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들 나라에 '독재자' 한 명쯤 있는 걸까. 최근 개봉한 영화 < 미키17 > 속 나쁜 독재자 캐릭터를 보고 전 세계 관객들이 너도나도 "우리나라 정치인 같다"고 공감하고 있다. 이러한 반응에 제작자 봉준호 감독은 지난달 26일(현지 시각) <스티븐 콜베어 쇼>에 출연해 "나라마다 정치적 스트레스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관객들이 (자국) 정치인을 투사하는 거 같다"고 답했다.

한국인이라면 이 캐릭터에 더 움찔할 수 있다. 이름은 '마샬(Marshall)', 국가 원수를 뜻하는 단어 '마샬(Marshal)'에서 비롯한 듯한데 하필 계엄령을 뜻하는 '마샬 로(Martial law)'와 발음이 비슷하다. 거기에 영부인과 한 몸처럼 붙어있고, 연설문을 떠듬떠듬 읽는 모습까지 보면 더욱 기시감이 든다.

마샬과 영부인

 영화 <미키17> 스틸컷
영화 <미키17> 스틸컷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마샬(마크 러팔로)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한 인물이다. 그러나 극단 종교 단체의 후원을 받아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는 프로젝트를 이끌게 된다. 과장된 몸짓으로 종교 지도자처럼 행세하는 그는 통치를 가장한 수탈을 행한다.

자원을 아끼기 위해 조그마한 우주선에 사람들을 몰아놓고, 음식 배급은 그램 단위로 따지며 아낀다. 게다가 에너지 낭비라고 커플 간 애정행각까지 금지했다. 정작 자신은 널찍한 방에서 호화스러운 음식을 먹으며 영부인과 사랑을 나누기 바쁘다.

정치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마샬은 번번이 영부인의 입과 귀를 빌려 행동한다. 짧은 연설문을 못 외워서 영부인이 옆에서 읽어주고, 부하들의 간단한 질문에 답변하지 못해서 영부인이 나선다. 또 사소한 것도 영부인의 호령이 떨어져야 결정한다. 대중 앞에 비치는 건 마샬이지만, 행성 개척단의 전권을 결정하고 명령하는 건 사실상 영부인이다.

그런 대통령 부부가 합심한 프로젝트는 '익스펜더블', 말 그대로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험 쥐처럼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를 이용한다. 행성 개척 과정에서 위험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눈보라에 던지고, 검증되지 않은 백신을 투약했다가, 미완성 단계인 배양육을 강제로 먹인다. 만일 미키가 사망하게 되어도 괜찮다. 다시 그의 몸을 프린트해 새로운 실험에 투입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 목숨을 가볍게 아는 대통령 일가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미키를 보아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영부인은 "미키가 죽고 핏자국이 내 카펫에 남으면 어떡하냐"고 짜증 내고, 마샬은 "빨리 죽게 만들자"며 귀찮다는 듯 총구를 들이민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태도는 행성 괴생명체 '크리퍼'를 보았을 때도 똑같다.

인간을 보호하려는 크리퍼와 달리 마샬은 "역사 속에 용감한 지도자로 남고 싶다"며 학살을 명령한다. 그 옆에서 영부인은 새끼 크리퍼의 꼬리를 잘라 식용 소스로 만들기 바쁘다. 권력욕에 마비되어 지구인을 괴롭히다 못해 이젠 다른 행성의 원주민까지 죽이기 시작한 대통령 부부, 과연 그들이 내린 '크리퍼 학살' 명령을 따라도 되는 걸까.

저항정신 일깨운 미키18

 영화 <미키17> 스틸컷
영화 <미키17> 스틸컷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다행히 학살 명령에 관료들은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마샬의 폭력적인 발언과 행동을 몰래 촬영했다. 그리고 극단적인 명령이 떨어지자 "당신들의 행동은 잘못되었다. 위원회에 회부하겠다"며 체포한다. 영부인이 "지금 반란을 일으키는 거냐"고 협박해도 관료들은 흔들리지 않고 그들을 처벌한 다음, 새로운 정치 제도를 만들어간다.

반면, 주인공 '미키'의 행동은 달랐다. 정확히는 17번째 프린트된 '미키17'과 18번째 프린트된 '미키18'의 태도가 다르다고 할까. 원래 규칙은 기존 미키가 사망한 다음에 새로운 미키를 복제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두 명의 미키가 존재하게 되었고, 그들은 마샬의 부조리한 행보에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유순한 성향의 '미키17'은 줄곧 마샬에게 복종했다. 매번 자신을 실험에 투입하여 죽게 만들고, 감정도 취향도 없는 실험체처럼 취급해도 묵묵히 넘기곤 했다. 순응적인 '미키17'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운 건 또 다른 나, '미키18'이었다.

'미키18'은 "왜 너를 죽이려고 하는 마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냐"며 그를 다그친다. 우물쭈물하는 '미키17'에게 거듭 호통치며 "마샬을 없애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고, 홀로 암살 작전을 펼치기도 한다. 비록 작전은 실패했지만, '미키18'의 호전적인 행동은 '미키17'을 변화시킨다.

마침내 그들은 크리퍼 집단을 학살하겠다는 마샬의 명령에 함께 맞선다. '미키17'이 납치된 새끼 크리퍼를 구출하고 크리퍼 지도자와 소통하는 동안, '미키18'은 폭탄을 이용해 마샬을 처단한다.

처음에는 마샬 앞에서 고개도 못 들던 '미키17'은 '미키18'을 만나 반항적인 인물로 성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수없이 복제해 마샬의 수족으로 만들었던 프린터를 제 손으로 폭파시킨다. 수동적이었던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들과 부딪히며 저항심을 키우고, 불합리한 체제를 박살 내는 영화 < 미키17 >. 역시 봉준호 감독다운 발상이다.

역사가 반복되어도 우리는 '사랑'하는 거야

부패한 정치인 마샬이 죽고, 주인공 미키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로 끝나길 바랐다. 그러나 < 미키17 >은 스산한 그림자를 남긴다. 대통령 부부가 모두 세상을 떠났음에도 미키는 악몽을 꾼다. 죽은 자신을 수없이 프린트해서 되살렸던 것처럼 끔찍한 독재자 부부가 다시 태어나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때마다 미키는 이 모든 일이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걱정에 빠진다.

영화를 벗어난 현실도 마찬가지다. 지겨운 역사는 반복된다. 나쁜 정치인을 물리치면 다시 나쁜 정치인이 나타나고, 부당한 정권을 종식시키면 또 다른 정권이 집권해 말썽을 피운다. 아무리 정부 형태를 바꾸고 개헌해도 독재자가 나타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

영화 < 미키17 >의 해법은 뻔하지만, '사랑'이었다. 소모품처럼 쓰이는 미키를 가여워하고, 끔찍한 고문에 시달리는 크리퍼를 가여워하는 캐릭터들의 마음이 모여 거대한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했다.

혼란스러운 시국에 처한 우리도 < 미키17 > 속 캐릭터들처럼 서로 사랑하면 어떨까. 각자가 지닌 고통에 공감하고, 손을 맞잡고, 힘을 합친다면 항상 반복하는 부정부패의 역사 속에서 서로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풍자한 건지, 있는 그대로 재현한 건지 헷갈리는 영화 < 미키17 >. 부조리를 종식한 결말까지 대한민국을 닮았으면 좋겠다.

 영화 <미키17> 포스터
영화 <미키17> 포스터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미키17 봉준호 로버트패틴슨 나오미애키 마크러팔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