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버드> 스틸
찬란
모든 예술이 다 그렇지만, 영화라는 장르 역시 특정 시대의 결과물이다. 밀레니엄을 맞이하던 세기말 전후의 대표작들은 분야 불문하고 고유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화이트 버드> 역시 그렇다. 영화라는 거대한 '꿈'의 표현이 본 작품에서 어떻게 구사되는지 관찰하는 건, 아름다운 교훈적 이야기와 함께 이 영화를 누리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기능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쟁의 한복판, 야만적인 홀로코스트가 호시탐탐 사라를 노리는 가운데, 안네 프랑크처럼 소녀 역시 독일군과 부역배의 총구뿐 아니라 절망적 고립감과 맞서야 했다. 안네는 가족이라도 함께 있었지 온전히 외톨이인 사라는 종일 헛간 구석에 숨어 있어야만 한다. 제정신 유지하기 힘든 환경이다. 그런 소녀를 견딜 수 있게 한 건 매일 학교 수업을 과외를 하듯 전달하고, 말벗이 되어주던 소년의 존재다. 줄리안은 마을 극장에서 영사기사 조수를 맡던 전력을 살려 독특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헛간의 낡은 트럭을 전망대 혹은 객석으로 삼고, 희미한 램프 불을 조명으로 활용해 소년은 사라에게 영화를 구연하기 시작한다. 점점 발전한 테크닉 덕분에 사라가 좋아하던 찰리 채플린으로 분장한 일인극에 도달한다. 그렇게 외딴 헛간에 고립된 소년과 소녀는 밤마다 상상 속 여행을 함께 하며 잔인한 세상을 초월하는 단꿈에 빠졌다. 나치는 마을 극장에서 독일 승전을 홍보하는 관제 선전 뉴스를 내보내고, 독일 영화 상영을 강요한다.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의) 레니 리펜슈탈 영화가 화면에 떡하니 박히는 장면이 은근히 놀랍다.
정교하게 세공된 시대상황 고찰은 나치의 폭압뿐 아니라 작은 마을에서 격렬하게 대비되는 '반유대주의와 부역자 vs. 레지스탕스와 구조자' 형상화로 독일 지배 아래 프랑스 사회를 압축한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굳이 옛 상처를 들려준 목적처럼, <화이트 버드>는 과거의 야만이 여전히 잠복해 있고, 조금만 어둠에 빛이 삼켜져도 언제든 다시 마수를 드러낼 것이란 준엄한 경고를 날린다.
이는 과거를 잊은 줄리안의 부모가 범하는 과오에도 적용된다. 가해자 나치의 방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피해자 이스라엘의 패착 말이다. 근래 홀로코스트 소재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룩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씁쓸하게 남는 묘한 거북함을 돌파한 결과물이다.
사라를 못살게 굴던 빈센트의 말쑥하고 잘생겼지만 공허하던 표정은, 줄리안이 전학 간 학교에서 '같은 급'이라며 다가오던 상류층 백인 소년의 오만함으로 재현된다. 그에 대한 줄리안의 반응은 원작과 영화에서 약간 다르지만, 트럼프 집권 아래 벌어지는 위험한 징후를 염려하는 '인류(애)여 영원하라!' 호소로 연결된다. 교훈적 동화로만 취급하다 화들짝 놀라게 될, 극단과 혐오가 판치는 시대에 딱 맞게 도착한 진정한 '계몽' 교재다. 각색 과정에서 변형된 내용과 좀 더 상세한 해설은 원작자의 소설과 그래픽노블을 참고자료로 활용하길 필수로 권한다.
[작품정보]
화이트 버드
White Bird
2024|미국|가족/드라마/전쟁
2025.03.12. 개봉|121분|12세 관람가
감독 마크 포스터
출연 아리엘라 글레이저, 올랜도 슈워드, 브라이스 게이사르, 질리언 앤더슨, 헬렌 미렌 외
원작 <화이트 버드> - R.J. 팔라시오
수입 찬란
배급 (주)올랄라스토리
공동제공 소지섭, 51k
▲<화이트 버드> 포스터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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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