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물다섯 번째 편지> 스틸컷
영화 <스물다섯 번째 편지> 스틸컷인디그라운드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관계의 감정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 이상의 감정이 포개어지는 자리에서 완성되는 덩어리에는 내가 두고 오는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놓이게 되는 것 역시 존재해서다. 이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잘 접어내는 것만큼이나 그곳에 놓인 마음을 오롯이 펼쳐낼 줄 알아야 한다. 한쪽이라도 소홀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동안 쌓아온 시절과 감각 이상의 것을 잃게 된다. 존재다.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개인의 감정을 다루는 일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기억하네? 다 잊고 사는 줄 알았는데."

김혜인, 김중회 감독의 <스물다섯 번째 편지>에는 유영(박가영 분)이 있다. 현실의 복잡한 사정을 뒤로 하고 고향에 잠시 내려온 그는 오래전 알고 지냈던 진서(정혜경 분)를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분명 두 인물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만 어느 한순간도 관계를 직접 언급하거나 물리적인 행동으로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장면에 다다르기는 과정만 보더라도 상당히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우연히 만나고. 진서가 유영을 스치듯 지나치고. 다시 돌아보며 들어오지 않느냐고 묻고.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진서의 카페가 있던 자리에 원래 슈퍼가 있지 않았느냐고 떠올리고. 유영의 기억력에 다시 진서가 핀잔을 주고. 카메라가 유영의 결혼반지를 비추고. 결혼과 관련한 서로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두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었던 시간, 그 공백의 거리를 지워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수록 더 피상적인 물음을 먼저 묻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 한 마디로 끝날 것을 이리도 빙빙, 텅 빈 입속을 굴리듯 돌아 서로를 마주한다.

02.
두 사람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영화 어디에나 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담긴 공통된 장소나 사건, 장면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것을 인지하기에 모자라지 않다. 요즘 만나는 사람이 없느냐는 유영의 물음에 굳이 '전 여친'과 헤어진 지 반년이 되었다는 명확한 지칭을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에서 진서는 관객이 아닌 유영을 향해 메시지를 던진다. 오래전 편지도 주고받고 시도 써주던 두 사람의 관계를 은근히 드러내던 영화는 하나의 공백을 고의로 만든다. 마지막 유영의 편지에 쓰여 있던 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극 중 유영은 진서의 귓속말을 통해 자신이 썼던 문장을 듣고 미소를 띠며 아련한 표정을 짓는다. 관객은 알 수 없는 공백, 하나의 내막이다.

의도된 공백은 균형을 잃은 관계의 감정으로 인해 형성되었다. 현재의 상태로만 보자면 완전히 돌아온 인물(진서)과 잠시 내려온 인물(유영)의 입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태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진서는 과거 유영의 모습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함께 쌓았을 마음에 진서는 언제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드는 쪽이었고, 유영은 여지를 남겨뒀던 것 같다. 실제로 두 사람의 편지가 세상에 들통났을 때, 서로만 생각하며 떠나기로 했지만 유영은 그 약속을 저버린다. 잊고 살고자 했던 사람과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사람의 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서로의 안부를 묻기 직전까지 영화가 좁히지 못하던 그 거리다.

 영화 <스물다섯 번째 편지> 스틸컷
영화 <스물다섯 번째 편지>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3.
"엄마 그거 알아? 나는 우리가 지낼 때도 충분히 평범하다고 느꼈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의 마지막에 쓰였을 (영화로는 묵음에 해당하는) 유영의 문장과 애써 잊으려 했다는 그의 노력은 미움이나 원망과 같은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을 또렷하게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었던 세상의 잣대와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움에 더 가깝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면, 그의 말에서도 직접 언급되고 있는 엄마 정희(정애화 분)의 존재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공백이란 기술적으로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과거의 한 시점이지만, 의미적으로는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언제나 감추고 불안해야 했던 어떤 사람의 모양이 된다.

유영과 진서의 서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유영의 엄마 정희가 있다. 유영이 집에 내려와 처음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후반부에서 또 한 번 모습을 드러내는 그는 조금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시험관을 하지 않는 이상 아이를 갖기 힘들다고 말하는 딸의 사정 앞에서조차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위인 정 서방과의 관계라는 점이다. 딸이 집을 떠나는 순간에도 그가 제일 당부하는 것은 다음에는 꼭 정 서방과 함께 내려오는 일이다. 딸의 안부에 앞서 놓이는 것,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이다.

어떤 사연으로 남편과 이별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지만 그에 대한 반동이 딸인 유영의 삶에 투영된다는 점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 당사자인 엄마의 삶 때문이 아니라 유영이 선택하고 살아가게 될 삶의 모습이 그로 인해 달라지고 있다. 진서와 함께 떠나지 못한 일,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룬 일, 그리고 아이를 낳기 위해 노력하는 일까지 모두 전부다. 마지막 스물네 번째 편지를 쓰고 난 이후에 선택된 그의 모든 삶은 엄마의 소원과 닮아있다. 하지만 엄마는 또 평범하게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말한다.

 영화 <스물다섯 번째 편지> 스틸컷
영화 <스물다섯 번째 편지>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4.
오래전 쓰인 스물네 번째 편지의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곳에 어떤 문장이 남겨졌을지는 모르지만 어떤 마음으로 쓰였을지는 이제 가늠할 수 있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을 엄마의 기대와 바람을 배신하게 되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의 감정에 대한 편견의 무게. 편지 속 그 공허한 자리에 그런 혼란스러움이 고목의 뿌리처럼 깊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평범해야 한다는 말은 쉽고 가깝게 여겨질 수 있지만, 때때로 누군가의 내일을 꺾어내기도 하니까.

유영은 진서의 가게에 들러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제주를 떠난다. 이제 그는 남편과 이혼할 생각이다. 평범해지기 위한 노력이 아닌 진짜를 위한 선택을 위해서다. 유영의 스물다섯 번째 편지가 어떤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유영이, 이제 더 이상 함께 축적한 사랑의 자리로부터 일방적으로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이 아닌 타인의 기대나 편견에 맞추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관계의 감정을 만들어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영이 웃는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다.
덧붙이는 글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유통 배급 환경 개선을 위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는 2025년 3월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4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90편(장편 22편, 단편 68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 큐레이션인 '겨울의 진실'은 3월 1일부터 3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스물다섯번째편지 박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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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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