수 있는 익스펜더블이다.

익스펜더블이 하찮게 여겨지는 까닭은 가치가 없는 탓인가. 그건 아니다. 어쩌면 개척선 승무원 중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를 하는 존재가 익스펜더블일이다. 익스펜더블이 없다면 가혹한 환경과 바이러스 득시글거리는 니플하임 행성에서 여러 번의 희생을 통해 백신을 만들어 정착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치의 기준을 바꾸지 않는다면 익스펜더블에 대한 푸대접은 이해할 수 없다. 기준을 중요성이 아닌 대체 가능성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고 갈등을 중재하는 고도의 사회적 활동이다. 개척선의 유일무이한 선장 마샬은 대체 불가한 정치활동을 하고 있나. 영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도 이에 동의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불과 얼마 전까지 미키와 같이 마카롱을 굽던 티모는 고작 몇 달 전에 취득한 조종사 면허로 취업이 된다. 티모의 수완을 칭찬할 게 아니라 까다롭게 승무원을 선별하던 개척선 내의 전문성을 의심하게 된다.

결국 익스펜더블의 무한한 대체 가능성으로 인한 고유성의 상실 역시 개척선 내의 가치와는 연관관계가 없다. 두 명의 익스펜더블이 존재하는 '멀티플'의 위험성을 알린 앨런 매니코바의 사례는 어떤가. 무한하게 찍어낼 수 있는 < 미키17 > 세계관은 복제인간의 딜레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봉 감독은 이 지점에서 탈주의 실마리를 찾은 듯 보인다.

마샬의 가스라이팅

 영화 < 미키17 > 스틸컷
영화 < 미키17 > 스틸컷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마샬과 그의 지지자들은 '원 앤드 온리(One and Only)'가 적힌 옷과 모자를 쓰고 함께 구호를 외친다. 종교단체의 후원을 받는 마샬의 정치적 퍼포먼스일 수도 있고, 개인적 신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구호와 다르다. 멀티플이 발생하면 대상을 모조리 말소하겠다 약속하지만, 지구 밖이든 어디든 익스펜더블을 프린트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마샬은 익스펜더블의 자아에 관심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한 번에 한 개씩 대체돼야 할 '일자리'에 복수의 지원자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마샬은 니플하임의 테라포밍이 끝날 때까지 연인과의 성관계도 중단하라고 말한다. 개척선의 사이클러로 만들 수 있는 한정된 식량과 자원 탓에 현재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일자리에 대한 통제의 의지가 더 강해 보인다. 폐쇄 사회인 개척선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너의 일자리가 타인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이다. 익스펜더블이 수행하는 임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천대하는 것은 마샬의 통치 철학을 주입하기 위한 가스라이팅의 완성이다.

미키의 연인인 나샤의 접근방식은 다르다. 나샤는 멀티플이 된 미키17·18에게 업무와 식량을 반으로 나눠서 생존하라고 제시한다. 이미 분리, 독립된 자아인 미키17을 넘기고 미키18을 가지라는 카이의 제안 역시 매몰차게 거절한다. 크리퍼는 나샤 가치관의 확장처럼 보인다. 마마 크리퍼는 나샤가 미키 17·18의 존재를 동등하게 대우했듯 수많은 개체 중 하나인 베이비 크리퍼 조코, 루코를 종족 전체와 동일시 한다. 원 앤드 온리. 나샤에게는 하나의 일자리를 한 명이 독점할 이유가 없다. 크리퍼들에게는 모두가 유일무이하다. 하나가 곧 전부다.

이후 미키17이 나샤와 합심해 루코를 구출하고 크리퍼와의 대치는 원만히 해결되며 바이오프린터도 폐기된다. 그럼 의문으로 남는 것은 한 가지. 미키18의 죽음이다. 미키17과 업무와 식량을 나누라는 나샤의 제안은 마샬의 통치 철학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눈여겨 볼 건 미키18이 내린 최후의 결정이다. 타인이 대체할 수 없는 고유성의 획득을 통해 미키는 죽음의 인수인계를 상징하는 '미키00' 굴레에서 벗어나 마침내 미키 반즈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봉준호 감독만이 가능한 '그 무엇'

 영화 < 미키17 > 스틸컷
영화 < 미키17 > 스틸컷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봉준호 감독은 이동진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이 절대 못하면 안 되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감독)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는 꼭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캐스팅, 장소 섭외, 촬영 등 모두 고통스럽지만 '이거 하나는 반드시 찍어야 한다'라는 생각 하나로 버틴다는 고백이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한 맺힌 물음, 석양을 뚫고 고속버스에서 하나로 뒤엉키는 춤사위, 폭우를 뚫고 물 지옥이 된 반지하 방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처럼 봉 감독은 항상 원하는 이미지를 관객에게 선명하게 설득해 왔다.

< 미키 17 >에서 봉 감독이 반드시 찍고 싶었던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크리퍼들이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예상해 본다. 소설이 영화화되며 바뀐 건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크리퍼의 설정 변화다. 개척기지의 금속 철판도 뜯어낼 수 있고, 작은 개체라도 가뿐하게 인명 살상이 가능했던 크리퍼가 '똥물에 튀긴 크로아상'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는 사건 해결의 주체다. 소설에서는 반물질 폭탄을 짊어진 미키7의 재치로 니플하임에서 인간과 크리퍼의 공존이 가능해진다. 영화에서는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마마크리퍼의 무시무시한 경고가 블러핑이었다. 소설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속였다면, 영화에서는 크리퍼가 인간을 속인다.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우주에서 가장 무해한 방법으로.

봉 감독은 이어 훗날 어떤 평가를 받고 싶냐는 질문에 "저 사람이 죽으면 저런 영화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훗날의 영화 팬들이 미키의 복제처럼 봉준호1, 봉준호2의 영화가 아니라 '원 앤드 온리' 봉준호로 기억하는 순간이 아닐까. < 미키 17>속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는 '원 앤드 온리'가 되기 충분하다.

 영화 < 미키17 > 스틸컷
영화 < 미키17 > 스틸컷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영화 미키17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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