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현지시각) 베니티페어 오스카 애프터파티에 참석한 데미 무어
지난 2일(현지시각) 베니티페어 오스카 애프터파티에 참석한 데미 무어연합뉴스/AP

2일(미국 LA 현지시각) 열린 제97회 아카데미 영화제 최대의 이변은 누가 뭐래도 여우주연상이다. 오스카는 영화 <아노라>의 스물다섯 여배우 마이키 매디슨에 돌아갔는데, 2013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제니퍼 로렌스 이후 두 번째 1990년대 출생 여배우의 수상이다.

마이키 매디슨의 수상이 이변으로 평가되는 건 그녀의 연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번 시상식의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아노라>의 원톱 주연배우로 그녀는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연기를 훌륭히 소화했다. 희망이라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우즈베키스탄계 미국 이주 2세대로,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다 만난 돈 많은 러시아 남자에 기대 제 인생을 고치려 드는 주인공 애니를 연기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올해 여우주연상은 다른 이에게 돌아가리라 내다봤는데, 그건 올해 독보적인 후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데미 무어, 한물간 청춘스타로 가십성 보도에나 오르내리는 퇴물이란 세간의 평가를 박살 내고 생애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한 인생작에서 인생 연기를 펼쳤다. 영화는 결코 주요 부문이라 볼 수 없는 분장상 한 개 부문 수상에 그쳤으나, 작품을 본 관객이라면 잊을 수 없는 영화로 남을 <서브스턴스>가 데미 무어를 생애 첫 오스카에 근접하게 한 인생작이다.

3대 시상식 석권했지만...

 <서브스턴스> 스틸컷
<서브스턴스> 스틸컷찬란

그녀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투표기간에 열리는 이른바 '오스카 레이스'의 압도적 주자로 평가됐다. 아카데미와 함께 미국 영화산업 4대 메이저 시상식이라 불리며 오스카 레이스에 상당한 파급을 미치는 세 시상식, 즉 골든 글로브와 크리틱스 초이스, 미국배우조합(SAG)상 모두에서 여우주연상을 석권하기도 했다. 수상은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서브스턴스>는 그와 닮은 영화를 단 한 편도 댈 수 없는 희소하고 특별한 작품이다. 가히 컬트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영화가 대중이며 관객의 선호를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가고, 감독의 의도와 욕구를 조금도 훼손치 않으며 끝의 끝까지 이야기를 몰아친다. 영화는 가진 모든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하여 멈춰 설 때까지 불타올랐다. 한 조각 아쉬움도 남지 않는 완전연소의 지점에서 그 여정을 끝마친다. <서브스턴스>에 대해 '개미친영화'란 다섯 글자로 홍보문구를 뽑은 수입배급사의 결정이 이 작품의 성격을 방증한다.

이 미친 영화에서 데미 무어는 영화만큼 미친 연기를 펼친다. 서브스턴스란 이름의 금지된 약물이 늙은 육신의 등가죽을 문자 그대로 열어젖혀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불러온다는 게 이 영화의 기괴한 설정이다. 영화는 빛나는 육신과 그 대가처럼 남겨지는 처지고 주름져 보기 싫은 육체를 대비시킨다. 데미 무어는 이중 갈수록 추해져 역겹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인 후자의 존재를 연기한다.

 데미 무어의 출세작이 된 <사랑과 영혼>.
데미 무어의 출세작이 된 <사랑과 영혼>.UIP 코리아

엘리자베스는 한때 오스카를 거머쥘 만큼 촉망받는 배우이자 스타였으나 지금은 50대에 접어든 TV에어로빅쇼 진행자일 뿐이다. 더 이상 예쁘지 않고 늙었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는 하나 남은 쇼에서까지 하차통보를 받는다. 미모는 시들었고 배우로서의 역량도 얼마 존중받지 못하는 탓에 더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며 집착은 계속되어 젊게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수단은 죄다 한 결과가 오늘의 엘리자베스인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데미 무어의 오늘과 겹쳐져 보이는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데미 무어가 걸어온 길은 어떠한가. 낮은 목소리와 하늘하늘한 몸매, 앙다물면 어딘지 강인한 인상이 엿보이는 입매, 짧게 깎은 헤어스타일은 물론이고 삭발까지도 찰떡같이 소화하는 중성적인 인상까지, 데미 무어의 외양은 당대 할리우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1980년대 차고 넘치는 청춘스타들 사이에서 확고한 팬층을 구축할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독특한 매력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에 접어들며 데미 무어는 그저 청춘스타의 반열을 벗어난다. <사랑과 영혼>을 신호탄으로 <어 퓨 굿 맨>·<은밀한 유혹>·<폭로>·< G. I. 제인 >에 이르기까지 당대 명감독들과 함께 한 수준급 작품들을 통해 배우로도 인정받게 됐다. 롭 라이너·애드리언 라인·베리 래빈슨·리들리 스콧이 데미 무어를 선택한 데는 당대 스타의 티켓파워 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자질 또한 역할을 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브루스 윌리스와 세 번째 결혼을 한 뒤 그와 이혼하기까지의 10여 년 동안을 데미 무어는 배우로서나 화제성 있는 스타로서 할리우드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 지냈다.

최고에서 최악까지, 데미 무어의 20년

 리들리 스콧의 작품에서 삭발 연기로 화제를 모은 데미 무어.
리들리 스콧의 작품에서 삭발 연기로 화제를 모은 데미 무어.부에나 비스타

그러나 이후는 거짓말처럼 달랐다. 21세기 들어 데미 무어가 출연한 작품 가운데 뚜렷한 성공작이라 할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출연한 20여 편의 작품이 대부분 졸작, 몇 편만이 범작 정도로 평가할 만한데, 그마저도 연기를 인상적이라 말하긴 민망한 수준이다.

나오는 평이라곤 나이에 비해 잘 가꾼 몸매와 관련한 것이라거나 영화홍보에 영향을 미치는 가십거리가 고작이었다. 출연작 면면을 고려하면 작품을 보는 안목까지도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서브스턴스> 출연 직전쯤에 이르러선 데미 무어를 배우로서 끝장났다고 보는 이가 그렇지 않은 이보다 수십 배는 많았을 테다.

워낙 사생활이 파격적이라고는 하지만 세 번째 이혼 뒤 무려 16살이나 어린 배우 애쉬튼 커쳐와 교제를 시작한 건 가뜩이나 불안했던 데미 무어의 이미지가 가십거리로 소진되는 데 기여했다. 전남편 브루스 윌리스가 그 교제를 직접 축하하고 응원까지 했음에도 대중은 그를 할리우드 톱스타들의 기묘한 사생활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며 도마 위에 올리길 꺼리지 않았다. 네 번째 이혼을 전후해 감행한 수차례 전신 성형이며 미용에의 집착이 언론을 통해 적나라하게 알려지며 그녀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확고하게 고정시켰다.

특히 수술 사유와 관련한 온갖 루머부터, 그녀가 받은 구체적인 수술과 시술 종류, 가격 등과 관련한 적나라한 기술, 데미 무어가 성형중독에 빠져 있다는 확인된 바 없는 온갖 기사들까지 마치 사실처럼 언론을 통해 보도된 건 충격적인 수준이다. 심지어는 성형외과 전문의들이 각 매체에 나와 데미 무어의 수술과 관련한 온갖 인터뷰를 진행해 그 할리우드에서조차 자성의 목소리가 일었을 정도다. 데미 무어 스스로 성형수술 사실과 그것이 남긴 허망함 등에 대해 털어놓은 건 온갖 논란이 갈무리된 2010년대에 이르러서였으니 그간 감내해야 했을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 락다운 213주 > 스틸컷
< 락다운 213주 > 스틸컷그린나래미디어

자연인으로서 데미 무어가 걸어온 행보가 영화 <서브스턴스> 속 엘리자베스와 겹쳐 보이는 건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데미 무어보다 이 역할에 더 어울리는 배우는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엘리자베스는 데미 무어를 연상케 하고 데미 무어는 엘리자베스를 떠올리게 한다.

배우의 삶이 그려낸 모양이 작품 속 캐릭터와 꼭 맞는 절묘한 광경을, 그것이 빚어내는 강력한 힘을 관객은 <서브스턴스> 가운데 확인하게 된다. 이 영화가 특출난 파괴력을 지니게 되기까지 데미 무어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물론 데미 무어는 오스카의 주인이 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관객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수상 불발을 아쉬워할 게 분명하다. 그건 배우의 삶 전체가 작품 속 인물의 캐릭터와 맞아떨어지는 희소하고 특별한 장면을 관객 또한 느끼기 때문이고, 그런 광경은 영화 역사 전체를 가로질러도 채 몇을 찾아낼 수 없는 탓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오스카 수상에 실패한 데미 무어의 이야기를 적기로 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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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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